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칠성루 및 휴계재사[ 七星樓─休溪齋舍 ]

2016. 7. 11. 11:34 인물열전

 

칠성루 및 휴계재사[ 七星樓休溪齋舍 ]

 

영주 칠성루 및 휴계재사 전경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건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4. 칠성루는 휴계 전희철의 유덕을 추모하여 1631년에 그의 5대손인 설월당 익희가 창건한 것이고, 휴계재사는 휴계공의 묘소를 모시기 위하여 그의 증손인 망일당이 1576년에 창건한 것이다.

유형 유적

성격 건물

건립시기·연도 1631(인조 9)(칠성루), 1576(선조 9)(휴계재사)

소재지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4

문화재 지정일

1983929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건물.

내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4. 칠성루(1)는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의 유덕을 추모하여 1631(인조 9) 그의 5대손인 설월당(雪月堂)(2) 익희(益禧)가 창건하였다 하며, 휴계재사는 휴계공의 묘소를 모시기 위하여 그의 증손인 망일당(望日堂)(3)1576(선조 9)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휴계재사(4) 상량문에는 16961697(숙종 2223) 사이에 건립된 기록이 있고, 1786(정조 10)에 작성된 중수기(重修記)가 마루벽에 걸려 있다. 칠성루는 1890(고종 27)년에 작성된 칠성루기가 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정면 4, 측면 2칸 규모로 경사진 대지에 2단으로 조성된 축대 위에 남향으로 앉아 있다.

중앙 2칸은 우물마루를 깐 대청이고, 양 협간은 앞쪽에 대청과 연결하여 1칸 툇마루를 두고, 뒤쪽으로는 각각 칸반 온돌방을 두었다. 전열주는 앞쪽의 낮은 축대 위에 누하주를 두고 기둥 밖으로는 마루를 돌출시켜 계자각(鷄子脚) 헌함(軒檻 : 대청 기둥 밖으로 돌아가며 깐 좁은 마루)을 돌려 누마루처럼 꾸몄다.

자연석을 2단으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았고, 기둥은 정면 중앙 2칸은 원주이고 양쪽 끝에는 각주를 세웠다. 상부가구는 5량가인데, 이 위에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도록 한 팔작지붕에 홑처마집이다. 휴계재사는 칠성루 동측에 인접하여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는 자집이다.

평면은 정면 5, 측면 5칸으로, 정면 중앙의 대문칸을 들어서면 안마당이 되고 그 북쪽에 3통간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각각 방 2, 부엌 2, 고방 1칸이 앞쪽으로 연접배치되어 있다. 대문칸 좌우에는 마구간과 온돌방이 1칸씩 자리잡고 있다.

자연석을 다소 높게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았으며, 대청 전후면의 중심칸에만 4개의 높은 원주를 사용하였고 나머지는 각주를 세웠다.

대청 상부가구는 3량가로 대량 위에 제형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얹어서 지붕을 높게 처리하였으며, 양 익사(翼舍)와 문간채의 순으로 맞배지붕의 높이를 낮게 처리하여 외관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칠성루의 상부 결구수법과, 휴계재사의 좌우대칭적인 평면구성은 재사건축에서 그 예가 드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참고문헌

경상북도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경상북도, 1983)

우리 고장의 전통문화(영주시·영풍군, 1988)

[네이버 지식백과]칠성루및휴계재사 [七星樓休溪齋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칠성루(七星樓) :

七星樓

崇禎後四己酉

숭정후(崇禎後) 4번째 기유년(1849)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이 살아서는 단종(端宗)이 유배된 영월(寧越)을 생각하며 북극성을 중심으로 도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을 받들고, 죽어서는 칠성산에 묻혔다는 휴계의 사적에서 5대손 전익희(全益禧)가 칠성루라 하였다.

 

 

 

(2)설월당(雪月堂) :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5세손인 전익희(全益禧)의 호인 설월당(雪月堂)에서 따온 이름이다. 설월(雪月)은 눈온 뒤의 달빛과 같이 깨끗한 전희철의 절조를 상징하는 것에서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전익희[ 全益禧 ]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정언으로 있을 때 김자점을 탄핵하였다가 외직으로 좌천되었으며, 선산부사로 있을 때 선정을 펼쳐 송덕비가 세워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익희 [全益禧] (두산백과)

 

 

 

 

(3)망일당(望日堂) :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의 증손인 전개(全漑)가 지은 건물로 그의 호를 따라 이름하고 강당으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망일(望日)은 해를 바라보며 그리워하는 것으로 전희철이 단종을 향한 충성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전개(全漑):

雲川先生文集卷之五

言行綠

叔父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贈嘉義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世子左副賓客鶴峯先生言行錄

----湙娶直長全漑之女

직장[ 直長 ]

조선시대 각 관아에 두었던 종칠품(從七品) 관직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직장 [直長] (관직명사전, 2011. 1. 7., 한국학중앙연구원)

 

 

 

 

(4)휴계재사(休溪齋舍) :

휴계(休溪)는 전희철(全希哲)의 호로 그가 은거했던 영주(榮州) 휴천(休川)에서 따온 것이며, 그의 유덕을 기려, 증손인 망일당(望日堂) 전개(全漑)1576(선조 9)에 휴계재사를 지었다.

 

 

 

 

休溪先生全公實紀序

自古忠臣節士之行未有不始微而終顯由隱而至著蓋以一時之忌諱不能掩百世之公議故也余嘗讀龜窩金公所撰休溪全公墓表因舊碣所書素性剛直克守儉約八字而特言之竊恨其世代寖遠文獻無微未知其剛直者何事儉約者何指未嘗不三復致慨於當時史氏之有闕文也日公後孫秉烈秀學携公實紀一冊及松川崔相國興源所撰鄭老松知年行狀來請公實紀弁首之文蓋以鄭狀中僃言鄭公 端廟時遯節事而曰遜 位之日與全司直某同往慶會樓掩涕別六臣因與俱遯嶺下又贊曰逸民伯夷叔齊夷逸朱張夷齊見於傳記逸張不見言六臣著於世二公無所傳也儘信史也乃敬閱其蹟作而言曰夫君臣之義天經地緯苟義之所在則捐軀隕命那箇義也保身自靖亦那箇義也故吾夫子以微子之去箕子之爲奴比干之死於諫同謂之三仁我莊孝王定莊陵正壇配食三十有二人而梅月秋江幷與焉皆未嘗以死生之異跡而軒輊之大聖人精義達權古今殆一揆也於乎自夫虞夏降而天下之事變無竆固不能不激發仁人志士之心以公之世則 先王之宗祀不改社稷如故百官庶事非從祿于人也而乃慷慨取義脫屣高蹈斯固難矣因晦其志隱其事泯其跡寥寥三百年間使民無得以稱焉難以龜窩公之���學信筆在無所忌諱之世而猶且依俙掇拾於莓苔剝落之餘曾不若補碢匠河西傭湘東樵夫之得書於建文諸臣之列今於世代久遠聲響浸寂之後乃因他家文字得以闡發其志事則其事又難於諸子矣松川氏之文殆天所以發之歟然則同往禁中揮涕別六臣者舊碑所謂剛直也杜門自守隱約以終身者舊碑所謂儉約也當時作者之微其辤以避忌諱者抑亦時勢之所使然也嗟夫若公者宐上奏楓宸崇奬其義共躋於越壇配食之列而姑未遑焉雖若可恨然義理無竆顯晦有時公紀載之篇將付剞劂以行於世則公之蹟其將自此明於世矣安知非其兆也耶公諱希哲號休溪隱於休川因以自號休川在剛州地與粤山接壤其鄰又大田先生瑚纓公子畢命之地云爾

 

출처 : 전씨(全氏) 광장
글쓴이 : 全科雄 (55세/정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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