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親元派와 親明派의 對立 [전보(全甫)]

한강의 언덕 2019. 3. 28. 11:35

한국사 8 고려 - 고려후기의 사회와 문화 > . 對外關係進展 > 1. 高麗·明 關係 > (3) 親元派親明派對立

 

(3) 親元派親明派對立

 

 

恭愍王이 시해된 후 후사문제에 관하여 처음 朝臣간에 의견이 분분하다가 中立派 李仁任이 재빨리 손을 써서 여러 의견을 물리치고 江寧大君 禑를 맞이하여 즉위시킴으로써 정국은 비교적 온건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李仁任은 처음부터 중립을 취하여 특히 외교정책에 있어서 親元 정책이 결정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親明 정책도 소홀히 다루어 온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때의 高麗 외교정책은 에 두 다리를 걸치는 이른바 양단 외교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親元派는 이에 큰 불만을 품고 金義를 사주하여 明使를 죽이고, 그 여세를 몰아 외교정책을 일거에 親元 정책으로 전환시키려 하였으나, 이것도 中立派 李仁任의 세력에 눌려 마음대로 되지 못하고 말았다.

李仁任이 정권을 잡고 禑王 즉위하자, 高麗는 곧 에 대하여 前王諡號新王承襲 승인을 청하기로 하여 典工判書 閔伯萱 등을 에 사신으로 보내는 한편(禑王 즉위년 11). 같은 달에 또 北元納哈出의 사절을 받아들이고 있다. 遣明使 閔伯萱 등은 도중에 明使의 살해사건 때문에 되돌아왔고, 이 사실을 알게 된 高麗는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낭패와 自怯에 휩싸여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인심은 흉흉했다. 高麗는 이 중대한 시국에 대처하기 위하여 같은 해(禑王 즉위년) 12월에 恭愍王 18년 이래 단절되었던 北元과의 외교관계를 정식으로 회복하고 判密直司事 金湑北元에 보내어 전왕의 을 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北元은 다음해 5월에 사신을 파견했으나, 新進儒學派(親明派) 朴尚衷·鄭道傳 등의 격렬한 반대에 봉착하여 開京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高麗賛成事 黄裳 등을 江界에 보내어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그후 高麗北元과의 관계는 篤朶不花(脫脫不花) 문제로 약간의 마찰이 있기는 하였으나, 사신의 교환을 계속하여 舊誼를 회복하고, 3(1377) 2월에는 北元의 책봉과 전왕의 시호(孝敬大王)까지 받게 되었다.

이와같이 李仁任의 외교정책은 明使 살해사건을 계기로 황망 중에 한 때 反明, 親元으로 기우는 듯하였으나, 현실적으로 高麗의 입장은 親元 일변도로 나갈 수 없는 미묘한 難點이 있었다.

北元과의 通交再開에 정면으로 반대의 깃발을 올린 사람은 新進儒學派(親明派)였다. 典校令 朴尚衷成均司藝 鄭道傳은 속히 에 사신을 보내어 前王하되. 만일 그렇지 못하면 쓸데없이 明帝의 의심을 사서 무슨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르니 깊이 성찰함이 마땅하다고 강경하게 주장하매, 李仁任도 할 수 없이 그들의 주장에 굽혀 判宗簿寺事 崔源에 보내게 되었다. 北元告訃使를 보내고 얼마 안 된 福王 즉위년 12월 하순이었다. ·에 두 다리를 걸치는 이중 외교정책이 다시 부활한 셈이다.

이때 崔源나라 禮部에 수교한 문서를 보면, 明使(林密) 일행의 출발에서부터 귀국길에 오르기까지의 경위, 金義蔡斌 살해사건의 전말, 첫번째의 告訃使 閔伯萱回還事情 明使가 요구한 貢馬 2천필의 나머지를 계속 발송할 것 등에 관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高麗는 조심스럽고도 어려웠던 위의 두 사건의 진상을 에게 자세히 해명한 것이 되며, 이 중에서 특히 문제가 미묘한 明使 살해사건은 高麗와 아무 관계없이 일어난 것이라고 극구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하여튼 이 당시의 高麗의 외교정책은 北元에 기울면서도 한편으로는 을 주로 해야 된다는 新進儒學派의 주장에 현실적으로 마지못해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崔源使行으로 두 사건의 전말이 충분히 해명되었지만, 의 경화된 태도는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았다. 의 만행과 위협은 계속되었다. 崔源이 구금되고, 馬匹進獻使 孫天用, 동년 5월의 馬匹進獻使 全甫, 동년 12월의 賀正使 金寶生은 구금되었는지 그후 소식이 묘연하다가, 崔源全甫만이 46월에 겨우 석방되어 귀국하였다. 사신으로 간 사람을 구금하다니 만행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高麗는 새로운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참고 견디었다.

이러한 가운데 高麗가 계속해서 에게 요청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왕의 請諡 今王請襲이었고, 다음이 歲貢(金銀貢·布貢 馬貢)의 감면이었다. 이미 北元의 책봉을 받고도 과의 교섭을 계속 진행시킨 것은, 안으로는 新進儒學派(親明派)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고, 밖으로는 의 강대한 신흥 세력과 기울어만 가는 北元의 국력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구금되었던 崔源·全甫가 석방되어 돌아오고, 請諡請襲이 계속 거부하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경화된 태도가 약간 누그러진 징조가 보이게 되자, 4(1378) 9월에 洪武 연호를 다시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高麗實利 외교에 민감한 움직임을 보인 좋은 증좌라고 하겠다.

그리고 53월에 賀正使 沈德符 등이 돌아오면서 갖고 온 勅諭註 007

를 보면, 은 여기에서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中書省에서 사람을 高麗에 보내어, 前王이 정말 돌아가고 今王이 즉위하여 政令이 전왕 때와 같이 시행되고 있는지, 嗣王은 연금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를 확인할 것이며, 貢物은 사실이 그러면 금년에는 1천필과 執政大臣의 절반을 來朝시키고, 명년에는 1백근, 1만량, 良馬 1백필, 細布 1만필로 하되, 이후에는 매년 이를 상례로 한다는 것이었다. 別詔를 통하여 明使 살해의 죄를 들고 高麗 執政大臣의 내조와 위의 歲貢을 이행하지 않으면 군대를 일으켜 문책하겠다고 위협까지 하고 있다.

高麗施政視察을 위한 明使 郡壘·趙根 일행은 沈德符 등과 동행하여 甜水站(遼陽東南九十支里甜水堡)까지 왔다가, 高麗가 아직 北元과 통교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해 듣고는, 蔡斌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되돌아가고 말았다. 明使가 중도에서 귀국함에 따라 高麗과의 관계는 다시 경색하게 되었지만, 高麗는 앞서의 의 제시조건을 현실로 받아들여 앞으로의 對明 교섭의 기초로 삼았다. 이러한 점에서 위의 國書는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高麗는 동년 10월에 門下評理 李茂方·判密直 裵彥을 파견하여 歲貢으로서 314, 1, 白細布 5, 黑細布 5, 雜色馬 2을 갖고 가게 했다. 그러나 李茂方 등은 登州에서 저지되어 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음해 6월에 헛되이 돌아오고 말았다. 李茂方 등의 실패는 위에서 말한 明使 郡壘 등의 虛歸가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 같다. 이리하여 ·관계는 계속 난항을 거듭하게 되고, 여기에 새로운 불씨를 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섭은 高麗의 은인자중으로 별다른 사단을 일으키지 않고 11(1385) 7월에 일단 마무리를 지어 新王誥命前王諡號를 얻게 되기까지, 李茂方의 사행(510)부터 잡아도 59개월 동안에 무려 18회에 걸쳐 사신을 일방적으로 보냈으며, 그 동안에 遼東에서 저지되어 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8회요, 구금 유배된 사람이 4회에 걸쳐 수십인에 달하였다. 高麗로서는 참기 어려운 시련이었고 너무나 값비싼 대가였다.

 

은 지금까지 遼東 경유의 高麗 사신을 모조리 들어오지 못하게 저지한 끝에, 910海路로 겨우 들어간 金庾·李子庸 등을 구금하면서, 자못 위협적인 태도로 소원을 성취하려면 5년간 밀린 歲貢을 한목에 납부하라고 독촉했다. 高麗는 마지못하여 이에 따르기로 하고 進獻盤纏色을 베풀어 그 임무를 맡게 하였다. 그리하여 高麗5, 5, 5, 5을 갖은 경제적 고통을 참아가며 金銀의 일부는 馬匹折價하여008

1010월에 전량 결제를 끝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高麗의 성의를 호의로서 받아들여 禑王 114월에 구류 중인 金庾 6인을 석방하여 귀국시키고, 동년 7월에는 宣之哲 38이 방환되어 귀국했다. 그리고 한편 은 동년 7월에 高麗國王으로 책봉하고 前王의 시호를 恭愍이라 하고, 동시에 國子監學錄 張溥詔書使, 國子監典簿 周倬諡册使로 삼아 高麗에 파견했다. 이것은 林密(恭愍王 234來朝) 이후 12년만에 처음 사신을 高麗에 보낸 것이 된다. 恭愍王이 시해되고 禑王이 즉위한 이래 10여년간 줄곧 긴장상태가 지속되어 온 ·관계는 여기에 일단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역사의 이 펼쳐지게 되었다.

이와같이 갖은 우여곡절 끝에 ·관계는 일단 舊誼를 회복했지만, 그동안 이 가한 위협 억압 만행 및 무리한 求索은 적지않이 高麗의 분노를 사게 했다. 北元의 신흥세력에 압도되어 기력을 펴지 못하고 있는 중에서도 高麗에서는 親元勢力이 만만치 않게 자라고 있었다. 일부 廷臣 중에는 李仁任이 차차 親明으로 기울어 가는데 대하여 회의와 불안을 품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崔瑩이었다. 崔瑩은 당시 각지에 창궐하고 있던 倭寇를 여러번 격멸하여 큰 공을 세운 명장으로서 청렴하고 철저한 애국지성은 누구나 좀처럼 따르기 힘들었다. 그는 본래부터 親元派라기 보다는 우국지성에서 의 무리한 요구와 계속적인 횡포에 반감을 품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두 나라는 국교를 회복한 지 겨우 1년 남짓한 12(1386) 11월부터 다시 파란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이때 이 또 어려운 문제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으로부터 5索買高麗使臣往來禁絕에 관한 咨文이 전해진 것이다. 전자의 馬匹索買1211월에 門下評理 安翊 등이 聖節使로 갔다 돌아와 전달했는데, 이것은 지난 127월에 鄭夢周가 청원하여 이루어진 歲貢減免에 관한 결정, 三年一貢 良馬五十匹의 취지와는 크게 어긋나는 일이다.

의 이 과중한 馬匹 요구는 元將 納哈出의 정벌을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서, 비록 그것이 段子 1·綿布 4로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이지만, 지난번에 歲貢으로 마필이 많이 빠져나간 뒤였기 때문에(5,233)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요구에 대하여 高麗는 동년(12) 12월에 典客令 郭海龍에 보내어 의 산출이 풍부치 못하고, 또 그 품종이 矮小하여 대가를 받을 수 없으나, 힘써 변통하겠다009

는 말을 전달하였다.

그리하여 高麗는 다음해 133월에서 6월에 걸쳐 5천의 마필을 모두 5으로 나누어 遼東에 보내는 성의를 보였다. 遼東都司는 그 제1이 도착했을 때 노약왜소한 말은 골라서 돌려보냈으며, 51천필은 전부 툇자를 맞고 다시 보내는 고초를 겪었다. 그리고 말은 3등급으로 나누어 상등은 段子 2·8, 중등은 단자 1·6, 하등은 단자 1·4필로 환산하여 모두 단자는 2,670, 30,186필이 지급되었다고 한다.010

단자가 예정숫자보다 많이 적은 것은 곧 上等馬보다 下等馬가 많았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만치 부족한 말을 무리하여 변통한 高麗의 고통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郭海龍이 다음해(13) 2월에 귀국하여 高麗 사신의 遼東 내왕을 禁絕한다는 뜻밖의 사실을 보고해 왔다. 이미 일단 왕래를 허락했으나, 내왕이 오래가면 爭端이 이로부터 생겨 백성이 화근을 입으므로 이제부터 내왕을 금절한다011

遼東을 다시 폐쇄한다는 것이지만, 이유로서는 매우 모호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이것은 한낱 구실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는 馬匹索買의 경우와 같이 納哈出 정벌에 만전을 기하기 위한 예방조치로서 다시 遼東을 폐쇄하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高麗 사신이 遼東을 내왕하는 중에 納哈出과 내통하며 遼東經營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일찍부터 경계하고 있다가 또 이번 조치를 취하게 된 것이다.

馬匹求索도 큰 문제지만 遼東 폐쇄로 인한 朝貢 금지는 高麗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의 일방적인 강행은 고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遼東 폐쇄의 통고가 다시 내려오자 조야에는 李仁任의 허약한 외교정책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가게 되었다. 때 마침 遼東에서 도망하여 돌아온 사람이 都堂에 말하기를, 明帝가 장차 처녀·秀才 宦者 각 일천 명, 牛馬 각 일천 필을 요구할 것이라 하매, ()이 말하기를 사실이 그렇다면 곧 군대를 일으켜 이를 격퇴함이 옳다는 기록이 崔瑩傳註 012

에 보이는데, 이것은 이 때 의 무리한 요구에 대하여 高麗人의 신경이 얼마나 날카로와지고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와같이 ·관계에 다시 풍파가 일어나고 있을 때 안으로는 그동안 專橫과 부정을 일삼던 李仁任 일파를 14년 정월에 崔瑩李成桂의 협력을 얻어 숙청하고 대신 정권을 잡았으며, 밖으로는 136월에 納哈出을 평정하고, 遼東 경영에 큰 진전을 보이게 되자, 高麗에 대한 태도가 더욱 경화되어 가더니, 1312월 하순에는 드디어 高麗에 침략의 마수를 뻗쳐 鐵嶺 以北·以東·以西 땅을 회수한다는 이른바 鐵嶺衞 설치를 들고 나왔고, 이 사실이 高麗에 전달된 것은 14(1388) 2월이었다. 이 요구에 접한 高麗 조야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고, 에 대한 비난의 소리는 더욱 높아갔다. 이에 앞서 高麗西北에 대비하여 武備를 정비하여 오던 터였으므로 禑王·崔瑩을 위시한 많은 군신은 과의 일전을 각오하기에 이르렀다. 의 그칠줄 모르는 야욕과 마수를 눈앞에 보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국가를 유지하는 현명한 길이 못된다는 것이 崔瑩의 신념이었으며, 여기에서 우리는 외래 침입자에 대한 高麗人의 끈질긴 저항의식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崔瑩은 단순한 親元派라기보다는 철저한 애국자였으며, 崔瑩攻遼計劃은 외국 침략자에 대한 高麗의 저항운동이었던 것이다. 攻遼計劃은 처음에 親明을 표방하는 李成桂 일파의 반대가 있기는 하였으나, 崔瑩은 단호하게 이를 물리치고 146월 하순에 드디어 北進을 개시하게 되었다. 攻遼軍崔瑩八道都統使, 曺敏修左道都統使, 李成桂右道都統使로 삼고 평양에 본영을 설치하여 禑王이 직접 출진하는 당당한 군세였다. 總軍勢·右軍을 합하여 38,800여인이었는데 일컬어 10大軍이라 하였다. 遼東征伐李成桂의 배반으로 威化島回軍의 결과를낳아 실패에 돌아가고 말았지만, 高麗의 마지막 北進 운동으로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金成俊

 

 

007

: 勒諭洪武 1012(禑王 3)中書省에 하달된 것이지만 무슨 이유때문인지 1년나마 中書省에 묻혀 있다가 이때 와서 高麗에 전달되었다.

008

: 金銀高麗의 산물이 아니므로 감면해 달라는 주장이 105월에 통과되어 5百斤 9614으로 보내고 나머지 4032129로 절가했으며, 5萬兩 19千兩으로 보내고 나머지 3萬千兩104로 절가하였다.

009

: 高麗史 卷136 列傳 禑王 1212

010

: 池內宏 前掲書 293p. 266

011

: 高麗史 卷136 列傳 禑王 132

012

: 高麗史 卷113 列傳 崔瑩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