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2. 12:40ㆍ 인물열전
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주1)
임진년 상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6월19일.
김면(金沔)이 군사를 거느리고 거창(居昌)으로 돌아가다. 그때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거창에 있었는데, 금산(金山)과 지례(知禮)에 있던 왜적의 기세가 창궐하여 장차 거창으로 마구 들어올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합천(陜川)과 고령(高靈)의 군대에게 영을 내려 우마현(牛馬峴)을 막으러 오게 하였다.
손인갑이 그 영을 듣고 곧 행장을 차리자, 정인홍이 말하기를, “금산의 왜적이 급하기는 하나 무계(茂溪)의 왜적 역시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된다. 지금 만약 군사를 철수하여 그곳으로 옮겨 간다면 고령과 합천은 장차 왜적의 소굴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가서 김공의 거동을 탐지해 보는 것만 못하다. 그가 만약 군사를 끌고 돌아오면 우리는 움직여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때 초유사의 전령을 가진 자가 금산의 진에서 나와 그것을 김면에게 내보이자, 김면이 답서를 쓰기를, “거창 현감(居昌縣監)이 문서로 운운한 것은 손인갑이 여러 사람의 의론을 어기고 복병을 매설했다가 패전하여 왜적이 반드시 충돌해 올 것이므로 사세가 돌아가기 어렵소.” 하니, 손인갑이 대노하여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군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구원해 주지 않고 나한테 허물을 돌리니 이것이 과연 군자의 생각인가. 그가 가지 않는 바에는 나는 불가불 초유사의 명령에 따라야 하겠다.” 하고, 곧 군사를 이끌고 권빈역(勸賓驛)까지 가서 말에 먹이를 먹이는데 그때 김면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곳을 달려 지나므로 손인갑이 더욱 그를 의심하였다. 그때 마침 초유사의 전령이 또 와서 영을 내리기를 오지 말라고 하여, 손인갑은 마침내 돌아와 버리고 정인홍이 혼자서 김성일을 가 만나보고 돌아왔다. 김면은 거창으로 간 후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정인홍ㆍ김면 두 사람의 군사가 두 갈래로 갈라져, 김면은 거창을 진수(鎭守)해서 우마현(牛馬峴)을 방어하고 정인홍은 고령을 진수해서 성주와 무계의 왜적을 방어하였다. 전치원(全致遠)과 이대기(李大期)는 초계(草溪)에 진을 치고 곽재우(郭再祐)는 의령(宜寧)에 진을 쳐 강우(江右) 일대가 그 덕분으로 보전되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임진년 6월 일 만력(萬曆 명(明) 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20년
○ 명(明) 나라 장수 조승훈(祖承訓)ㆍ사유(史儒)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의주(義州)에 당도하다.
○ 경상도 고령(高靈) 선비 박정완(朴廷琬)이 장사 4백여 명을 모집하여 강 기슭에 복병을 설치하고, 사재를 기울여 군량을 구입하여 활과 화살을 준비하여 창녕(昌寧)ㆍ현풍(玄風)ㆍ성주(星州)에 왕래하며 충돌하는 적들을 많이 잡았다. 그리고 또 배를 수선하고 수장(水杖)을 설치하여 강을 타고 내려 오는 적을 막았다. 김면(金沔)이 무계(茂溪)에서 승첩한 것은 실로 박정완의 힘이 컸는데 공을 나누는 데는 참여하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긴다. 《경상 순영록(慶尙巡營錄)》에 나온다.
○ 경상도 초계(草溪)의 전치원(全致遠)ㆍ이대기(李大期)ㆍ전우(全雨) 등이 군사를 모집해 일으켜 정인홍(鄭仁弘)에게 소속되어 무계 및 낙동강에 왕래하는 적을 토벌하는 데 협조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주1)난중잡록[ 亂中雜錄 ]
요약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은송리에 소장된 조선시대 전적.
지정종목 시도유형문화재
지정번호 전북유형문화재 제107호
지정일 1984년 09월 20일
소재지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은송리 204
시대 조선
종류/분류 전적류
1984년 9월 20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조용석이 관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이 쓴 일기 형식의 기록이다. 산서야사(山西野史)라고도 한다.
그가 13세 때인 선조(宣祖) 15년(1582)부터 인조(仁祖) 16년(1638)까지 57년간의 국내 정세를 기록한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대목은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다루어진 자료가 많다. 그것은 난중일기가 이순신 직속부대의 실제 전황을 기록한 것인 데 반해, 난중잡록은 당시 임진·정유 양란의 전반적인 상황과 국내외 정세를 사실 그대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는 난중일기보다 훨씬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작품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임진왜란·정유왜란 관련 기사와 그밖의 선조연대 기사는 중요한 자료로 인증받아 후일 선조실록을 엮을 때 조정에서 원본을 빌려가기도 하였다. 이때 규장각(奎章閣)에서 만든 사본(寫本)의 전문(全文)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또 그는 이곳에서 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 등 중요 전란과 그밖의 역사적 사건들, 당시의 풍속과 민정, 조정에서 일어난 사실 등을 낱낱이 적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대동야승(大東野乘)》에 보면, 난중잡록은 59종목의 각종 중요한 작품을 한데 엮은 것으로서 1,232면을 차지하는 대작이라 하였다. 이렇게 방대한 작품인지라 전질 10권을 둘로 나누어 후반 5권을 편의상 《속잡록(續雜錄)》이라 구분하고 있다.
현재 조경남의 후손이 자필 원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데, 문체가 수려하고 간결하여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밖에 조경남의 작품으로 《윤리변(倫理辨)》5권, 《성리석(性理釋)》5권,《오상론(五常論)》1권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난중잡록 [亂中雜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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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암집(주1) 제2권
봉사(封事)
의병장을 사직하는 봉사 계사년(1593, 선조26) 9월 20일〔辭義將封事 癸巳九月二十日〕
엎드려 생각건대,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황제의 위엄이 멀리 떨쳐져 흉적은 날카로운 기세가 꺾이고 삼경(三京)은 모두 수복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장차 깨끗해질 것이기에 어가는 끌채를 잡고 개성으로 돌아왔습니다. 만약 전하의 사대(事大)하는 정성이 천지에 이르지 않고, 귀신을 감동시킨 정성이 황제의 마음을 깊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와 같이 되었겠습니까. 왜적의 변란이 처음에는 비록 참혹하였지만, 수복한 공은 결국 귀신이 한 일과 같아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안팎의 사람들이 함께 기뻐합니다. 신처럼 보잘것없는 사람도 먼 남쪽 변방에 있으면서 구구한 목숨을 다행히 병란을 겪은 뒤에도 온전히 하였습니다. 멀리 대궐을 바라보며 전하를 생각하니, 감격하여 눈물이 절로 흘러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난해 신은 임금의 은혜를 잘못 입어 죄와 허물 속에서 발탁되어 3품의 관직에 제수되었습니다. 인하여 의병장의 직책을 더하여 왜적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리하여 간곡한 교지가 다시 내려오는 데 이르렀습니다. 신이 명을 받은 이래로 자신을 반성하고 두려워하면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신은 일찍이 사헌부에 임명되었으나 강직하고 옹졸하여 거스르는 것이 많아 불측(不測)한 죄에 거의 빠질 뻔한 적도 있습니다. 다행히 성명께서 밝게 통촉하고 너그러이 용서해 주셔서 남들과 함께 살게 되었으니, 받은 은혜가 뼈에 사무쳐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불행히도 흉악한 왜적이 갑작스레 쳐들어와 그 기세가 하늘을 덮었습니다. 장수와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적이 토벌할 만한 존재임을 다시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열흘도 채 되지 않아 왜적이 조령(鳥嶺)을 넘자, 통곡하며 대궐을 바라보았지만 재난에 달려갈 수 없었습니다. 신은 달려갈 수가 없게 되자, 말단의 계책을 내어 고을의 자제와 유학(幼學) 모모 등 5, 6인 및 이웃 고을의 동지인 별제(別提)(주2) 전치원(全致遠) 등 2, 3명과 함께 향병 수천 명을 모았습니다. 험한 곳을 의지하여 웅거해 지키며 적의 기세를 저지하여 성은에 대해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기를 바랐습니다. 이 하찮은 봉의(蜂蟻)의 천성은 한 때의 분노에서 격발되어 스스로 헤아리지 못한 것일 뿐, 애초 군대의 일을 배우고 궁마(弓馬)를 익혀서 진실로 적을 꺾고 사직을 보호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의병을 일으킨 뒤에 가끔 싸워 이긴 공이 있게 되었습니다. 무계(茂溪)의 적을 소탕한 것과 낙동강의 왜적을 섬멸한 것과 안언(安彦)ㆍ단계(丹溪)의 승리와 같은 것들은 모두 장수와 병사가 힘껏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 공이지, 신이 어찌 관여한 것이 있겠습니까.
의병을 거느리고 한 해를 넘겼지만 이미 한 지역도 평정할 수 없었고, 또 서쪽에서 어가를 맞이할 수도 없었으니 조그마한 공으로 성상의 은혜에 우러러 보답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는 병사의 세력이 고립되고 허약하여 적을 제압하기 부족할 뿐만 아니라, 실로 신의 재주와 지혜가 짧고 얕아서 또한 적을 제압하여 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차지할 자리가 아닌 자리에 있으면서 오래도록 조정의 명을 욕되게 하였으니, 죄가 더욱 무겁게 되어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또 의병을 일으킨 초기에 군사를 먹일 길이 없어 혹 고을의 곡식을 내어주길 권유하기도 하고, 부잣집을 찾아가 취하기도 하면서 근근히 식량을 조달한 것이 이미 한 해가 지났습니다. 지금 병사들은 곤궁하고 무기는 모자라며 군수품은 고갈된 상황입니다. 식량이 다하고 병사들이 흩어지면 다시는 수습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처음은 있으나 끝이 없어서 적을 토벌하는 장사(將士)의 반열에 함부로 처하게 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 줄 신은 스스로 압니다. 더구나 지금은 왜적의 형세가 이미 퇴각하여 해안 지방에 머물러 있는 때인 데 있어서이겠습니까.
대소의 장교들은 모두 당령(當領)ㆍ응령(應領)의 군정(軍丁)인데, 신이 처음 의병을 모집할 적에는 별도로 한 군대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모두 관군이 무너져 흩어지고 도망가 숨어서 통솔자에게 귀의할 곳이 없었던 자들입니다. 수군ㆍ육군의 여러 잡색 군정(雜色軍丁)도 모두 그 인원수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명나라 군대의 예졸(隸卒)이 그 숫자가 1천 명에 가깝고, 수군도 또한 그들이 방어할 곳으로 모두 달려갔습니다. 그렇다면 육군도 병마절도사에게 귀속되어야 하는데, 잡색군은 제위(諸衛)에 나뉘어 소속되어 주장(主將)의 절제를 받습니다. 이와 같다면 의병은 다시 관군으로 지정되니, 신의 수하에는 다시 병사가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미 먹을 양식도 없고 군졸도 없으니, 신은 밀가루도 없이 수제비를 만드는 일을 할 수 없으며, 왜적을 토벌하는 책무를 다시 맡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단지 의병장이라는 칭호와 승진하여 제수 받은 직책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신이 너무나도 황송하여 하루라도 마음을 편안히 할 수 없는 점입니다.
당초 의병을 일으킨 것은 그 정황이 앞에서 아뢴 것과 같지만, 지금은 중앙과 지방의 모든 관원이 적이 공격할 수 없음을 자못 알고 각각 그 직책을 맡아서 성공하기를 기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노쇠한 제가 어찌 다시 씩씩하고 용맹한 장부들 사이에서 용렬하게 조그마한 공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원컨대, 전하께서는 의병장의 임무를 파직하기를 명하시고, 제용감 정(濟用監正)의 직책도 다시 거두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일을 하였으나 공이 없는 벌을 밝히시고, 한편으로는 공도 없이 상만 요행히 바라는 길을 막으신다면, 신은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이 명을 받은 초기에 감당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았지만, 단지 위난한 때임을 생각하여 의리상 사양하여 회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가가 서쪽으로 행차하여 남쪽 지방과 멀리 떨어져 있어 변변치 못한 저의 심정을 한번 진달하기 어려워 오늘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런즉 신이 직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 오래되어 밝게 드러났습니다.
엎드려 원컨대, 전하께서는 그 사정을 깊이 헤아려서 벼슬을 잘못 내린 실수를 바로잡으십시오. 신은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미관말직도 맡기에 부족하지만, 병무(兵務)를 벗고 나면 또한 천 리 길을 부축 받고 가더라도 다시 도성으로 들어가 전하를 가까이 할 것이니, 그러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분수 밖의 의병을 일으킨 일은 죄는 있고 공은 없으니, 하늘의 꾸짖음이 끝내 이르러 하나 뿐인 아들이 죽었습니다. 전쟁 중에 이런 상사(喪事)를 당하니, 심신(心神)이 이미 상한 데다 밖에서 감염되는 질환이 기승을 부려 가슴이 아픈 질병까지 쌓여서 죽을 날만을 앉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잠시라도 죽지 않고 다시 예전의 세상을 보게 되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듯합니다. 마음은 대궐로 달려가지만 몸은 나아갈 수 없으니, 신의 죄는 여기에 이르러 더욱 커서 엎드려 주벌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나 신이 삼가 스스로 생각건대, 몸은 비록 나아갈 수 없지만 은혜를 받은 것이 깊고 중하여 공으로 보답할 길이 없고, 노쇠하고 병든 것이 이미 지극하여 살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으니, 어찌 차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말하지 않는다면 평소 충성을 바치려던 마음을 스스로 저버리게 되어 지하에서도 한을 품게 될 것입니다. 설사 말이 어긋나고 망령되어 끝내 엎드려 형벌을 받게 되더라도 또한 다행이겠습니다.
청컨대 한두 가지를 대략 진달하니 전하께서 굽어 살피십시오. 신은 생각건대, 전하께서 새로 개경에 돌아왔지만 종묘사직이 황량하여 성상의 마음을 깊이 병들게 하였을 것입니다. 스스로 살펴 생각건대, 이는 바로 쓰러진 나무나 말라버린 움과 같아서 다시 천명을 맞이해야 할 때입니다. 신은 실로 지금 이 외적의 변란이 무슨 이유로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성상께 무슨 과실이 있으며, 조정의 정사에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성상께 이미 과실이 없고 조정의 정사에도 또한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나 외적의 변란은 우리나라가 생긴 이래로 일찍이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신도 의혹이 없을 수가 없지만, 적합한 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 성상의 과실은 신이 알 수가 없고, 조정의 잘못은 신이 또한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보고 기억한 것에 의하여 그 외형을 점쳐서 그 그림자를 살핀다면, 어찌 이러한 데 이른 까닭이 없겠습니까. 지금의 형세는 사람의 병이 무거워 겨우 숨만 붙어 있어 부지런히 노력하여 구제할 방법을 구하는 것과 같으니 마땅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일에 이른 연유를 깊이 구하고, 전날에 한 일을 한번 반성한 뒤에야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들으니 선유 진덕수(眞德秀)가 말하기를 “안에 의관(衣冠)을 갖춘 도둑이 있은 뒤에 밖으로 간과(干戈)를 든 도적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명의 조정은 여러 신하들이 위의(威儀)와 절도(節度)가 있어 의관을 갖춘 도둑은 염려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안의 모든 관리로부터 밖의 사방 백성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명맥을 손상시켜 국가의 근본을 해치고 원기를 무너뜨려 인심을 잃게 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어찌 외적의 침입을 불러오기에 충분치 않겠습니까. 신은 들으니 선유 주희가 말하기를 “공사(公私)로 피차를 나누기를 마치 두 나라처럼 하여 안에는 사심을 품고 사악한 짓을 하는 도적이 있고, 밖에는 인접한 적국의 우려가 있어 양자가 협공해 가만두지 않으면 국가가 위험해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에서 일어나 정사를 해롭게 하고, 조처의 마땅함을 잃어 인심을 만족시키지 않는 자는 모두 사심을 품고 사악한 짓을 하는 도적입니다.
세상의 임금된 사람이 생각과 정치 및 교화를 펼칠 적에 사사롭고 속 좁은 실수가 있음을 면하지 못하면, 그 기미와 성색(聲色)이 궁궐 안에서 벗어나지 않아도 천 리 밖에서 도적을 부르기에 충분합니다. 사심을 품고 사악한 짓을 하는 도적이 혹 안에서 일어나면 인접한 적국의 도적이 밖에서 침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또한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는 진실로 전하께서 돌이켜 구하고 순시하고 살펴야 할 곳입니다. 벼슬아치들 사이에 도적을 불러들이기에 충분한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데에 이르면, 군사를 일으켜 난리를 초래하는 것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편당(偏黨)을 좋아하고 정직함을 미워하며, 고결한 절조를 천하게 여기고 권세와 이익을 추구하며, 명분과 의리를 가볍게 여기고 작록을 중시하며,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이롭게 하고 어떻게 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까 하며, 시정배를 사랑하면서도 임금을 사랑할 줄 모르며, 요직에 있는 권세자를 두려워하면서도 전형(典刑)을 다시 두려워하지 않으며, 진실하고 정성스러워 부화함이 없는 자는 재주가 없다 하며, 아랫사람에게서 덜어 윗사람에게 보태는 자를 능히 일을 잘한다 하며, 재물을 아끼는 자는 지목하여 우활하다 하며, 나라를 근심하는 자는 지척하여 미쳤다고 합니다. 이런 습속에 물든 것이 이미 오래되어 스스로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도적을 불러오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정부에 있는 자는 그 몸을 멈추는 데는 장점이 있지만 나라를 도모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곧은 사람을 등용하고 부정한 사람을 내칠 적에 오직 명성과 권세를 거역하거나 순종하는 것만 보고 사람의 기량이 마땅한지 아니한지는 따지지도 않으며, 단지 자기 한 사람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따르면서 공론이 있는 바는 돌아보지 않으며, 문신은 부화함을 숭상하고 실용적인 것을 멸시하며, 무신은 통솔력만을 취하고 담력과 용맹을 버립니다. 대간(臺諫)이 되면 사사로운 감정을 급선무로 하고 공의는 마음에 두지 않으며, 장수가 되면 벌주고 죽이는 것에는 용맹하고 적개심을 품는 데에는 겁을 먹습니다. 수령이 되면 오직 사신의 비위만 맞추고 백성의 일은 도외시하며, 창고는 개인의 저장고로 여겨 전지(田地)를 마련하고 노비를 사면서 꺼리는 바가 없으며, 백성의 굶주림은 구휼하지 않고 사사로운 사람을 기르면서 누가 감히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합니다. 사명을 받든 관원은 먹고 마시는 비용이 날로 심해져 먹고 마시는 것이 물 흐르듯 하는데도 절약할 줄 모르며, 변방의 장수는 탐하는 것이 점점 심하여 군졸을 괴롭히며 어육처럼 봅니다.
무릇 이런 부류는 전하의 재앙을 불러오는 사람이 아닌 자가 없는데, 나라 안에서 충돌하고 마음속에서 흔단을 일으켜 나날이 반복하니, 마치 큰 나무의 뿌리를 벌레가 갉아먹어 쓰러지기 직전에 이르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식자들은 한심해 하지 않음이 없는데 전하께서만 알지 못하실 뿐입니다.
아! 왜적은 변방의 성에 웅거하고 있어 간사한 계책은 헤아리기 어렵고, 명나라 병사는 군영에 머물고 있어 군수품 공급하기가 어렵습니다.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 밤낮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하루도 쉴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근본을 돌이키지 않아 구습이 고질화되어 괴란(乖亂)이 더욱 심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아프게 하고 기운을 분노케 하여 쉴 바를 알지 못하게 합니다.
선현 맹자가 이른바 “지금의 풍속을 변화시킴이 없다면 하루도 편하게 지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 것과 불행하게도 가깝습니다. 이 때문에 왜적이 승승장구하자 한결같이 무인지경으로 변해 삼경(三京)을 함락함이 마치 창을 돌려 아군을 공격하는 형세를 탄 것과 같았습니다. 영남은 모두 60주현(州縣)이나 되는데 안진경(顔眞卿) 같은 이가 한 사람도 없으며, 360성지(城池)를 통틀어 안시성(安市城) 성주 같은 이가 한 사람도 없으며, 모든 조정의 재상과 장수 중에 또한 을지문덕(乙支文德) 같은 이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 하늘은 과연 사직을 위하여 이성(李晟) 같은 자 한 사람을 내지 않습니까. 이 어찌 인물이 나지 않아 고구려ㆍ백제 때보다 도리어 부끄러움이 있단 말입니까. 이미 이성 같은 자는 한 명도 없는데, 나라 안에 빙 둘러 서 있는 자들은 자기 나라를 스스로 공격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나라 안이 실로 붕괴되었습니다. 그러니 왜적이 스스로 닥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불러 온 것이며,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막강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막지 못한 것이며,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의롭고 지혜로워 용병을 잘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협공을 한 것입니다.
엎드려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 당연한 이치가 반드시 이르게 된 형세를 살펴서 기강을 진작시키고 정사를 고쳐 새롭게 하여, 속이고 배반하며 외적을 불러들인 무리들을 바람에 휩쓸리듯 숨을 죽이게 하여 감히 그 가슴속에 있는 생각을 실행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만약 하늘의 해가 청명하여 음산한 기운이 절로 사라지면 민심의 귀의함이 절로 새로워지고, 천명의 돌아봄이 또한 새로워질 것입니다. 우리 백성 중 왜적의 포로가 된 자들 또한 풍문을 듣고 귀부(歸附)하여 기꺼이 고국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왜적의 세력은 반드시 외롭지 않음이 없고, 왜적의 마음은 반드시 두렵지 않음이 없어서 흉악한 계책 또한 반드시 줄어들어 위축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을 물리치려는 자가 먼저 내정을 닦고, 대란을 평정하려는 자가 먼저 인심을 수습하는 것은 대개 이 때문입니다.
엎드려 원컨대, 전하께서는 오활한 유생의 말이 현실 사정과 멀다고 여겨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또한 한두 가지 가장 급선무로 오늘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청컨대, 그 말을 마저 하고자 하니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들어주십시오.
정예 군사를 뽑아 명나라 진영에 예속시켜 훗날 모욕을 막을 쓰임으로 삼으니, 이는 큰 계책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저축이 이미 고갈되어 관가에서 식량을 지급할 수 없어서 인보(人保)와 삼정(三丁)으로 하여금 그들을 공양하게 하였는데, 1백 명의 농부가 한 명의 전사를 공양할 수 없었습니다. 하물며 삼정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형세상 오랫동안 지속할 수 없자 서로 잇달아 도망쳐 며칠 안에 모두 돌아갔습니다. 인보와 삼정이 다 없어졌으니 예졸(隸卒)이 스스로 붕궤되어 와해될 형세가 바야흐로 눈앞에 닥쳤습니다. 대개 예졸의 수가 너무 많아 인보와 삼정을 세 배로 하다 보니 빈한한 자와 노약자도 모두 인보와 삼정을 면할 수 없습니다.
전쟁을 치르는 2년 동안 농부는 수확을 하지 못하여 공사(公私)의 물력이 전에 비해 십분의 일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졸을 공양하는 식량은 형세상 진실로 지급할 수 없고, 이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흩어지면 다시 모으기도 힘듭니다. 이는 거북 등에서 털을 구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어서 위엄 있는 호령이 시행되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조정에서 어떻게 그 뒤처리를 잘 할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명나라 군대가 주둔하여 왜적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는 것은, 고양이가 쥐구멍 앞에 있어 모든 쥐가 자취를 숨긴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군은 군율이 약하여 달아나는 자가 더욱 많아져서 궤멸되기 쉽습니다.
엎드려 원컨대, 전하께서는 급히 명나라 장수와 의논하여 다시 정예롭고 용맹한 병사 천백 명을 뽑아 한 군대를 만들어 명나라 장수의 조련을 받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해산해 돌아가서 오로지 물자를 수송하는 것만을 일삼아 명나라 군대에 공급하고, 농사짓는 데 힘을 다하여 군 물자를 공급하게 하십시오. 또 명나라 장수가 금성(金城)과 위빈(渭濱)의 옛일을 강구하여 오래도록 지탱하는 형세를 보여주게 된다면, 흉적은 계책이 궁해서 반드시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가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국가에 있어서도 매우 다행이고, 백성에 있어서도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수군(水軍)에 소속된 관속들이 백성을 병들게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한 명이 도망가면 그 피해가 친족과 이웃에 미치는데, 평상시에는 그래도 혹 괜찮습니다. 그러나 전쟁으로 폐허가 된 뒤에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이 군량을 수송하는 것은 정역(丁役)의 백배나 되니, 다 죽어가는 빈한한 백성들도 이미 모두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탐욕스럽고 잔악한 수령과 착취하는 진영장(鎭營將)과 약탈하는 아전들은 욕심을 채우려 그 대단한 위세를 자행하여 친족과 이웃이 지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오히려 이러한데 평상시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내리신 교지에 내지(內地)에 있는 수군을 남김없이 징발하고, 노인과 어린이에게는 가포(價布)를 징수하고, 도망간 자는 그 친족과 이웃에게 독촉해 징수하라 하였습니다. 수령은 위엄있는 명령에 겁을 먹고 죄수들은 옥에 가득하며 유랑민은 길에 가득합니다. 겨우 보존된 마을도 집집마다 텅 비었습니다. 그런데 분탕질하는 것으로 낙토(樂土)를 삼고, 유랑민을 보고서도 근심하지 않습니다. 백성의 원망과 고통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아! 적이 무너져 흩어졌다 듣고서도 전투에 달려가려 하지 않은 것은 애초 군사가 적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친족과 이웃을 독책(督責)하여도 기강이 서지 않으니, 이점이 더욱 신이 알 수 없는 바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수군은 군량이 적어 군졸이 하루에 몇 홉씩만 먹는데, 굶주려 병이 생긴 자는 혹 외딴섬에 버리거나 바닷속에 던져 버려 변경을 지키러 간 군사가 백 명 중에 한 명도 돌아오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수군 보기를 반드시 죽을 곳으로 가는 사람처럼 여겨 죽을 작정으로 도피하여 고향집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친족과 이웃을 독책하는 것으로써 목매어 죽게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무덤에 묻히면서도 하소연할 데가 없으니, 이를 길이하여 그만두지 않는다면 남는 백성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또 일찍이 듣건대, 옛날 밝은 왕은 폐석(肺石)을 설치하고 비방목(誹謗木)을 세워 백성의 사정을 진달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부민고소(部民告訴)의 법이 준엄하여 수령의 위엄은 용이 물건을 낚아채듯 더욱 심해서 냇물을 막는 것처럼 백성의 입을 틀어막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임금에게 스스로 곧게 말할 수 있으나 수령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조종조의 외진(外陣)의 명령을 폐하자, 변방 장수가 이리처럼 제멋대로 하는 것이 더욱 심하여 위엄과 형벌을 오로지 일삼으며 군졸을 위협하고 억누릅니다. 마을에 스스로 목매어 죽는 군졸이 많은데, 대궐문에 스스로 진달할 길이 없으니 군민(軍民)의 원망과 고통이 물처럼 깊고 불처럼 뜨겁습니다.
아! 조정에서는 이 무뢰한 무리들이 솔개가 날개를 펴듯 자행하여 인심을 잃었으며, 하루아침에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마치 흙더미가 무너지고 봇물이 터지는 것처럼 버리고 도망친 사실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다투어 죽이는 것을 면할 수 있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나라를 위태하고 어지럽게 한 화를 임금에게 전가시켰으니, 생각이 이에 이르면 어찌 능히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원컨대, 전하께서는 일족(一族)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금하는 명령을 거듭 엄하게 내리고, 수령과 변방의 장수 중에 이를 범한 자는 바로 중한 형벌을 시행하여 깊은 고질의 병폐를 한 번 혁신시키십시오. 그리고 부민고소의 법을 느슨하게 하고, 군졸을 외진(外陣)하는 명령을 회복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사정을 상달할 수 있게 하여 선왕이 폐석을 설치하고 비방목을 세운 유의를 보전하십시오. 만약 고소하는 백성과 외진한 군졸을 문득 끝까지 힐책하는 일이 있을 경우, 과연 그것이 거짓 고소한 것이라면 참으로 그 죄를 받아야 하겠지만, 만약 그것이 무고가 아니라면 탐악하고 포학하게 불법을 자행한 자에게도 절로 일정한 형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궁핍한 백성 중에 달려와 하소연하는 자가 있게 되어 원망과 분노가 조금 해소될 것이니, 백성에게도 매우 다행이고 국가에도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엎드려 듣건대, 조정에서는 작년 5월 이후 여러 잡색군의 부방가포(赴防價布)를 추징하였다고 합니다. 벼를 찧어 군졸에게 공급하는 것은 군수품이 모자라고 적어 마련할 길이 없어서이니, 신은 이 일이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임을 진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군수 물자는 진실로 공급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고, 인심은 더욱 수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금 온전한 고을의 군졸을 작년 5월부터 불러 모아 종군하게 했는데, 한 해가 지나도록 변방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십 번의 전투를 치렀으니, 평소 수자리하는 노고에 비교하면 백 배나 될 뿐만 아닙니다. 또 그로 인해 그 역가(役價)를 추징하라는 공문이 한번 행해지니, 울부짖는 원성이 길에 가득합니다. 그 중에는 또 목숨을 버리고 힘써 싸웠거나 죽은 자 중에 공이 많은 자가 있는데, 포상의 은전은 더해지지 않고 도리어 군포 징수를 급하게 하니, 마음이 떠나고 신체가 풀려서 적과 싸울 의사가 시들하게 없어져 버렸습니다.
아! 곡식은 비록 부족하더라도 마련할 수 있지만, 인심은 한 번 흩어지면 다시 모으기 어려우니, 수백 필의 베를 버려서라도 겨우 남아있는 민심을 수습하십시오. 그 경중과 잘잘못은 비교하지 않아도 자명합니다. 엎드려 원컨대, 전하께서는 빨리 군포를 징수하라는 명령을 그만두고, 인하여 공이 있는 사람을 포상하여 장수와 병사의 마음을 격려한다면, 군민(軍民)에게 매우 다행이고 국가에도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엎드려 듣건대, 고양이는 쥐를 잡게 할 수 있고, 준마는 수레를 끌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모든 사물의 쓰임은 각각 적당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용맹한 자는 장수로 삼고, 자상한 자는 수령으로 삼는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결같이 군공(軍功)이 있는 자를 수령으로 삼으니, 이는 고양이로 수레를 끌고 준마로 쥐를 잡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신은 진실로 병란이 그치지 않아 무사를 우대해 양성한 것은 실로 한 때의 임시적 조치에서 나온 것임을 압니다. 그러나 무사는 나라를 지키는 자이니 진실로 우대해 양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어루만져 기르는 것을 더욱 급히 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해로운 것을 없애고 쇠잔해진 백성을 소생시키는 일은 무사가 능한 바가 아닌 듯합니다. 더구나 군공을 믿고 교만하고 건방져 백성 보기를 마치 초개 같이 하는 자가 즐비한 데 있어서이겠습니까. 백성들로 하여금 감히 말하고 감히 노하지 못하게 해서 사방으로 흩어져 가게 하였으니, 이 또한 오늘의 급한 병통입니다. 엎드려 원컨대, 전하께서는 무사 중에 군공이 있는 자는 그 크고 작음에 따라 경직(京職)을 제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왜적을 토벌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자상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자를 택하여 수령으로 삼아 목민(牧民)의 임무를 맡긴다면, 백성에 있어 매우 다행이고 국가에 있어도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일은 눈앞의 가장 시급한 병통으로, 이를 제거하기를 마땅히 불 속의 사람을 구하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듯 하여 조금이라도 늦출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왜적이 머물며 진치고서 바다를 건너가려 하지 않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만약 소장(蕭墻)에서 일어난 재앙을 없애지 아니하면, 쓸데없이 여러 날을 보내며 서로 버티면서 그 기회를 엿보아 의지할 데 없는 백성을 투입하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저들이 우리의 사정을 아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합니다. 백성의 원망과 고통이 점점 이런 극한에 이른다면, 저들이 우리를 도모함이 더욱 꺼릴 바 없어 아침저녁으로 목을 빼고 기다리다 명나라 군대가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을 틈탈 것이니, 그러면 어찌하겠습니까. 또 저들의 흉악한 계책은 중국을 침범하고자 하여 우리나라를 경유하는 것입니다. 왜군은 진격을 멈추지 않고 곧바로 평양성에 도달해서 한 번 싸우다가 불리했지만 크게 패전하지는 않았습니다. 병사를 거두어 물러나서 돌아와 병사를 주둔시켜 진을 치고 있으니, 그 계책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명나라 군대가 새로 이르자 예봉(銳鋒)을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미 피로한 군사로써 새로 이른 군대를 감당하니, 결코 완전한 형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을 알고 스스로 퇴각하여 지리적으로 유리한 곳에 주둔해 웅거하고, 병사를 나누어 교대로 쉬게 하면서 우리 명나라 군사를 피로하게 하고 있습니다. 명나라 군사가 만 리 길을 와서 먼 나라에 머물며 지키는 형세를 반드시 헤아리고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가 파괴되었고 쌓아 두었던 군수물자가 이미 다했으며, 농민은 생업을 잃어 군수품 공급이 이어지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령 명나라로 하여금 군수물자를 멀리 실어오게 한다면 그 형세는 또한 오래 유지하기 어렵고, 하루아침에 군량이 다하여 명나라 군대가 퇴각할 때 왜적이 뒤를 쫓아 거침없이 몰아친다면, 열흘도 되지 않아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면 요양과 심양은 시기가 다르지만 곧 전날의 부산과 동래처럼 함락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흉악하고 교활한 저들이 어찌 기꺼이 큰 바다의 바람과 파도를 넘어와 먼 나라 일대의 변방 성을 지키며, 명나라 군대와 서로 버티면서 돌아가려 하지 않겠습니까.
대개 저들의 속셈은 육전(陸戰)에 장점이 있고 수전(水戰)에 단점이 있어, 병사를 거두어 바다로 내려가면 바닷가의 관방(關防)은 반드시 명나라 군사에 의해 점거당하여 훗날 다시 침범해도 용이하게 거침없이 진격할 것을 보장할 수 없으므로, 죽음으로써 웅거해 지키며 훗날 다시 거병할 편리함으로 삼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군수물자가 넉넉하지 않아 장차 명나라 군대를 오랫동안 머무르게 할 수 없고, 내치가 제대로 거행되지 않아 또 흉악한 왜적의 마음을 두렵게 할 수 없으며, 병사의 힘은 이미 고갈되어 다시는 충돌을 막을 희망도 있지 않습니다.
엎드려 원컨대, 전하께서는 성스러운 생각을 깊이 유념하여 벼슬아치를 감독하고 바로잡으며, 인심을 수습하여 회복의 기반으로 삼으십시오. 아! 명나라 군대를 보루로 삼는 것은 잠시 평안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병화(兵火)가 미친 곳은 사람과 생물이 모두 괴멸되어 천 리에 쑥대만 무성하여 밥 짓는 연기가 전혀 없고, 사람들은 서로 잡아먹는 지경입니다. 얼어 죽은 시체는 그 살을 보존하지 못하니, 백성들의 명맥은 의지할 데가 없게 되었습니다. 만약 하늘이 재앙을 내려 흉악한 왜적이 자멸하더라도, 노인과 어린아이는 골짜기에서 모두 죽고, 강하고 굳센 자들은 황지(潢池)에서 병기를 희롱할 것이며, 명나라 군사 또한 영구히 머물면서 지키는 것을 보장할 수 없으니, 조정에서는 무슨 방책이 있어 이를 구제할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명나라 군대가 영구히 진을 치고 지켜 다른 근심이 없음을 보장한다면 진실로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동방의 천승지국이 남의 눈치만 살피며 구차하게 시일만 보내면서 아침저녁의 형세에 의지하여 국가를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신은 비록 보잘것없지만 삼가 전하를 위하여 이점을 걱정합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믿는 바의 것이 남에게 있지 않고 믿는 것이 나에게 있는 것으로, 내가 진실로 믿는 것이 있다면 일성(一成)의 땅도 오히려 작지 않으니, 하물며 천 리의 강토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또한 일려(一旅)의 군대도 오히려 적지 않으니, 하물며 수만의 정예병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엎드려 원컨대, 전하께서는 나에게 있는 믿을 만한 것을 급하게 하여 나라를 위한 영구한 계책을 강구하고, 명나라 군대가 반드시 오래 머물 것이라고 믿지 않으시면, 이는 실로 우리나라의 무궁한 아름다움이 될 것입니다. 무릇 나라를 위한 영구한 계책은 생각건대 전하께서 대신에게 자문하여도 이미 남은 계책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위급함을 구제하는 일에 신이 감히 우매한 견해를 바치고자 합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시세가 한 번 변하면 사무는 한갓 예전의 일상적인 것을 지킬 수 없습니다. 마땅히 대란이 있은 뒤를 틈타 군현(郡縣)을 병합하고, 현(縣)에는 큰 진(鎭)을 설치하여 어진 관리를 뽑아 맡겨서 세금을 가볍게 덜어주는 것으로 남은 백성을 모아야 합니다. 중국은 한 집안의 일처럼 여겨 실정을 숨기는 일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니, 중국 조정에 주달하여 전날의 과실을 토로하십시오. 그리고 은(銀)을 캐는 이익을 널리 열어 백성이 채취하도록 허락하십시오. 의주(義州)에서 바닷가 구석에 이르기까지 길을 따라 시장을 열어 모든 도로에 이르게 하여 물품과 재화를 유통시킨다면, 남은 백성의 다 끊어져 가는 목숨을 살릴 수 있고, 먼 지방까지 짊어지고 가는 비용을 덜 수 있으며, 명나라 군대가 혹 오래 주둔하여도 군수물자가 모자라는 근심이 없게 될 것이며, 빈민은 또한 힘써 옮겨 갈 수 있어 농사짓는 생업에 바탕이 될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만분의 일이라도 구제하여 훗날 믿을 만한 정치를 하고자 바란다면 여기에서 미루어 나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엎드려 원컨대, 전하께서는 미천한 자의 말을 채택해 주십시오. 신이 어찌 망령되고 참람함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꺼릴 바를 알지 못하고 말을 하였으니 화가 반드시 이를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제가 세상사에 분개하여 충성을 바치려는 마음이 가슴속에 답답하여 한 마디 말을 드리고 죽고자 닥치는 대로 말을 하다 보니, 지나치게 과격해서 참람한 주벌에 들어감을 스스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엎드려 원컨대, 전하께서는 가엾게 여기어 제 심정을 살펴주십시오. 신은 매우 감격하고 간절하며 두려운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주D-001]삼경(三京) : 한양, 평양, 개성을 가리킨다.
[주D-002]기뻐하고 : 대본에는 ‘權’으로 되어 있는데, 문맥을 살펴 ‘懽’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주D-003]전치원(全致遠) : 1527~1596. 본관은 완산(完山), 자는 사의(士毅), 호는 탁계(濯溪)이다. 이희안(李希顔)과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배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6세의 나이로 이대기(李大期)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저술로 《탁계집》이 있다.
(주1)내암문집[ 萊庵文集 ]
유형 문헌
시대 조선
성격 시문집
편저자 정인홍
제작시기
1911년(간행), 1984년(영인)
권수·책수
15권 7책
간행·발행·발급자(처) 정인홍의 후손(간행), 아세아문화사(영인)
소장처 규장각 도서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정인홍(鄭仁弘)의 시문집.
[네이버 지식백과] 내암문집 [萊庵文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주2)별제[ 別提 ]
요약
조선시대 장부를 조사한 정 ·종6품 관직.
무록관(無祿官)이나, 360일을 근무하면 다른 관직으로 옮길 수 있었다. 6조 ·교서관 ·전설사(典設司) ·도화서(圖畵署) ·전함사(典艦司) ·전연사(典涓司) ·소격서(昭格署) ·사축서(司畜署)에 각 2명, 상의원 ·군기시 ·내수사(內需司) ·빙고(氷庫)에 각 1명, 예빈시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 ·장원서 ·사포서(司圃署) ·와서(瓦署)에 각 3명, 조지서(造紙署) ·활인서(活人署)에 각 4명, 귀후서(歸厚署)에 6명 등이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별제 [別提]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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