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내가 아닌가 (남회근)

2010. 11. 14. 22:44게시판

나는 왜 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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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냐 하면, 아상은 상이 아니며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상을 떠난 것을 부처라 하기 때문입니다.”

“所以者何?  我相卽是非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諸相, 卽名諸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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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구절은 특히 주의를 요합니다! 만약 불학 고시가 있다면 반드시 문제가 출제될 겁니다. “왜 그런가?[所以者何]”소위 아상이라는 것은 본래 상이 아닌 가상(假相) 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상에 따르는 인상, 중생상도 모두 가상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나[我]’는 다음과 같이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분명 내가 있고 신체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신체를 사대(四大)가 가합(假合)한 것이라 말합니다.  즉 이 신체는 뼈니 근육이니 하는 것들이 하나로 합쳐져 구성된 잠시의 ‘나’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난 이튿날에는 전날의 ‘나’는 이미 쇠퇴하며, 한 달이 지나면 태어난 첫날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열 살 때와 열한 살이 되었을 때도 역시 완전히 다릅니다. 총괄적으로 말하면,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우리는 십이 년 후가 되면, 뼈까지도 모두 바뀌어 버립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육체는 ‘내’가 아니라 가아(假我)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잠시 빌려서 사용하는 하나의 도구로서, 우리가 잠시 빌려 쓰고 있는 이 전구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몸은 진짜 ‘내’가 아니며, 비상(非相)이요 가상(假相)입니다. 이 가짜를 진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신체적 ‘내’가 진짜 ‘내’가 아니라면 우리의 의식이나 생각은 어떨까요? 역시 아닙니다. 매 초 매 분 사이에도 생각이나 의식은 모드 변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나이가 많아지면 몇 십 년 전일이나 지금 말하고 있는 것까지도 금방 잊어버리고 맙니다. 따라서 사유나 의식, 생각은 모두 ‘내’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내’가 아닙니다. ‘나’라고 하는 것도 ‘내’가 아닌데, 다시 어디에 ‘너’니 ‘나’니 ‘그’니 하는 것들이 있겠습니까? 그런 것들은 모두 ‘내’가 아니며, 일체의 상은 모두 상이 아닙니다. 일체의 상은 모두 인연에 의해 결합된 것으로 가합(假合)의 허망한 상일 뿐 진실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허망한 것이라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우연하게 잠시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상은 상이 아닙니다.[我相卽是非相]. 확대시키면 인상, 중생상, 수자상 역시 상이 아닙니다.[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是非相].


  이와 함께 『금강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허망한 인생이나 잠시 존재하는 물질세계에 자신의 지혜나 진정한 본성에서 우러나온 정감이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요.


  “진정한 본서에서 우러나온 정[眞性的 情感]”이라는 표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요? 당연히 문제가 있습니다! 진정한 본성이 어떻게 정감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본성이란 정감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소위 정감이란 것은 정감이 아닙니다. 정감이라 이름 붙인 것일 뿐입니다. 정감 역시 허망한 상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부처에게 정감이 없었다면 대비(大悲)의 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겁니다.  대비의 마음은 곧 정감입니다. 그러나 부처의 이 정감은 유치하고 미혹된 것이 아닙니다. 일체의 상은 상이 아니요, 진정한 비심(悲心)은 비심의 흔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행해야 할 바에 따라 행할 따름입니다. 바로 이런 이치입니다.


출처 [금강경강의] 남회근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