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승정원일기 고찰 [ 전식(全湜) 3 ]
인조 8년 경오(1630) 4월 11일(경신) 맑음
08-04-11[07] 주강을 행할 때 영부사 김류 등이 입시하여 《서전》을 진강하였다
주강이 있었다. 이때 영부사 김류(金瑬), 특진관 이수일(李守一)ㆍ홍서봉(洪瑞鳳)ㆍ남이공(南以恭), 참찬관 김경징(金慶徵), 대사간 전식(全湜), 장령 유성증(兪省曾), 시독관 조위한(趙緯韓), 검토관 이경증(李景曾), 가주서 홍전(洪瑑), 기사관 이척연(李惕然)ㆍ홍처후(洪處厚)가 입시하였다. 《서전》 상서 반경 중(盤庚中)을 읽었는데, ‘반경작(盤庚作)’에서 ‘하손어곤고호(何損於困苦乎)’까지였다.
인조 8년 경오(1630) 8월 9일(병진) 아침에 맑다가 저물녘에 비 옴
08-08-09[02] 정사가 있었다
정사가 있었다. 이비가 박정현(朴鼎賢), 김대덕(金大德)을 총관(摠管)으로, 윤흔(尹昕)을 동지(同知)로, 강굉(姜紘)을 첨지(僉知)로, 서경우(徐景雨)를 승지로, 전식(全湜)을 병조 참의로, 이행원(李行遠)을 부교리로, 최유해(崔有海)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인조 8년 경오(1630) 10월 13일(무오) 맑음
08-10-13[26] 정사가 있었다
정사가 있었다. 이비가 정언에 민광훈(閔光勛)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에 전식(全湜)을, 형조 참판에 남이웅(南以雄)을, 병조 참의에 김시국(金蓍國)을 차하하였다.
인조 13년 을해(1635) 1월 26일(정축) 비
13-01-26[12] 이비가 남이웅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비가 남이웅(南以雄)을 갈성분위진무 공신(竭誠奮威振武功臣) 자헌대부(資憲大夫) 춘성군(春城君) 겸 지의금부사로, 윤이지(尹履之)를 겸 동지의금부사로, 정온(鄭蘊)을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사로, 정광성(鄭廣成)을 가선대부 병조 참판으로, 김시양(金時讓)을 숭정대부(崇政大夫) 행 강화부 유수(行江華府留守)로, 홍명구(洪命耈)를 지제교로, 목서흠(睦敍欽)을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 참의로, 이소한(李昭漢)을 통정대부 병조참지 지제교로, 최혜길(崔惠吉)을 통정대부 승정원우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으로, 정세구(鄭世矩)를 통정대부 승정원좌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으로, 전식(全湜)을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으로, 윤전(尹烇)을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예빈시 정으로, 이정남(李井男)을 통훈대부 행 한성부 서윤(行漢城府庶尹)으로, 정원석(鄭元奭)을 통훈대부 행 사재감 첨정(行司宰監僉正)으로, 이상혐(李尙馦)을 통훈대부 행 공조 정랑으로, 윤구(尹坵)를 통훈대부 행 사간원헌납 지제교 겸 세자시강원사서로, 변시익(卞時益)을 조산대부(朝散大夫) 행 성균관 직강으로, 채충원(蔡忠元)을 조산대부 예조 좌랑으로, 오달제(吳達濟)를 봉렬대부(奉列大夫) 행 병조 좌랑으로, 윤득열(尹得說)을 통훈대부 행 사헌부 □□로, 유영(柳潁)을 통훈대부 행 홍문관 수찬으로, - 5자 원문 빠짐 -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으로, 이□□(李□□)를 통덕랑(通德郞) 행 성균관전적 지제교로, 김□□(金□□)를 통훈대부 행 세자시강원 사서로, 황연(黃渷)을 명과학 교수(命課學敎授)로 삼았다. 참하(參下)로는, 승의랑(承議郞) 행 승정원주서 겸 춘추관기사관에 유철(兪㯙)을, 승훈랑(承訓郞) 행 교서관 박사에 한함(韓涵)을, 무공랑(務功郞) 행 성균관 학정(行成均館學正)에 정호인(鄭好仁)을, 조산대부 행 영릉 참봉(行英陵參奉)에 정백순(鄭百順)을 제수하였다. 외직(外職)으로는, 윤정지(尹挺之)를 통훈대부 행 가평 군수(行加平郡守)로, 정홍연(鄭弘演)을 통훈대부 행 김제 군수(行金堤郡守)로, 최시우(崔時遇)를 봉훈랑(奉訓郞) 전라 도사(全羅都事)로, 박경원(朴慶元)을 통훈대부 행 보안도 찰방(行保安道察訪)으로 삼았다.
- 이상은 신여본에 의거함 -
인조 13년 을해(1635) 1월 27일(무인) 맑음
13-01-27[13]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으므로 체차해 주기를 청하는 대사간 전식의 계
대사간 전식(全湜)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본직을 맡아 함부로 짧은 소장을 올렸는데 소장의 조어(措語)가 마땅함을 잃어 사람들의 말이 있었고 논의가 매우 분분하였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뒤에 다시 새로운 명이 내렸으니, 어떻게 감히 물의를 일으킨 사람이 다시 언관의 자리를 차지하여 남을 바로잡겠습니까. 신의 직임을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인조 15년 정축(1637) 2월 19일(기축) 맑음
15-02-19[23] 근왕하지 못하고 부제학 전식의 진영을 따라 다니다가 이제야 문안한다는 전 정랑 조희인 등의 상소
전 정랑 조희인(曺希仁)과 전 군수 민여찬(閔汝纘)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들은 모두 파산(罷散)된 사람으로 영남 지방에 살면서 지난해 12월 19일에 대가(大駕)가 남한산성으로 옮겨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도로가 막혀서 근왕(勤王)하여 보좌할 길이 없었습니다. 부제학 전식(全湜)이 의병(義兵)을 모집하였으므로 진영을 따라 다니다가 지금에야 올라와 감히 달려와 문안하는 의리를 펴게 되니, 지극히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소장(疏章)을 보고서 비로소 그대들이 군대를 모집하여 왔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한 충성을 나는 지극히 가상히 여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