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전동추(全東秋)

2018. 2. 17. 12:22 인물열전



전동추(全東秋)


[무과] 영조(英祖) 43(1767) 정해(丁亥)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91(117/301)

[인물요약]

생년 임술(壬戌) 1742(영조 18)

본인본관 전주(全州)

거주지 평양(平壤)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301[125275]

전력 한량(閑良) ()

[가족사항]

[()]

성명 : 전신경(全信京)

관직 : 학생(學生)

[출전]

숭정3정해918일이친행태학알성급친경후장종친잠후수견경친림춘당대정시문[]과방목(崇禎三丁亥九月十八日以親幸太學謁聖及親耕後藏種親蠶後受繭慶親臨春塘臺庭試文[]科榜目)(국립중앙도서관[일산6024-73])


() 한량[閑良]

요약

고려 후기와 조선시대에 걸쳐 특정한 사회계층을 가리키던 말.

그러나 전체시기에 걸쳐 똑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걸쳐서 한량이라고 부르던 사회계층은 직첩(職牒) ·직함(職銜)은 있으나 직사(職事)가 없는 무직사관(無職事官)과 직() ·()이 없는 사족(士族)의 자제 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량은 한량인(閑良人) ·한량지도(閑良之徒) ·한량 품관(品官) ·한량 유사(儒士) ·한량 유신(儒臣) ·한량 기로(耆老) ·한산자제(閑散子弟) ·무역인(無役人) ·전함(前銜) 등 여러 가지 이름이 있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사족(士族) 자제 가운데 피역(避役)의 수단으로 호적과 군적에 등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 ·역이 없는 미사(未仕) 한량자제에 대하여 고려 말부터 국가는 그들을 호적에 등재하고 강제로 추쇄(推刷)하여 군역에 충당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이 정책이 더욱 강화되어 세종 때 그들을 중앙과 지방의 여러 병종(兵種)에 속하게 하고, 세조 때부터는 단일 병종에 귀속시키려는 정책이 계속되었다.


, 사족자제로서 집안에 경제력이 있어 궁술 등 무예를 닦은 무역(無役) 한량자제에 대하여 국가는 그들의 무예를 국방력에 흡수하고자 세종 때부터 그들에게 일정한 시험을 거쳐 갑사(甲士)직을 제수하였고, 중종 때부터는 그들에게 무과(武科) 응시를 허용하여 무인(武人)으로서의 성격이 굳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는 한량에 대한 의미가 무과 및 잡과 응시자를 가리키거나, 호반(虎班) 출신으로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의 뜻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또한 궁술의 무예가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량 [閑良] (두산백과)


출처 : 전씨(全氏) 광장
글쓴이 : 전과웅 (55세/정선)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