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언덕
2016. 6. 3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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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계유는 자(字)가 중순(仲醇)이고 화정(華亭)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재주가 높은 유생으로 동현재(董玄宰, 玄宰는 동기창(董其昌)의 자), 왕진옥(王辰玉, 辰玉은 왕형(王衡)의 자)과 명성을 같이하였다. 30세가 되기 전에 유자(儒者)의 의관을 가져다 불태워버리고, 서익손(徐益孫)과 함께 소곤산(小崑山)에서 은거하였다.…… 중순(仲醇)은 또 오월(吳越) 지역의 곤궁하고 굶주린 가난한 선비와 노련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그들에게 장구(章句)를 찾고 분류하게 하였으며, 짧은 글과 희귀한 내용을 뽑게 하여 책을 만드니 먼 곳까지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견문이 짧은 사람들이 다투어 사서 침상에 두는 비서(祕書)로 삼았다. 이리하여 미공(眉公)의 이름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멀리 오랑캐의 추장과 토관(土官)들이 모두 그의 사장(詞章)을 구하려 하였으며, 가까이는 술집과 찻집에 모두 그의 화상(畫像)을 걸었다. 심지어는 궁벽한 시골의 작은 고을에서 떡을 팔거나 된장을 파는 자까지도 모두 ‘미공’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였다. 繼儒, 字仲醇, 華亭人. 小爲高才生, 與董玄宰、王辰玉齊名. 年未三十, 取儒衣冠焚棄之, 與徐生益孫, 結隱于小崑山. ……而仲醇又能延招吳越間窮儒、老宿隱約飢寒者, 使之尋章摘句, 族分部居, 刺取其瑣言、僻事, 薈蕞成書, 流傳遠邇. 款啓寡聞者, 爭購爲枕中之秘. 於是眉公之名, 傾動寰宇. 遠而夷酋土司, 咸丐其詞章, 近而酒樓、茶館, 悉懸其畫像, 甚至窮鄕小邑, 鬻粔籹、市鹽豉者, 胥被以眉公之名, 無得免焉. - 전겸익(錢謙益, 1582~1664), 『열조시집소전(列朝詩集小傳) 진계유(陳繼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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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한 번의 선택이 자신을 둘러싼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어떤 이는 그 선택을 잘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런 선택을 한 것을 후회하기도 할 것이다. 여기 삶의 고비에서 특별한 선택을 한 중국인을 소개하려 한다. 진계유(1558~1639)는 중국 명나라 때 문인(文人)으로 『명사(明史)』 「은일전(隱逸傳)」에 실려 있다. 미공(眉公), 녹공(麋公), 공청(空靑) 등으로 불렸으며, 시(詩), 문(文), 서(書), 화(畵) 모두에 뛰어났으므로 당시의 문인과 관료들이 교유하기를 원했던 인물이다. 그 당시는 과거(科擧)가 현달(顯達)해질 수 있는 통로였기 때문에 유자(儒者)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과거 공부에 매달렸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았고 21세에 이미 학궁(學宮)에 입학한 제생(諸生)이 되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향시(鄕試)에서 거푸 낙방하였다. 기존 틀에 진입이 어려워진 것이다. 그러자 28세 때 유자의 의관을 불태우고 군장(郡長)에게 격문을 보내 온 군민들을 모두 놀라게 하였다. ‘30세가 되기 전에 유자(儒者)의 의관(衣冠)을 가져다 불태워버렸다.’는 것은 그가 과거를 통해 출세하는 삶의 방식을 포기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그의 특별한 선택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다른 방식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진계유는 상해(上海) 동사산(東佘山) 아래 은거하며 저술과 학문 연구, 서화(書畫)와 금석(金石)에 매진하였다. 일평생 많은 저술을 하여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에 실린 저서가 31종이나 되니, 『보안당비급(寶顔堂秘笈)』 400여 권, 『견문록』 9권, 『태평청화(太平清話)』 4권 등과 고계(高啟)·왕면(王冕)에서부터 이지(李贄)에 이르는 문인의 시를 모두 수집하고 작자에 대한 간략한 열전을 붙인 『국조명공시선(國朝名公詩選)』 등등이다. 그의 저술은 경사자집(經史子集)의 내용 중에서 선(善)과 악(惡), 전형적인 것과 경계로 삼을 것, 경구로 삼을 만한 것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을 만한 것을 뽑아내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이 점이 기존의 저술들과의 차별화되었던 점이고 너도나도 그의 저술을 찾게 한 이유라 할 수 있다. 모든 책을 읽지 않고도 온갖 책에 있는 같은 주제의 내용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획기적인 것으로 비췄을 것이다. 요즘의 서점에 해당하는 서방(書坊)에서 대량으로 그의 저술을 간행하자 견문이 적은 사람들이 다투어 사서 침상 곁에 두고 늘 읽을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가 이처럼 방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저술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 나름의 방식이 있었다. 그는 당시 과거에 매진하다 궁핍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오월 지역의 선비들을 불러 모아 주제별로 구절들을 뽑고 항목별로 분류하는 등의 일을 맡겨 책을 만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들의 경제적 어려움도 같이 해결되었을 것이다. 명대의 벤처기업이라고 해야 할까? 진계유의 업적은 명대의 출판업 발달로 연결되었다. 『명사』 「예문지」에는 당시 보급된 책 5033종이 실려 있는데, 진계유가 살던 시기인 만력(萬曆 1573-1620) 이후에만 4720종의 책이 나왔다. 서책이 특정인들의 전유물이었던 시대에 그 속에 담긴 지식을 대중에게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고, 그 방식이 과거(科擧)의 성행으로 인해 생겨난 유생들을 대거 참여시키는 방법을 채택하였다는 것은 당시로는 혁신적인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에 그의 저술이 민간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던 듯하다. 멀리 오랑캐의 추장과 토관들이 모두 그의 저술을 구하려 하였으며, 술집과 찻집에도 모두 그의 화상을 걸었고 심지어 궁벽한 시골의 작은 고을에서 떡을 팔거나 된장을 파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물건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하니 말이다. 청대에는 떡에다 ‘미공고(眉公糕)’, 옷감에다 ‘미공포(眉公布)’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 왼쪽: 진계유 초상. 오른쪽: 진계유의 서화작품 (台灣WORD(www.twword.com)에서 인용 ) 그의 저술은 우리나라에도 즉각 영향을 미쳤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의 선조, 광해군, 인조 때에 해당하는데,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에서 ‘眉公’이라고 검색하면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 이익(李瀷)의 『성호전집』 ,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 정약용(丁若鏞)의 『여유당전서』 등에서 그의 책을 인용하고 있다. 심지어 허균(1569~1618)은 진계유와 거의 동시대를 산 사람인데도 그의 책을 인용하고 있으니, 파급이 얼마나 신속하게 이루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따라가는 것은 쉽고 안전하다. 진계유가 살던 명대의 지식인들은 과거가 부귀와 영달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확신하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유자의 의관을 불태우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여 한 시대의 문화를 변화시킨 진계유에게 박수를 보낸다. 기존의 틀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 대한 확신과 용기로 새로운 삶의 틀을 만들어 낸 분에게 보내는 박수이다. |
글쓴이김진옥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주요 역서 및 논문 - 『한국문집총간』해제 작성, 『일성록』 번역, 『조선왕조실록』 재번역 사업에 참여
- 『金吾憲錄』의 자료적 가치, 『민족문화』36호, 2015
- ‘推考’의 性格과 運用, 『고전번역연구』제3집, 201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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