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상주 사서 전식 신도비[ 尙州 沙西 全湜 神道碑 ]

2016. 5. 4. 09:03 인물열전

 

상주 사서 전식 신도비[ 尙州 沙西 全湜 神道碑 ]

 

 

 

이칭별칭

지사 사서 신도비명, 知事沙西神道碑銘, 증좌의정 행지중추 충간공 사서 전선생 신도비명, 左議政行知中樞忠簡公沙西全先生神道碑銘

유형 유적

시대 조선/조선후기

성격 신도비

건립시기·연도 1700(숙종 26)

크기(높이, 길이, 둘레, 깊이) 전체 높이 333비신 높이 178, 80, 두께 16

소재지 경상북도 상주시 외답동 산24-1

소유자 전상룡

관리자 전상룡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19

문화재 지정일 20091228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사서(沙西) 전식의 사적을 기리기 위해 1700(숙종 26) 경북 상주에 건립한 신도비.

개설

전식(全湜, 1563~1642)의 본관은 옥천(沃川)으로,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광해군 실정시 벼슬을 단념하고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과 산수를 유람해 세칭 상사삼로(商社三老)’ 또는 상산삼로(商山三老)’라 일컬어졌다. 관직은 대사간·대사헌·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이 신도비는 1700(숙종 26)에 건립되었으며 현재 경상북도 상주시 외답동 산24-1번지(상주 시내에서 낙동 방면 국도 25호선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비문의 찬자(撰者)인 조경(趙絅, 1586~1669)의 문집 용주집(龍洲集)20지사 사서 신도비명(知事沙西神道碑銘)이란 제목으로 신도비문이 실려 있다.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용

전식의 신도비는 비신(碑身이수(螭首귀부(龜趺)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수는 운룡문(雲龍紋)의 새김이 뚜렷하고 귀부도 귀갑문(龜甲紋)을 포함한 전신의 새김이 섬세하게 조식(彫飾)되어있는 반면, 비신 전면과 후면의 하단 일부가 손상되어 떨어져나갔다.

신도비의 전체 높이는 333이며, 비신의 높이는 178, 정면 폭은 80, 두께는 16이다. 비신의 전면 상단에 증좌의정 행지중추 충간공 사서 전선생 신도비명(贈左議政行知中樞忠簡公沙西全先生神道碑銘)”이라고 쓴 전액(篆額)이 새겨져있으며, 비신은 전면과 후면에 걸쳐 작은 글씨의 해서(楷書)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1659(효종 10)에 조경(趙絅)(1)이 지었고, 1700(숙종 26)에 신도비를 건립하면서 이봉징(李鳳徵)(2)이 지은 비문 음기(陰記) 7줄을 후면에 추가로 새겨 넣었다. 글씨와 전액(篆額)은 이진휴(李震休(3))가 썼다.

신도비의 내용은 광해군 즉위년(1608)에 대북(大北)의 영수였던 정인홍(鄭仁弘)에 대한 논박, 1625(인조 3) 후금(後金)이 요동을 함락하고 있을 당시 해로(海路)를 통해 연행(燕行)한 일화를 포함하여 가계, 관력, 임란시의 의병활동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신도비는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서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과 더불어 상산삼로(商山三老)’라 칭송된 사서 전식의 유학자로서의 위상을 살펴볼 수 있는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사서집(沙西集)

용주집(龍洲集)

충간공 전식 연보(도서출판 세종, 2011)

한국고전번역원(ww.itkc.or.kr)

문화재청(www.cha.go.kr)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상주 사서 전식 신도비 [尙州 沙西 全湜 神道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조경[ 趙絅 ]

본관 한양(漢陽). 자 일장(日章). 호 용주(龍洲). 시호 문간(文簡). 1612(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23년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형조좌랑 ·목천현감(木川縣監) 등을 지내고, 162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한 뒤 정언(正言) ·교리(校理) 등을 역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 뒤 이조정랑을 지내고, 1636년 사간(司諫)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斥和)를 주장, 이듬해 집의(執義)로서 일본에 청병(請兵)하여 청군을 격퇴하자고 상소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 뒤 응교(應敎) ·집의 등을 지내고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다녀온 뒤 형조참의 ·전주부윤을 지냈다.

1645년 이조참의가 되고, 대제학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 때 이도(吏道)를 쇄신, 관리 등용의 공정을 기해 명망을 얻었다. 1648년 우참찬(右參贊)이 되고, 1650(효종 1) 청나라 사문사(査問使)가 와서 그를 척화신(斥和臣)이라 하여 의주에 귀양보냈다. 이듬해 풀려나와 1653년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지내고 은퇴, 행부호군(行副護軍)이 되어 165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고, 글씨도 잘 썼다.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 홍해의 곡강서원(曲江書院), 춘천의 문암서원(文巖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용주유고(龍洲遺稿), 저서에 동사록(東槎錄)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경 [趙絅] (두산백과)

 

(2)이봉징[ 李鳳徵 ]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명서(鳴瑞), 호는 은봉(隱峰)이다. 1675(숙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홍문관수찬으로 등용된 후 의정부사인·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691(숙종 17) 개성유수가 되었으며, 1692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1694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이해 갑술옥사로 남인들이 제거될 때 함께 파직되었고, 1698년 형조참판으로 복직하였다.

이후 좌천되어 1701년 오위도총부 부사를 지낼 때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사형에 반대하였는데 이로 인해 전라도의 섬 지도(智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는 조치)되었으며, 1705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봉징 [李鳳徵] (두산백과)

 

(3)이진휴[ 李震休 ]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백기(伯起), 호는 성재(省齋) 또는 성암(省菴)이다. 1657(효종 8) 이영(李泳)의 아들로 태어났다. 1677(숙종 3)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82(숙종 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686(숙종 12) 6품 전적(典籍)의 신분으로 중시문과에 병과로 다시 급제하여 문명을 떨쳤다. 그 후 지평, 정언, 장령, 헌납, 수찬, 부교리, 집의, 필선, 승지 등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1697(숙종 23) 여주목사를 지냈다.

1700(숙종 26) 도승지, 동지의금부사를 거쳐 1701년 충청도 관찰사로 재임 중 송사를 불공정하게 처리하였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일시 파직되었다. 1702년 도승지를 지냈고 1703년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는데 국경을 넘어가는 사람 2명을 죽인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705(숙종 31)에 다시 도승지로 등용되었으며 그 후 동지의금부사, 안동부사,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서예에 능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1710(숙종 36)에 사망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진휴 [李震休] (두산백과)

 

 

神道碑銘 幷序[趙絅]

贈左議政沙西全公旣卒之十七年第二子前四山監役克恬使嗣孫手故同樞黃戶氏之狀自商山北走千餘里乞銘於漢陽趙絅曰吾先人位於朝也獲私於執事久敢藉先人靈徼惠於執事以不朽請絅襒席爲禮以齒近耄矣難強筆硯屢辭不得則讀狀未半掩卷而歎曰余嘗聞南中士友之誦沙西公有高世行者二今見狀良然當光海戊申年間頻頻之黨推鄭仁弘爲奧主勢焰焄灼人莫敢迕其鼻息觸碎犯焦不足言也公能造次奮舌辨揠其誤申梧里相正論陳忠肅之拄章惇不及是矣全遼陷虜朝周之路變而航海受命冠蓋前後葬魚腹者相銜公於是時年過耳順矣無幾微以老爲解取先少壯而行履鯨濤如康莊視死生如往還謝安石之無怖舟楫敖而不足數者由是皇朝史氏書曰朝鮮使臣全湜來朝特筆也此則李潤慶登名嘉隆錄後刱見事也傳稱死而不朽者三公之行奚遽不媿功與言而止哉太史氏將大書特書不一書已也冷淡傖父語何足輕重於公之不朽顧托名顯刻以垂來許則吾庸多矣蓋公立朝五十餘年歷職三十有奇亡論高庳外內率所事所言無非發於積中忠直皆足以爲世則世師士友所稱高世之行特擧其大者耳公未釋褐宣廟朝名相金應南薦公除連原察訪吹喣摩撫敝郵以完臬臣才公之爲委以可興收稅倉實不以倭警而損又令主饋給湖南軍餉餉事擧己亥轉禮賓直長不就癸卯登上第乙巳選入起居注柄相倡尊號議三司從臾之惡公異於己公遂色擧丁未陞典籍戊申薦騎省郞旋佐幕忠淸刷邊民剔僞歸眞甚晢代道臣決滯訟案無留牘己酉拜禮部員外陞正郞時有持公議者欲置公選曹甚力鉥公見用事郞公笑而不答由是事不諧辛亥除蔚山判官風化大行明年以疾不赴金郊出爲全羅都事時光海政亂彝倫垂斁公不樂爲官退藏于鄕與鄭愚伏李蒼石相羊山水間世以爲商社三老己未庚申連遭內外艱易戚俱盡廬墓終制癸亥仁祖大王靖宗祊收召畯良公拜禮曹正郞兼記注官知製敎俄錄弘文拜修撰校理學士任叔英嘗稱經筵官通古今鄭經世達事理全湜久之由典籍拜司憲府掌令擧彈無所避甲子逆适亂作公以太僕正扈駕而南至天安拜執義論延平君李貴視師左律之罪元帥張晩緩期縱賊之律晩幕下武士輩盡讙訟主將無罪發逸口公當臺門叱曰使宗社蒙塵君父播越誰之罪也汝等亦人臣子敢爾皆咋舌而戢三月由禮賓寺正陞通政拜兵曹參議賞羈靮勞也拜代言上賜金公諒折衝資公徼還物論多之乙丑遷左承辭由護軍改刑曹參議以上价朝京師華人見者咸稱公德器登州軍門武之望尤致敬禮焉明年復命又明年丁卯二月奴穿塞綴海西帳殿闢于江都奴使劉海持奴書至要與主上歃血廟議折八和套中公抗疏持摘和事之非切刻改禮曹參議俄拜大諫進六條箚曰納諫諍曰去偏私曰修軍政曰減軍官曰勿恃和議曰勿爲譏察軍官與譏察夫人莫不知病國召亂而畏勳貴無敢發口公獨盡陳其狀無毫髮爽聞者髮豎自庚午至辛未往來禮部左侍者四爲東西銓議者再爲諫長者四公輒自言老甚病力不可久廁朝端求外補堅懇遂尹鷄林爲治眞得汲黯之淸淨臥閤一境化之瓜熟而歸民刻石爲詩美之甲戌拜大諫論昔我先王製經國典雖王子大君不敢越其制今麟坪大君昏時衣服器用太侈恐累先生之制也上嘉納又論紀綱漸弛宮闈不嚴又上疏論時政得失人主好惡天災民怨鑿鑿累百言無非中端又勸上益溫舊學更加新得眞儒臣之言也辭遞拜兵議還都諫辭拜禮議賜告歸鄕丙子正月奔哭仁烈王后喪闕下謝命卽歸拜大諫副學咸辭以病十二月西事急上避之南漢城公倡義募兵丁丑圍解大駕還都公卽奔問業有副學之命矣肅謝請對上側席而敎曰聞卿倡義予甚嘉尙慰諭之至且詔之曰嶺軍再集於負來之後良由嶺南士大夫知不後君者多湖南能無愧乎公涕泣而前對曰老臣病不能袵金革孤負主辱臣死之義今登文石之陛顏不翅十重鐵甲仍進言曰古人有言曰臨大難而不懼者聖人之勇也聖上獨不觀前古帝王喪國而存國者乎願毋自沮毋自逸日與群臣講興衰之道焉蓋自出城殿坐甚罕故公言及此俄拜吏議閱數月特陞參判加嘉善資辭不許乞暇遷先墓戊寅三拜諫長一遷憲長改禮曹參判國子大成上以湖南軍犯律命役南漢三月又命巡檢使整三道舟師公皆執非時又上箚其目八調養聖躬懋修實德痛革侈風廣開言路振肅紀綱崇奬節義勤恤民隱革罷內需盡毉國之粱肉藥石也識者歎服後兩歲拜府院長俱三皆辭時大臣建全某德望素高年齡已暮宜急大用公聞之尤自謙謙斂退矣壬午二月上特加資憲除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從李相聖求之啓也公年始滿八十故尋拜大憲不赴是年十一月初七日考終于尙之城外第訃聞上輟朝贈賻賜祭如儀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後用長督克恒原從功加贈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明年二月葬于尙治西柏田山先壠下巽坐原治命也公諱湜字淨遠沙西號也系出沃川其先有學浚者仕麗朝爲領同正傳至太子中允孝格刑部侍郞大富民部典書侑版圖判書淑始大著爲公高祖曰應卿贈吏曹參判爲曾祖曰彭祖國子上庠贈承政院左承旨爲大父曰焜贈吏曹參判爲皇考曰汝霖贈吏曹判書以公貴推恩也妣月城李氏封貞夫人參奉信之女公生於嘉靖癸亥正月穎卓異凡兒才毀齕閭里稱孝童未十歲就塾師學學日進金沙潭弘敏有人倫鑑見之稱賞期以遠到己丑中司馬試壬辰倡義募士鏦殺賊數十餘公之忘身殉國之志發軔於此云公爲人白而長身和易有量所操者惟義與道雖歷險阻艱難意氣不少變以終其身是以其沒也上自薦紳大夫下至閭巷學究輩無不嗟惜又恨不得爲宰相於一時膏澤生民也公之德望於此可見於戲公吾丈人行也公視我不以幼壯先後致異不佞於癸未歲奉使日域意敍別於德公床下反哭拜靈座下愴何可已公凡再娶先夫人江華崔氏府使巨源之四世孫未乳早世後夫人洪氏南陽世族士人天敍之女生三男一女曰克恒文科正郞贈都承旨以文學著名死丙子難曰克恬進士前監役曰克㤚女適黃德柔司憲府監察側室三男二女克忱克憕康鍒生員柳之洙克恒無嗣庶出崇克恬有二男四女曰嶨爲克恒後者女李皬李埰別檢金學基進士餘幼克㤚有一男曰嶔峸克憕出克出黃德柔三男三女霦生員。,正言洪汝河士人成錫夏其壻也餘幼康鍒有二男二女后學世學女幼洪汝河有子女而幼銘曰懿哉我公世孰與侶於仁戴行於義抱處於夷必讓於病必急愼靜而至壽強毅而容物噫嘻斯人其可復見於今日也哉

正憲大夫原任知中樞府事趙絅撰

출처 : 전씨(全氏) 광장
글쓴이 : 한강의 언덕(전과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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