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조선시대 부자(父子) 과거급제자(문과) [전성준(全聖準) ,전명조(全命肇)]

2016. 3. 8. 09:35 인물열전




조선시대 부자(父子) 과거급제자(문과) [전성준(全聖準) ,전명조(全命肇)]


현실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고, 특히 교육 환경이 좋은 가정의 자손들이 아니고는 과거 진출이 사실상 불가능하였다(과거 진출을 위해서는 적어도 15년 내지 20년 간의 수학이 필요하였다.). 때문에 양반들이 거의 독점하는 듯한 경향이 나타난 것도 사실이나 그것이 결코 원칙은 아니었다.

또 실제로, 어느 면으로 보나 양반이라고는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응시하고 합격하였다. 다만, 그런 사람들은 문과급제 후의 임용과 임용 후의 승진에 있어 차별을 받았으며, 그 차별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심해졌다. 후기로 갈수록 좋은 가문의 출신이어야 한다는 요건이 더 커졌던 것이다.

문과급제자는 급제와 동시에 전원 임용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 원칙은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해 거의 예외 없이 잘 지켜졌다.

물론, 급제 직후 장원(壯元)을 제외하고는 권지(權知)로서 성균관·승문원(承文院교서관(校書館) 등에 배치되어 일종의 견습 기간을 보내야 했지만(장원자는 규정에 따라 종6품 내지 정7품의 실직을 주었다.), 어쨌든 임용이 보장되어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과 [文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과거시험에 합격한 부자(父子)가 있었습니다.

전성준(全聖準) 1681[숙종(肅宗) 7](1)

전명조(全命肇) 1740[영조(英祖) 16](2)

입니다.





(1)전성준(全聖準)

[문과] 숙종(肅宗) 7(168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0(30/33)[인물요약]

자 중식(仲式)

생년 정유(丁酉) 1657(효종 8)

합격연령 25

본관 나주(羅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33

전력 유학(幼學)

관직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가족사항]

[]

성명 : 전기정(全氣正)

[가족과거]

성명 : 전성신(全聖臣)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106])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2)전명조(全命肇)

[요약정보]

자 품초(稟初)

생년 1690(숙종 16)

졸년 ?(미상)

시대 조선후기

본관 나주(羅州)

활동분야 문신

부 전성준(全聖準)

[관련정보]

[문과] 영조(英祖) 16(1740) 경신(庚申) 개성별시(開城別試)(3) 갑과(甲科) 1[壯元](1/3)

[생원시] 영조(英祖) 11(1735) 을묘(乙卯) 증광시(增廣試) [생원] 3(三等) 27(57/100)

[상세내용]

전명조(全命肇)에 대하여

1690(숙종 16)~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품초(稟初)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증조부는 전종유(全宗裕)이고, 조부는 전기정(全氣正)이다. 부친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병조좌랑(行兵曹佐郞) 전성준(全聖準)과 모친 이직(李溭)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735(영조 11) 증광시에서 생원 327위로 합격하였고, 1740(영조 16) 개성별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744(영조 20) 민수언(閔洙彦) 등과 함께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이후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1745(영조 21)에는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역적 이유익(李有翼) 및 이인좌(李麟佐) 등의 자식들이 아직 살아있음을 보고하고, 이들에 대한 처단을 청원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國朝文科榜目

司馬榜目

英祖實錄

[집필자]

정병섭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3)별시[ 別試 ]

요약

조선시대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10년에 한 번 당하관을 대상으로 한 중시(重試)가 있을 때 시행한 부정기시(不定期試).

문과 ·무과의 2과만 있으며, 처음에는 일정한 시행규칙이 없었으나, 영조 때 속대전에 이르러 일정한 규정이 생겼다.

별시문과(別試文科)에는 초시(初試) ·전시(殿試) 2단계 시험이 있고, 경향(京鄕)의 유생들을 서울에 모아 고시하였다. 초시에서는 종2품 이상 3명을 상시관(上試官), 3품 이하 4명을 참시관(參試官), 양사(兩司) 1명을 감시관(監試官)으로 하여 300명 또는 600명을 뽑았다. 전시(殿試)에서는 의정(議政) 1명이 명관(命官), 2품 이상 2명이 독권관(讀卷官), 3품 이하 4명이 대독관(對讀官)이 되어 시행하였다. 시취 인원은 일정하지 않아 가장 많을 때가 30, 적을 때는 3명이었다.

별시무과(別試武科)에도 초시 ·전시 2단계의 시험이 있었다. 초시는 처음 서울에서만 보였으나, 후기에는 각 도에서도 치렀다. 2품 이상 문관 1, 무관 2, 당하(堂下)의 문관 1, 무관 2명이 시관(試官)이 되고 양사(兩司) 1명을 감시관으로 시행하였다. 11() 23기를 선정하여 고시하였으며, 비율 ·평균에 의하여 선발하였다. 전시의 시관은 의정 1명을 더하여 초시와 같이 시험을 보였으나, 정원을 두지 않고 입격하는 대로 뽑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별시 [別試] (두산백과)





追伸

전성준(全聖準)3형제[전성준(全聖準) ,전성신(全聖臣),전성택(全聖澤)]가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이어서 아들[전명조(全命肇)]도 과거에 급제하는 영광을 누려서 가문을 빛내었습니다.


출처 : 전씨(全氏) 광장
글쓴이 : 한강의 언덕(전과웅)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