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고려사 고찰 [전오륜(全五倫), 전백영(全伯英)]①

2018. 11. 22. 15:33 인물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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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1413() 경오(庚午),

1391517()


김주 등을 관직에 임명하다


문하평리(門下評理) 김주(金湊)를 겸 대사헌(兼 大司憲)으로, 허응(許應전오륜(全五倫)을 좌상시(左常侍우상시(右常侍), 전백영(全伯英)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권진(權軫)을 우헌납(右獻納)으로, 김여지(金汝知)를 좌정언(左正言)으로 임명하였다.


[原文]

以門下評理金湊兼大司憲, 許應·全五倫爲左右常侍, 全伯英爲右司議大夫, 權軫爲右獻納, 金汝知爲左正言.


 

전오륜[ Jeon Ohryun, 全五倫 ]

생애 및 활동사항

1373(공민왕 22) 과거에 급제하였다. 1391(공양왕 3) 우상시(右常侍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형조판서(刑曹判書)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392(공양왕 4)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가 조선 태조에 의하여 본향안치(本鄕安置)의 처벌을 받았다. 이때 본향안치된 인물이 성석린(成石璘이윤굉(李允紘유혜손(柳惠孫안원(安瑗강회중(姜淮中신윤필(申允弼성석용(成石瑢정희(鄭熙) 등인데, 이들 중 성석린과 같이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살았던 인물들도 있었다. 뒤에 풀려나서 서운산(瑞雲山, 강원도 정선 소재)에 은거하였다.

두문동 72인 중의 한 사람이며, 뒷날 경상남도 안의(安義)에 소재한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전오륜의 유고(遺稿)와 행적 관련 자료를 모아놓은 책이 채미헌실기(採薇軒實記)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오륜 [Jeon Ohryun, 全五倫]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전백영[ 全伯英 ]

본관은 경산(慶山)이고,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고려 말기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1375(우왕 1) 간관으로 있을 때 우헌납 이첨(李詹)과 함께 친원정책을 펴는 권신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을 죄목을 열거하여 목벨 것을 상소하다가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좌천되었다.

조선 건국 후인 1393(태조 2) 간의대부에 제수되었으며, 이후로 간관으로서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하기 위한 방안을 여러 차례 상소하였다. 1396(태조 5) 개국공신 정희계(鄭熙啓)의 시호문제에 연루되어 파직되었으나 곧 사면되었다. 1397년에는 병조전서(兵曹典書)로서 서북면선위사(西北面宣慰使)가 되어 여러 고을의 성 쌓을 만한 곳을 살피고 돌아와 보고하였다.

1398년 풍해도도관찰출척사(豊海道都觀察黜陟使)가 되어 부임하였고, 1400(정종 2) 경상도도관찰출척사가 되어 왕에게 궁시(弓矢)와 검갑(劍甲)을 받았다. 1404(태종 4) 승녕부 윤(承寧府尹)에 임명되고, 1405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다. 이듬해 경기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왕에게 칭찬을 들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백영 [全伯英] (두산백과)


김주[ 金湊 ]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낙안(樂安). 1360(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었다. 1366(공민왕 15) 간관(諫官) 정공권(鄭公權)이 신돈(辛旽)의 죄를 극력 간했던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비서감승(秘書監丞)의 직에 올랐다.

우왕 때 사헌집의(司憲執義지신사(知申事밀직제학(密直提學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하였다. 1377(우왕 3) 9월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1379년에 양광도(楊廣道)에 왜구가 침입하자 원수 도흥(都興)과 더불어 이를 막았다.

13869월에 동지밀직사사 이숭인(李崇仁)과 더불어 중국 난징[南京]에 사신으로 가서 신정(新正)을 하례하였다. , 13885월 양광도 지역에 왜구가 침입해 유린하니 원수 도흥, 조준(趙浚) 등과 더불어 이를 막았다.

1389(공양왕 1)에는 도평의사사 신청사(新廳舍)의 건축공사를 감독하였다. 13918월에는 문하평리 겸 대사헌(門下評理兼大司憲)이 되어 상소를 올려 5(五道)의 정부(丁夫)를 뽑아 도성을 수축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축성공사가 시작되자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에 공사가 너무 크다 하여 축성이 중지되었다. 그리고 규정(糾正) 박자량, 집의(執義) 우홍득, 사복부정(司僕副正) 변벌개(邊伐介), 한양부윤 유원정(柳爰廷) 등을 탄핵하기도 하였다. 13923월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1393(태조 2) 2월에 예문춘추관대학사(藝文春秋館大學士)가 되었고,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로서 계룡산 아래 신도(新都) 후보지로서의 적합성 여부를 조사하던 중, 조운(漕運)과 도로 관계를 조사하는 데 참여하였다.

태조가 개성에 돌아간 뒤에도 그곳에 남아 신도경영을 감독하였다. , 한양천도 때 좌복야(左僕射)로서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의 판사가 되어,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등과 더불어 새 도읍지 건설공사를 급속히 추진하기도 하였다.

139499일에는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종묘·사직·궁궐·관아·시전(市廛도로의 기지를 선정, 구획하고, 심덕부와 더불어 현지에 남아 모든 건설사업을 감독, 시행하였다.

1398(태조 7) 9월 제1차 왕자의 난에 관련되어 김사행(金師行)이 참수당할 때, 그와 더불어 백성을 혹사하였다 하여 영주(寧州)로 유배되었으나 성곽 경영의 공로로 감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주 [金湊]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허응[ 許應 ]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시호는 경혜(景惠)이다. 개성윤(開城尹)을 지낸 교()의 아들이다. 1371(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하여 낭사(郎舍)를 비롯한 여러 관직을 지냈다. 1388(우왕 14) 우상시로 있으면서 폐지되었던 균전법을 회복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1391(공양왕 3)에는 낭사로 있으면서 전왕 때 왕의 총애를 빌미로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힌 이임(李琳)ㆍ강인유(姜仁裕)ㆍ왕흥(王興)ㆍ신아(申雅) 등을 귀양보낼 것을 청하여 실행시켰다. 그러나 시폐를 논할 때 배불론을 주장하여 왕의 미움을 샀다.

이성계(李成桂)의 측근이 되어 조선건국에 공을 세웠으며, 여러 요직을 거쳐 태종 때에는 대사헌에 올랐다. 대사헌 재임중 배불정책을 강하게 주장하였고, 1404년 좌우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이듬해에는 공안부윤(恭安府尹)으로서 사은사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허응 [許應] (두산백과)


권진[ 權軫 ]

본관 안동. 호 독수와(獨樹窩). 시호 문경(文景). 1377(우왕 3) 문과에 급제, 자기의 조카딸과 결혼하라는 권신(權臣) 염흥방(廉興邦)의 제의를 거절하였다가 그의미움을 사 관직을 내놓았다. 몇 해 뒤 왜구(倭冠)의 침입을 막는 의창현(義昌縣)의 현령(縣令)에 임명되어 이를 잘 막았으며, 시중(侍中) 이성계(李成桂)의 천거로전주판관(全州判官)이 되었다.

1398(태조 7) 침입한 왜구를 토벌할 때 조전원수(助戰元帥) 성석린(成石璘)의추천으로 경력(經歷)이 되었다. 태종 초에 강원도와 경상도의 도관찰사를 지냈으며, 1407(태종 7) 형조판서에 올라 흠문기거사(欽問起居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 평안도도관찰사가 되었다.

1422(세종 4)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갔으며, 이듬해 한성부판사 ·형조판서를 역임하였고, 1426년 찬성(贊成)을 지냈다. 1430년 이조판서로 전임했으며, 1431년 우의정에 올랐다가, 1433년에치사(致仕)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권진 [權軫] (두산백과)


김여지[ 金汝知 ]

본관 연안(延安). 자 사행(士行). 시호 문익(文翼). 1389(창왕 1) 문과에장원급제하여 사헌부규정(糾正)에 임명되나, 곧 언사(言事)로 전라도로 유배되었다. 다시 우정언(右正言)으로 등용되어 정도전(鄭道傳)을 탄핵하다가 파면되었고, 뒤에예조좌랑 ·계림부판관(鷄林府判官) 등을 지냈으나 정도전의 압력으로 사직하였다. 뒤에 복직되어 우헌납(右獻納)으로 있던 1402(태종 2) 언사로 창평(昌平)에안치되었다.

그리고 곧 복관되어 병조 ·이조의 정랑(正郞)에 이어 정4품 장령(掌令)으로승진하였으나, 다시 언사로 순금사(巡禁司)에 갇혔다가 봉주지사(鳳州知事)로좌천되었다. 1410년 정3품 지신사(知申事)에 올랐으나, 1413년 고려 종실의 후손인왕걸오미(王乬吾未)의 동정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다. 1414년 다시예문관제학으로 기용된 뒤 충청도관찰사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417년공조판서에 오르고 예조판서 ·한성부판사를 역임하고,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형조판서로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예조판서를 거쳐종1품 의정부참찬에 올랐다. 충직하고 도량이 넓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여지 [金汝知] (두산백과)

출처 : 전씨(全氏) 광장
글쓴이 : 전과웅 (55세/정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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