2009. 3. 30. 21:38ㆍ게시판
강 영 선 목사 (한신대 교수)
흔히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한다. “기독교인들은 왜 제사를 안 드리는가? 그것은 조상공경의 미풍양속에 반하는 것 아닌가?” “기독교인이 제사 때 절을 안 하고 서서 기도만 하는 것은 가족공동체의 화합을 해치는 행위가 아닌가?” “죽은 조상에게 절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하던데, 조상공경과 우상숭배의 차이는 무엇인가?” 등등.
1. 제사문제와 기독교의 충돌
질문에서처럼 제사문제는 실제로 명절을 당할 때마다 가족공동체 속에서 부닥치는 문제다. 제사문제로 인해 가족 간에 화합이 깨진 가정들도 많이 있고, 명절 때 가족이 모이는 모임을 일부러 기피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누구나 한 평생 가족공동체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인데, 이 문제에 대해 보다 분명한 입장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기독교인들은 왜 제사를 드리지 않는가? 라는 질문은 기독교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가진 질문이다. 기독교는 기독교적 방식으로 제사를 드리는데, 그것을 흔히 ‘추도식’ 또는 ‘추모예배’라고 부른다.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유교적 방식으로 제사를 드려온데 비해 기독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방식으로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종종 오해를 받는 것이다. 지금부터 220여년 전에 이 땅에 천주교가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 이 제사문제로 인해 천주교인들이 모진 박해를 받았던 것은 이미 잘 아는 사실이다.
일찍이 16세기에 중국에 들어갔던 예수회 신부들은 중국인들의 조상숭배 전통과 풍습을 훼손하지 않았고,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유교의 상제(上帝)와 같다하여 하나님을 천주(天主)로 부르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미니칸 수도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그러한 예수회의 선교방식에 반대 입장을 취했고, 이 문제는 나중에 로마교황청과 중국황실과의 갈등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그 결과 교황 클레멘트 2세는 1715년 3월 19일에 교서를 발표해 전 세계 가톨릭 교인들로 하여금 조상제사를 금하게 했다.
1784년에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한국 땅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이승훈, 정약용, 이벽, 권일신 등은 교황청의 지침대로 조상제사는 하나님 숭배에 반대되는 미신이라고 가르쳤고, 이로 인해 수많은 순교자가 나오게 되었다. 소위 천주학(天主學)과 유학(儒學)의 갈등이 한국 땅에서 시작되었는데, 당시의 권력층은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교(邪敎)라고 박해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거쳐 온 가톨릭은 1939년에, 교황 파이우스 12세(Pius Ⅻ)에 의해 조상제사를 허용하였다. 교황청은 “문화와 전통적 습관의 의미가 바뀌었으므로 조상제사는 하나의 시민적 미풍양속일 뿐, 종교적 의식이 아니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의 제2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은 전통문화에 더욱 개방적인 입장으로 바뀌었으며, 지금은 적극적으로 우리의 전통적 제사문화를 수용하는 입장에 서 있다.
가톨릭 보다 100여년 후에 이 땅에 들어온 개신교의 선교사들은 한국의 조상제사 문제에 대해 매우 엄격한 입장을 취했다. 마펫(Maffett) 목사는 1893년에 신자의 규범을 만들어 세례훈련의 교재로 삼았는데, 그 규범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사신(邪神)우상숭배 금지, 조상제사 폐지, 주일성수, 부모공경, 축첩(蓄妾)엄금, 가정의 순화(자녀에 대한 예우), 음주 도박 도둑질 간음 거짓말 등의 악습폐지, 근면성실하게 일해 가정생계를 풍족히 할 것 등.”(고려대 민속문화연구소 편, 한국문화대계, 제6권, 593쪽). 원입교인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 3개월 동안 이러한 교육을 시킨 후 그 내용을 지키기로 서약하면 세례를 주었던 것이다. 개신교 역시, 가톨릭이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로 여겼고, 그 관념적 뿌리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이러한 제사문제가 크게 사회문제가 된 것은 1920년의 일이다. 동아일보 1920년 9월 1일자 보도에 의하면, 경북 영주에 살던 권성화라는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조석상식(朝夕上食)을 폐지하였다. 그의 아내 박씨는 효성이 극진하여 시어머니의 조석상식을 지성껏 모셔왔는데, 남편이 이를 금하자 불효(不孝)의 죄를 죽음으로 갚기로 작정하고, 시어머니의 신주(神主)를 뒷동산에 묻은 후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사건을 동아일보는 “애매 무죄한 기독교의 희생자! 남편이 예수교를 믿어 상식(上食)을 폐한 결과 며느리가 대신 죽어” 라는 표제로 대서특필했다. 그 결과 기독교의 제사문제는 사회적 이슈가 되었고, 온갖 비난이 기독교에 퍼부어졌다.
이 사건에 대해 동아일보 기자가 당시 YMCA 총무였던 이상재선생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그는 조상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로 인해 동아일보는 “조선의 제사는 일신사상(一神思想)에 위배되지 아니한다.” “선조기념과 우상숭배는 별개의 것이다.” 등의 제목의 기사를 3회에 걸쳐 개제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사설도 있었는데, 그 내용의 주요 부분은 지금도 고려할 가치가 있다. “제사란 선조의 영혼을 위로하고, 망각하지 아니하고 사모하는 예(禮)인즉, 예수교도 영혼의 존재를 믿는 이상, 그 영혼 앞에 절하는 것이 왜 미신이며 우상숭배인가? 예수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대개 무식한 천민들만이 입교했기에 선교사들에게 조선문화를 제대로 알려주지 못한 결과 선교사들은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가르치게 되었다. 만약 초대 교인들이 지식인들이었다면, 제사의 유래와 정신을 바르게 선교사들에게 가르쳤을 것이다. 제사의 폐단은 고쳐나가야 하되, 예수교인들이 제사를 우상숭배로 아는 것 역시 고쳐야 한다.”(1920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 사설) 이 사설은 유학자 출신 기독교인이 썼다고 알려져 있고, 당시 지식인들의 생각은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2. 유교적 제사의 근본정신
유교적 제사의 근본정신은 효(孝)에 있다. 유교에서는 효를 모든 덕의 근본이요 최고의 선으로 본다. 공자는 효를 덕의 근본으로 가르쳤으며, 모든 가르침이 여기서 시작된다고 했다. 그는 덕치주의(德治主義)의 바탕이 되는 가족제도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부모공경을 하늘공경과 동등시하여, 부모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라고 했다. 즉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인륜(人倫)이라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천륜(天倫)이라 하여, 효를 종교적 차원으로 끌어올렸던 것이다. 이러한 효의 종교성이 죽음에 대한 유교의 독특한 이해와 연결되어 부모 생시(生時)의 효가 사후(死後)에도 계속되어 조상숭배인 제사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제사는 가장 구체적인 효심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효경’(孝經)의 기효행장(紀孝行章)에서는 효의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하는 중에 부모 사후에도 상중(喪中)의 공양을 비롯해서 춘추(春秋)의 제사는 반드시 정결하고 근엄하게 행할 것이며, 사후의 섬김 역시 생시에 섬김 같이 지성으로 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제사의 근본정신은 조상의 신이 제사를 흠향(歆饗)하기 때문도 아니고, 또한 복을 기구(祈求)하기 위함도 아니라, 인간의 도리로서 생명의 본(本)이신 부모와 선조를 바르게 섬기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교사상을 정치이념으로 하여 생활윤리가 확립된 것은 이조시대부터다. 그러나 유학(儒學)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그보다 훨씬 앞선 서기 640년경부터인데, 당시 당태종이 경학(經學)을 장려하기 위하여 국내외에서 학생을 모집했고, 이 때 신라, 고구려, 백제에서 젊은이들이 당나라에 가서 학문을 연구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설총, 최치원, 최충, 정몽주, 권근과 같은 훌륭한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고려말기에 이르러 불교계가 타락하고 사회적 혼란과 질서의 문란이 가중되면서 새로운 지도이념이 필요하게 되었고, 충효(忠孝)를 근본이념으로 하는 유교적 윤리는 당시의 조정(朝廷)을 사로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학(儒學)이 모든 분야에서 중추(中樞)를 이루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식으로 제사를 지냈지만, 이조시대부터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여 사대부 가문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4대조(四代祖)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 때부터 효가 모든 윤리적 덕목의 근본이 되고, 인간의 백행지원(百行之源)이 모두 효에서 이루어진다고 가르쳤다. 효는 충(忠)보다 앞선다. 그래서 효를 강조한 나머지 “효자의 가문에서 충신을 구하라.” 또는 “충신의 집에서 효자난다.”등의 말들이 생겨났다.
효 가운데서 가장 으뜸은 부모공경이며, 살아서는 예(禮)로써 부모를 섬기고, 죽어서는 제(祭)로써 섬기라고 가르쳤다. 즉 부모에 대한 효는 부모의 생존시는 물론이고, 죽은 다음에도 계속되었던 것이다. “사자(死者)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 하고, 이미 죽은 부모 섬기기를 산 부모 섬기듯 하라”는 논어의 가르침은 효의 근간이었고, 천륜(天倫)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사후에까지 연장시켜 제례(祭禮)로써 효를 다하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제사는 어버이 생시에 미처 다하지 못했던 봉양(奉養)을 사후에 자식된 도리로서 뒤쫓아서 하는 효도의 한 방편이었다.
따라서 제사를 책임 질 아들이 없는 것은 조상에게 불효 중의 큰 불효였다. 이러한 유교의 제사문화는 당연히 남아선호사상을 불러 일으켰고, 여자의 임무는 오직 남편가문의 대를 이어서 제사를 드려줄 아들을 생산하는 것이 되었으며, 아들을 생산하지 못하는 여인은 아내로서의 자격미달에 해당되었다. 이러한 문화는 결국 일부다처제를 장려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대리모(씨받이)를 통해서라도 아들을 얻어야 조상에게 면목이 서게 되었다.
이제는 시대가 변하여 요즈음 우리나라 여성계에서는 호주제 폐지운동이 활발하다. 호주제 폐지는 여자도 호주가 될 수 있고, 자식이 아버지의 성을 따를 수도 있고,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도 있도록 개정하는 것인데, 제사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일한 해결책은 딸도 제사를 상속할 수 있도록 바꾸는 것인데, 유교입장에서는 천년 이상 내려온 전통을 바꾸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3. 제사와 추도예식의 근본 차이
앞에서 언급한 유교적 제사와 기독교의 추도예식에 근본적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예배의 대상문제다. 유교적 제사에서는 조상의 기일(忌日)을 맞아 후손들이 제사상을 차려놓고, 신위(神位)를 올려놓고, 절을 올리면 죽은 조상의 신이 그 자리에 와서 후손들의 절을 받고 음식도 먹는다는 신앙적 관념에 뿌리를 두고 그렇게 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예배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다. 조상의 기일을 맞이하여, 먼저 가신 그분을 추모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기독교 제사의 근본정신이다. 즉 예배와 숭배의 대상이 서로 달라서, 유교에서는 조상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고인의 영혼은 추념(追念)과 감사와 위로의 대상이지, 유교에서처럼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여기에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근본 차이가 있다.
이 점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보자. 유교적 제사에서는 강신(降神)순서에서 돌아가신 보모의 위(位) 앞에 분향(焚香)하고, 재배(再拜)한 뒤, 꿇어앉아서 술을 따라 세 번 부어드린 뒤, 고사(告辭)를 읽고, 다시 재배(再拜)를 드린다. 이때에 제주(祭主) 이하 모든 사람이 절을 두 번씩 올린다. 고사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이제 영원히 돌아가신 때를 맞아 감히 신주(神主)를 정침(正寢, 제사지내는 방) 안에 모시기를 청하고자 추모하는 내용을 올립니다.” 쉽게 표현하면, 조상의 신이 이곳에 임재(臨在)하셔서 우리의 정성을 받아달라는 뜻이다. 기독교적으로 이것은 성령임재의 기원(Epiclesis)에 해당된다. 그리고 조상에게 술과 음식을 권하는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 유식(侑食) 등의 순서가 있는데, 음식을 권하는 축문(祝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0년 0월 0일 효자 000는 감히 고합니다. 해가 바뀌어 000님이 돌아가신 날이 또다시 돌아오니, 은혜가 하늘과 같이 크고 넓어서 끝이 없습니다. 이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청주와 여러 가지 음식으로 공손히 절을 드리오니 흠향하시옵소서.” 조상의 신을 음식상에 초대하는 이러한 요소들을 볼 때 유교의 제사에서 숭배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조상신(祖上神)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러한 조상신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참된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
4. 제사에서 절하는 문제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로서 제사에서 절하는 문제가 있다. 한국 기독교의 초창기에는 당시 선교사들이 조상숭배에 대해서 얼마나 강하게 반대했던지 무엇에나 허리를 숙이고 절하면 그것을 우상숭배로 본 웃지 못 할 일화도 있다. 신학교에 다니던 아들이 객지에서 돌아와 부친께 엎드려 절을 하니 그 아버지가 화를 내며 “이 무슨 참람한 짓이냐? 내게 절을 하다니, 신학교에서 십계명을 범해도 좋다고 가르치더냐?”라고 호통쳤다고 한다(전택부, 토박이 신앙산맥, 96쪽). 제사에서 절하는 것을 우상시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십계명의 제2계명에서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계명을 반대이유로 인용한다. 그러나 그 계명은 하나님을 우상 섬기듯이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하지 말라는 뜻으로써 당시 중동지역 이방 신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즉 이방종교들이 자기네 신의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절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말라는 뜻이며, 따라서 이 말씀을 부모공경에 적용하는 것은 격에 맞지 않다. 우상을 섬기는 것과 조상에게 절하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가톨릭에서는 1939년에, 교황 파이우스 12세(Pius Ⅻ)에 의해 조상제사가 허용되었다. 조상제사를 하나의 미풍양속일 뿐, 종교적 의식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개신교의 조용기목사 역시 죽은 조상에게 절하는 것을 긍정한 적이 있다. “부모는 죽어서도 부모인데, 그 부모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니라,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산 부모에게 절하듯이 돌아가신 부모에게 절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한국의 상당수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은 산 부모와 죽은 부모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산 부모는 인격체이기 때문에 잘 공경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죽은 부모는 인격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음식을 차려놓고 죽은 조상에게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죽은 조상에게 절하는 그 행위가 종교적 숭배의 차원인가, 아니면 부모공경의 차원인가에 있다. 분명한 것은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조상신에게 절을 올린다는 신앙적 신념을 가진 채 절을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상숭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국기에 경례하는 것도 우상숭배라고 가르치는 사이비 종파도 있는 판이니, 신앙적 입장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조상숭배가 아닌 부모공경이라는 입장에 분명히 서있다면, 절하는 것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가톨릭의 입장대로, 조상제사는 이미 종교적 의식이라기보다는 조상공경의 미풍양속이라는 입장에 확고하게 서있다면, 제사에 참여하고 절하는 모든 것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뜻이다. 각 나라마다 인사문화가 다르고, 윗사람에 대한 예절문화 또한 다르다. 우리는 윗 어른에게 예를 갖춰 인사드릴 때 큰 절을 올린다. 악수나 포옹 보다는 큰 절을 올리는 것이 우리 문화에 맞는 정중한 인사법이다. 따라서 죽은 조상에 대한 인사방법 역시 서서 기도만 드리는 것 보다는 절을 올리는 것이 우리 문화에 맞다고 본다.
물론 온 가족이 기독교 신자가 되어서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조상을 추모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전통적 제사문화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족화합에 저해요인이 되는 것은 결코 예수님이 바라시는 바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로 보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문화와 전통에 따른 예절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명절을 맞이할 때마다 먼저가신 선조들을 추모하면서, 살아계시는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형제자매 친지들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혈연공동체인 가족의 유대와 화합에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선다면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덧붙여서 확실하게 해 둘 것이 있다. 부모공경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은 돌아가신 부모 보다는 살아계시는 부모님에게 효성과 공경을 바쳐야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인지 죽은 조상에 대한 언급은 성서에 그리 많지 않은데 비해, 살아계시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가르침은 많이 나온다. 행여라도 부모님 살아생전에 다하지 못한 효성을 죽은 다음에 제의(祭儀)로서 보상하려는 심리가 깔려 있다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살아계시는 부모님에게 지극한 정성과 효성을 바치는 것이 기독교적 효도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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