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백제 건국 설화[ 10명의 신하들 : 전섭(全聶) ]

2018. 4. 10. 09:23 인물열전

 



시조 온조왕[始祖溫祚王]

원전서지 : 삼국사기 제23권 백제본기 제1

(三國史記 卷第二十三 百濟本紀 第一)

시 대 명 : 백제

재위기간 : BC 18~ AD 28

연 도 : BC 18~ AD 28

 

1. 백제 건국 설화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溫祚王)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鄒牟) 혹은 주몽(朱蒙)이라고 한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리를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로 왔다. 졸본부여왕은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이 뛰어난 인물임을 알고 둘째 딸을 그의 아내로 삼았다. 얼마 후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이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이고 둘째는 온조이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월군(越郡)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百濟始祖溫祚王 其父 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或云 朱蒙 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주몽이 북부여(北扶餘)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찾아와서 주몽이 그를 태자로 삼았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오간(烏干), 마려(馬黎) 10명의 신하들과 남쪽으로 떠났는데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찾아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거처를 정하려고 하자 열 명의 신하가 말하였다.

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 한강)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둘러있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로 가로막혀 있으니 얻기 어려운 요새라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弥鄒忽)로 가서 살았다.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 來爲太子 沸流溫祚 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 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弥鄒忽以居之

 

온조는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기원전 18) 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으로 와서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히 지내는 것을 보고는 후회하다가 죽었다. 비류의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온조가 처음 올 때 백성이 즐겨 따라왔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 온조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하였다.

 

[일설에는, 시조는 비류왕인데, 그 아버지 우태(優台)는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이고, 어머니 소서노(召西奴)는 졸본(卒本)사람 연타발(延陁勃)의 딸이다. 소서노가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비류이고 둘째가 온조였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살았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자 전한 건소(建昭) 2(기원전 37) 2월에 남쪽으로 달아나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왕비로 삼았다. 나라를 세우는 데 소서노의 내조가 많았기 때문에 주몽이 그녀를 매우 사랑했고 비류와 온조를 자기의 친아들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와의 사이에 낳은 유류(孺留)가 오자, 태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래서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에 대왕께서 이곳으로 도망해 왔을 때, 어머니는 집안의 전 재산을 내놓아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에 공이 많았다. 대왕이 돌아가시고 나라는 유류에게 돌아갔으니 우리가 여기 남아 답답하게 지내기보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좋은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낫겠다.”

 

그리고는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북사(北史)수서(隋書)모두에는 동명(東明)의 후손 구태(仇台)가 있는데 어질고 신의가 있다.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그의 딸을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쪽 나라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어느 쪽이 옳은지 모르겠다.]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弥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陁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開基創業 頗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太子 以至嗣位焉 於是 沸流謂弟溫祚曰 始 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勤勞多矣 及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疣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 北史及隋書 皆云 東明之後有 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

 

[출처] 시조 온조왕 [始祖溫祚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십제공신

백제 개국에 공을 세운 십제공신 10인 중 삼국사기에 기록된 인물은 마려(馬黎), 오간(烏干) 뿐이고, 나머지는 족보 등에 기록되어 있다.

 

마려(馬藜) - 장흥, 목천 마씨(馬氏) 시조

오간(烏干)

전섭(全聶) - 전씨(全氏) 시조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간(屹干)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범창(笵昌)

조성(趙成) - 직산 조씨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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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전씨(全氏) 광장
글쓴이 : 전과웅 (55세/정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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