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30. 09:35ㆍ 인물열전
야옹에서 전우익까지, 귀내 반가의 법도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야옹(전응방)은 퇴계(이황)의 권유에 따라 정자를 짓고는 야옹정이라 이름하였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방문한 퇴계는 야옹정에 올라 ‘야옹의 참즐거움’(野翁眞樂)을 찬탄했다.
“청산은 집을 감싸고 물은 섬돌을 돌려 흐르는데/
…부인은 손님 위해 향기로운 술독을 열고/
아희는 때 맞춰 싱싱한 채소를 뜯네/
이제 알겠구나, 야옹의 참된 즐거움을….”
봄날 야옹정 앞뜰엔 봄꽃들이 아름다움을 다투고 새들이 저마다 노래하고 있었다. 어느덧 서산의 해는 떨어지고 동산엔 달이 떠올랐다. 시흥에 젖은 퇴계의 눈에, 달은 술잔에도 어렸고, 연못에도 어렸으며, 속 깊은 벗의 눈동자에서도 반짝였다. 그리하여 뜰에는 장춘오, 연못엔 달을 담아둔다 하여 저월당이란 이름을 퇴계는 주었다.
출세의 길 마다하고, 스스로 밭을 일구면서, 고절한 학문과 품격을 지킨 봉화 귀내마을 야옹의 법도에 대한 칭송은 뒤에도 이어졌다.
대사간을 지낸 학사(김응조)는 100여년 뒤 퇴계의 시에서 운을 따 이렇게 노래했다.
“이끼 낀 뜰 새 울고 풀 우거져/
산골은 여전히 선비의 거처로다…/
시름을 달래려고 빚은 술 거르고/
손님 대접하려고 원두밭 채소 뜯어 삶네….”
부사 이래는
“…어찌하여 숲 속에서 이같이 고요히 살았던고/
작은 물이라고 어찌 바다에 모여들 뜻이 없으랴/
그윽한 난초는 본래 사람이 김매어 가꾸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이라고 부러워했다.
“구성(영주) 동쪽 30리쯤에 구계촌이 있으니,
산은 높지 않게 빙 둘렀고,
물은 깊지 않으나 굽이쳐 흐르는 깊고 외진 골짜기 가운데 일구유장이 있어,
깊숙하게 가리워져 넓은 것이 참으로 은자가 머뭇거릴 곳이다.”
(경담 이수정의 ‘야옹정 중수기’)
귀내마을 야옹정은 주소지만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로 바뀌었을 뿐 퇴계와 경담이 그렸던 것과 다르지 않다. 세월의 갈퀴에 건물은 쇠락하고, 저월당엔 물이 마르고, 장춘오는 비었지만, 뼈대는 그대로다.
단종 손위 때 벼슬을 버린 조부의 유언을 따라 더 깊은 산골로 숨어든 이가 야옹(전응방)이었다. 조부 때부터 교분이 깊었던 퇴계 집안과 교우하며, 스스로 땅을 일궈 의식주를 해결했다. 후손들 역시 500년 가까이 청운의 꿈을 접고, 권문에 이름 파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옛사람이 칭송한 것은 건물의 위엄이나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귀내마을은 크고 작은 산이 마을을 겹겹이 에워싸고, 부쳐 먹을 땅이래야 몇 두락 되지 않는 그야말로 한미한 산촌. 세속의 소란이 스며들기 힘들지만 먹을 것조차 넉넉할 리 없으니, 그곳은 세속을 떠난 이들의 은거지일 뿐 아름다움을 희롱할 곳은 아니다. 옛사람이 칭송한 것은 한마음 오롯이 지키며, 손수 기른 먹거리로 안빈낙도하는 삶이었다.
입향조는 단종 손위 때 벼슬을 버리고 떠난 절의신, 휴계 전희철의 손자 야옹 전응방. 휴계는 단종 유배시 호종관으로 수행한 뒤 고향 충북 옥천으로 귀향했다. 세조의 거듭된 부름에 칭병하며 출사하지 않다가, 더는 찾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부인의 고향인 영주 초곡으로 숨어들었다. 이웃 안동의 노송정(이계양, 퇴계의 조부)이 국망봉에서 단종을 망배하던 것처럼, 그는 칠성산에 단을 짓고 북향 망배 했다. 그런 휴계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말은, 해마다 장릉에 참배할 것과 벼슬에 나서지 말 것이었다.
조부의 유언을 따라 더 깊은 산골로 숨어든 이가 야옹이었다. 약관에 사마시를 통과해 출세를 눈앞에 뒀으나, 그는 영주에서도 하룻길이나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정착했다. 호를 아예 야옹(촌늙은이)이라 하고, 조부 때부터 교분이 깊었던 퇴계 집안과 교우하며, 스스로 땅을 일궈 의식주를 해결했다. 야옹정에 걸린 시판에, 농사꾼의 일상이 빠지지 않는 건 그런 까닭이었다.
진성(이만익)이 지은 야옹 묘갈명 서문은 이렇게 맺는다.
“일찍이 임천에 돌아와 숨어, 정자 이름 야옹으로 게시하니, 속진을 벗어났네. 맑은 품행은 밝은 달을 감추는 듯, 애애한 화기는 봄날을 장식한 듯, 시례를 교훈 삼고, 유분을 계승하여, 근검으로 본을 떠서 후손에게 물려주었네.”
후손들 역시 500년 가까이 청운의 꿈을 접고, 권문에 이름 파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오로지 스스로 지은 거친 음식으로 몸을 부지하며, 수신과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진력했다. 그 좁은 마을에 당과 정과 서재와 서당 등이 즐비했던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야옹은 야옹정 외에 마을 동쪽 수림이 울창한 석문동에 석문정사를 지었고, 현손인 시천은 인근 토일에 격양당을 지어 무욕의 즐거움을 구했다.
“척박한 밭뙈기 두어 이랑 농사지으며, 집은 거처할 만하고, 샘물은 마실 만한즉 그 즐거움이 진실로 합당하다. 배불리 먹고 흙덩이 치는 즐거움을 스스로 얻었으니 어찌 부귀를 원하며 영화스러운 욕심을 바라겠는가.”
격양(擊壤)이라 이름한 까닭이었다.
11세손 구암 수동은 형제들과 마을 뒷동산 마루 안전이 훤한 곳에 구산서당과 주사(기숙사)를 지어 후학을 육성했다. 문화재로 지정된 주사는 집안의 온습도 조절을 위해 지붕을 까치구멍 형태로 지었다.
정묵재는 구암의 동생 수형의 서재이며, 구암의 둘째 병렬은 호를 우직(愚直)이라 하여 오로지 곧고 바름을 추구했으며, 우직정을 지어 신분의 고하를 떠나 모든 이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다.
우직의 넷째 규명은 직산재를 지었으니,
“곧고 바른 성품이 활시위 당기듯 휘어지겠는가, 오직 떳떳하고 바르게 하여 편벽하지 않음”을 추구했다. 이밖에도 일산재 청간대 등이 있어, 귀내마을은 100가구 남짓했으나 반듯하고 우뚝한 것이 청솔 숲 같았다.
나라와 민족의 위난 앞에서는 은일을 떨치고 분연히 일어났으니, 오죽 비타협적이었으면 일제는 귀내(龜川)라는 마을 이름을 구천(九川)으로 바꾸고, 마을의 상징인 거북바위를 폭파해 없앴다. 일제를 극복하기 위한 신학문 수용에도 열심이어서 귀내마을에서만 와세다대, 메이지대 등 일본 유학생이 5명에 이르렀다. 우직의 현손인 언눔(전우익)은 서울상대 전신인 경성상업전문학교에 진학했다.
해외유학파는 해방과 함께 일제 잔재와 봉건 유제의 혁파에 나섰다. 당시 지식인들에겐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기도 했으니, 많은 마을 청년들도 이들을 따라 혁신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민족세력과 친일세력, 좌파와 우파의 대립 속에서 귀내마을은 몸살을 앓았다. 많은 지식인과 젊은이들은 해방공간을 거치면서 죽거나 잡혀가거나 사라졌고, 6·25를 거치면서 마을엔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청상의 여인들만 남았다.
언눔은 당시 ‘민주청년연맹’(민청) 활동으로 말미암아 1년3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잦은 예비검속으로 모두 6년 가까이 구금됐으며, 전두환 정권 때까지 보호관찰 대상자로 주거를 제한당했다.
후손 언눔(전우익)은 단 한 평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당신이 부쳐 먹을 땅만 남긴 채 모두 내줬다. 언눔마저 떠난 지 10년, 마을은 야윈 노인네 졸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500년째 고샅을 지킨 노송들은 우뚝하고, 언눔의 가옥 안팎은 산수유 복자기 등 수십종 나무들의 숲이 싱그럽다.
귀내마을의 그때 상처는 지금도 선명하다. 지난해에야 귀내 반가의 법도를 다시금 곧추세우고자 옥천전씨 구천파 500년 세거비를 건립했는데, 해방공간의 비극이 얼마나 컸으면 취지문에선 ‘인면수심이 야만의 광란으로 추태를 흘리고 간’ 세월이었노라고 기록했다. 야옹정 등 문화재로 지정된 것들마저 쇠락을 면치 못하고 있고, 100년 이상 된 유서 깊은 가옥들은 무너지거나 근본 없는 가옥으로 바뀌었다.
이런 쇠락 속에서도, 권세와 영화를 멀리하고 오로지 바르고 곧음을 지키려는 반가의 법도만은 여전했다. 일제 때까지만 해도 마을 밖 50리 안에서는 전씨의 땅을 밟지 않고는 다닐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가산이 많았다.
특히 대지주 집안이었던 언눔은 단 한 평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당신이 부쳐 먹을 땅만 남긴 채 모두 내줬다. 우직 선생의 뜻을 따라 모든 걸 나누고, ‘간신히 겨우겨우 사는 것’을 잘 사는 삶이라 여겼다. 그래야 ‘돌투성이 산에서 자란 붉대(적송, 춘양목) 줄기처럼 오색으로 빛나고 잎은 늘 푸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에서)
그의 삶에서 필요한 것은 ‘평생 할 공부, 신나게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평생을 함께할 여자’뿐이었다. 이오덕 선생은 그를 ‘돗자리 치는 전형’으로 기억하고, 신경림 시인은 ‘깊은 산속 약초 같은 사람’이라고 그렸다.
언눔마저 떠난 지 10년, 마을은 야윈 노인네 졸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500년째 고샅을 지킨 노송들은 우뚝하고, 언눔의 가옥 안팎은 산수유 복자기 두릅 닥 함박꽃 노각 모과 등 수십종 나무들의 숲이 싱그럽다. 야옹에서 언눔까지 향기로운 반가의 법도는 지금도 은근하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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