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19. 00:12ㆍ 인물열전
※ 요약
☞전일성(全日成)
1873년 경희궁 위장 역임
☞전태린(全泰獜)
1873년 훈련원 정(訓鍊院 正) 역임
◎ 훈련원[ 訓鍊院 ]
정의
조선 시대 군사의 시재(試才), 무예의 훈련 및 병서(兵書)의 습독(習讀)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
내용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르면, 지사(知事, 정2품) 1인은 타관(他官)이 겸했고, 도정(都正, 정3품당상관) 2인 가운데 1인도 타관이 겸했으며, 정(正, 정3품당하관) 1인, 부정(副正, 종3품) 2인, 첨정(僉正, 종4품) 2인, 판관(判官, 종5품) 2인, 주부(主簿, 종6품) 2인, 참군(參軍, 정7품) 2인, 봉사(奉事, 종8품) 2인이었다. 그 밖에 습독관(習讀官)이 30인 있었는데, 이들은 병요(兵要)·무경칠서(武經七書)·통감(通鑑)·장감(將鑑)·박의(博議)·진법(陣法)·병장설(兵將說)을 습독하고, 사어(射御)를 익혔다. 관원은 모두 무관으로 임용되었는데, 특히 정은 당상관으로 승진될 수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훈련원 [訓鍊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승정원일기
고종 10년 계유(1873)12월 27일(신축) 맑음
10-12-27[40] 이규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이규영(李珪永)을 도총관으로, 이수동(李壽東)을 동지중추부사로, 이기조(李基祖)ㆍ김기혁(金箕赫)을 선전관으로, 신지호(辛志浩)를 오위장으로, 이민상(李敏庠)을 부총관으로, 임우호(任禹鎬)를 경주 영장(慶州營將)으로, 유기백(柳冀伯)을 전주 영장(全州營將)으로, 이희익(李熙益)을 경기 중군으로, 조재항(趙載恒)을 황해 중군으로, 심의직(沈宜稷)을 평안도 병마우후로, 원세정(元世?)을 내금위장으로, 남궁석(南宮錫)ㆍ한도숙(韓道淑)을 오위장으로, 조의찬(趙義贊)을 수원 중군으로, 양주한(梁柱漢)을 북병영 우후로, 이주일(李柱一)ㆍ이만하(李晩夏)를 오위장으로, 조존귀(趙存龜)를 충장위장으로, 전태린(全泰獜)을 훈련원 정으로, 이창회(李昌會)를 충청도 병마우후로, 장동혁(張東赫)을 경복궁 위장으로, 김용채(金龍采)를 경희궁 위장으로, 정인식(鄭寅植)을 무신겸선전관으로, 권병룡(權秉龍)을 수문장으로, 권용철(權用哲)을 충청 중군으로, 황도원(黃道源)을 경희궁 위장으로, 김기석(金基錫)을 갈파지 첨사로, 신석현(申錫鉉)을 구산 첨사(龜山僉使)로, 황익훈(黃益勳)을 유원 첨사(柔院僉使)로, 강효원(康孝源)을 수양 별장(首陽別將)으로, 민영상(閔泳商)ㆍ박제성(朴齊晟)을 문신겸선전관으로, 배도형(裵道亨)을 미조항 첨사(彌助項僉使)로, 민귀호(閔龜鎬)를 제포 만호(薺浦萬戶)로, 강효운(康孝運)을 방원 만호(防垣萬戶)로, 김용호(金龍浩)를 등산 첨사(登山僉使)로, 김석태(金錫兌)를 우현 첨사(牛峴僉使)로, 김장길(金長吉)을 안골 만호(安骨萬戶)로, 유정현(劉鼎鉉)을 개운포 만호(開雲浦萬戶)로, 조장신(趙章信)을 보산 별장(保山別將)으로, 이홍규(李弘奎)ㆍ권종열(權鍾悅)을 오위장으로, 김필신(金弼臣)을 장곶 첨사(長串僉使)로, 박원상(朴元尙)을 차령 첨사(車嶺僉使)로, 남필중(南弼重)을 풍산 만호(豐山萬戶)로, 장양후(張良厚)ㆍ이인송(李寅松)을 오위장으로, 김기주(金箕疇)를 경복궁 위장으로, 진도율(陳道律)을 강포 만호(康浦萬戶)로, 호정신(胡禎臣)을 조니 만호(助泥萬戶)로, 임용준(任龍準)을 오위장으로, 이교춘(李敎春)을 충장위장으로, 김기연(金基淵)을 용진 만호(龍津萬戶)로, 박영호(朴永祜)를 가배량 만호(加背梁萬戶)로, 홍원격(洪源格)을 구령 만호(仇寧萬戶)로, 조종혁(趙鍾赫)ㆍ장기석(張岐錫)을 경희궁 위장으로, 홍찬(洪瓚)을 부장(部將)으로, 김영익(金永翼)을 경복궁 위장으로, 최희영(崔禧榮)ㆍ태세춘(太世春)을 경희궁 위장으로, 오병권(吳秉權)ㆍ김종백(金鍾伯)ㆍ황덕연(黃德淵)을 오위장으로, 전일성(全日成)을 경희궁 위장으로, 이용관(李容觀)을 도총부 경력으로, 이기택(李起澤)을 훈련원 첨정으로, 윤홍구(尹弘求)를 어영청 파총으로, 서광승(徐光承)ㆍ이희춘(李熙春)을 선전관으로, 홍병직(洪秉稷)을 훈련원 판관으로, 민치기(閔致夔)를 선전관으로, 이건석(李建晳)을 훈련도감 초관으로, 이교춘(李敎春)을 함경 감영 중군으로, 오순영(吳順泳)을 훈련원 첨정으로, 김연규(金演奎)를 훈련원 주부로, 여창섭(呂昌燮)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이규상(李圭常)을 선전관으로, 유긍수(柳肯秀)를 훈련원 첨정으로, 오정선(吳正善)ㆍ정인태(鄭寅台)를 훈련원 부정으로, 김귀희(金龜喜)를 훈련원 판관으로, 이제만(李濟萬)을 무신겸선전관으로, 한의석(韓義錫)을 훈련원 주부로, 안정구(安珽求)ㆍ이유필(李儒必)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이익희(李翼熙)를 훈련도감 파총으로, 신정균(申鼎均)을 어영청 파총으로, 이항의(李恒儀)ㆍ김병선(金炳善)ㆍ김교익(金敎益)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제현(李濟鉉)을 중추부 도사로, 이재기(李載驥)를 도총부 도사로, 유석주(兪石柱)를 충장위장으로, 이교철(李敎哲)을 선전관으로, 김상우(金相友)를 훈련원 주부로, 송의호(宋義浩)를 무신겸선전관으로, 이규서(李奎書)를 훈련원 도정으로, 정인석(鄭寅錫)ㆍ유석하(柳錫夏)ㆍ백남설(白南卨)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전원근(田源根)을 부장으로, 윤영기(尹泳璣)ㆍ이교원(李敎元)ㆍ장기렴(張基濂)을 선전관으로, 김영섭(金永燮)ㆍ구문회(具文會)를 부장으로, 심능직(沈能直)을 수문장으로 삼았다. 갑암 권관(甲巖權管)에 임승걸(林承杰)을 단부하였고, 율포 권관(栗浦權管)에 강영호(姜英鎬)를 단부하였고, 갈헌동 권관(乫軒洞權管)에 최태형(崔泰衡)을 단부하였고, 광평 권관(廣坪權管)에 호종간(胡宗玕)을 단부하였고, 소파아 권관(小坡兒權管)에 손형제(孫衡濟)를 단부하였고, 양영만동 권관(梁永萬洞權管)에 김정구(金鼎九)를 단부하였다. 훈련원 판관 이건혁(李建爀), 주부 손재흥(孫再興)ㆍ황성연(黃星淵)ㆍ김순주(金舜柱) 이상은 감하(減下)하였다. 조홍묵(趙泓默)을 훈련원 판관 가설(假設)로, 홍성윤(洪成潤)ㆍ김치영(金致榮)ㆍ구명희(具命禧)를 주부 가설로 삼았다. 동지중추부사에 안윤식(安潤植)을 단부하였고, 첨지 세 자리에 박상수(朴商壽)ㆍ최응조(崔應祖)ㆍ권홍섭(權弘燮)을 단부하였고, 훈련원 주부에 박윤근(朴潤根)을 단부하였다. 본원에서 거관(去官)한 경주 영장 임우석(任禹錫), 전주 영장 유기백(柳冀伯), 경기 중군 이희익(李熙益), 황해 중군 조재항(趙載恒), 평안도 병마우후 심의직(沈宜稷)에게 이번에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가자(加資)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동지중추부사 열 자리에 장동혁(張東赫)ㆍ김기주(金箕疇)ㆍ김영익(金永翼)ㆍ김용채(金龍采)ㆍ황도원(黃道源)ㆍ조종혁(趙鍾赫)ㆍ최희영(崔禧榮)ㆍ태세춘(太世春)ㆍ김일성(金日成)ㆍ황덕연(黃德淵)을 단부하였고, 첨지 열두 자리에 신지호(辛志浩)ㆍ남궁석(南宮錫)ㆍ한도숙(韓道淑)ㆍ이주일(李柱一)ㆍ이만하(李晩夏)ㆍ이인송(李寅松)ㆍ이홍규(李弘奎)ㆍ권종열(權鍾悅)ㆍ장양후(張良厚)ㆍ오병권(吳秉權)ㆍ김종백(金鍾伯)ㆍ조존귀(趙存龜)를 단부하였다. 부사과(副司果) 여덟 자리에 이건대(李建大)ㆍ이병룡(李秉龍)ㆍ최원위(崔元暐)ㆍ전학중(田學仲)ㆍ이계흥(李啓興)ㆍ김익제(金翼濟)ㆍ이근응(李根應)ㆍ김제의(金濟儀)를 단부하였다. 훈련원 부정 가설에 서광승(徐光承)을 단부하였고, 상호군(上護軍) 다섯 자리에 강세창(姜世昌)ㆍ송재묵(宋載默)ㆍ김호영(金好永)ㆍ김승균(金勝均)ㆍ조한빈(趙漢斌)을 단부하였다.
[原文]
○ 以李珪永爲都摠管, 李壽東爲同知, 李基祖·金箕赫, 爲宣傳官, 辛志浩爲五衛將, 李敏庠爲副摠管, 任禹鎬爲慶州營將, 柳冀伯爲全州營將, 李熙益爲京畿中軍, 趙載恒爲黃海中軍, 沈宜稷爲平安兵虞候, 元世?爲內禁將, 南宮錫·韓道淑爲五衛將, 趙羲贊爲水原中軍, 梁柱漢爲北虞候, 李柱一·李晩夏爲五衛將, 趙存龜爲忠壯將, 全泰獜爲訓鍊正, 李昌會爲忠淸兵虞候, 張東赫爲景福將, 金龍采爲慶熙將, 鄭寅植爲武兼, 權秉龍爲守門〈將〉, 權用哲爲忠淸中軍, 黃道源爲慶熙將, 金基錫爲波知僉使, 申錫鉉爲龜山僉使, 黃益勳爲柔院僉使, 康孝源爲首陽別將, 閔泳商·朴齊晠爲文兼, 裵道亨爲彌助項僉使, 閔龜鎬爲薺浦萬戶, 康孝運爲防垣萬戶, 金龍浩爲登山僉使, 金錫兌爲牛峴僉使, 金長吉爲安骨萬戶, 劉鼎鉉爲開雲浦萬戶, 趙章信爲保山別將, 李弘奎·權鍾悅爲五衛將, 金弼臣爲長串僉使, 朴元尙爲車嶺僉使, 南弼重爲豐山萬戶, 張良厚·李寅松爲五衛將, 金箕疇爲景福將, 陳道律爲康浦萬戶, 胡禎臣爲助泥萬戶, 任龍準爲五衛將, 李敎春爲忠壯將, 金基淵爲龍津萬戶, 朴永祜爲加背梁萬戶, 洪源格爲仇寧萬戶, 趙鍾赫·張岐錫爲慶熙將, 洪爲部將, 金永翼爲景福將, 崔禧榮·太世春爲慶熙將, 吳秉權·金宗伯·黃德淵爲五衛將, 全日成爲慶熙將, 李容觀爲都摠經歷, 李起鐸爲訓鍊僉正, 尹弘求爲御營把摠, 徐光承·李熙春爲宣傳官, 洪秉稷爲訓鍊判官, 閔致夔爲宣傳官, 李建晢爲訓鍊都監哨官, 李敎春爲咸鏡監營中軍, 吳順泳爲訓鍊僉正, 金演奎爲訓鍊主簿, 呂昌燮爲武兼, 李圭常爲宣傳官, 柳肯秀爲訓鍊僉正, 吳正善·鄭寅台爲訓鍊副正, 金龜喜爲訓鍊判官, 李濟萬爲武兼, 韓羲錫爲訓鍊主簿, 安珽求·李儒必爲武兼, 李翼熙爲訓鍊都監把摠, 申鼎均爲御營把摠, 李恒儀·金炳善·金敎益爲訓鍊僉正, 李濟鉉爲中樞都事, 李載驥爲都摠都事, 兪石柱爲忠壯將, 李敎哲爲宣傳官, 金相友爲訓鍊主簿, 宋義浩爲武兼, 李奎書爲訓鍊都正, 鄭寅錫·柳錫夏·白南卨爲武兼, 田源根爲部將, 尹泳璣·李敎元·張基濂爲宣傳官, 金永燮·具文會爲部將, 沈能直爲守門將, 甲巖權管單林承杰, 栗浦權管單姜英鎬, 乫軒洞權管單崔泰衡, 廣坪權管單胡宗玕, 小坡兒權管單孫衡濟, 梁永萬洞權管單金鼎九, 訓鍊判官李建爀, 主簿孫再興·黃星淵·金舜柱, 以上減下, 以趙泓黙爲訓鍊判官, 加設洪成潤·金致榮·具命禧爲主簿, 加設同知單安潤植, 僉知三單朴商壽·崔應祖·權弘燮, 訓鍊主簿單朴潤根, 本院去官, 慶州營長任禹錫, 全州營將柳冀伯, 京畿中軍李熙益, 黃海中軍趙載恒, 平安兵虞候沈宜稷, 以上今加折衝加資事承傳, 同知十單, 張東赫·金箕疇·金永翼·金龍采·黃道源·趙鍾赫·崔禧榮·太世春·金日成·黃德淵, 僉知十二單, 辛志浩·南宮錫·韓道淑·李柱一·李晩夏·李寅松·李弘奎·權鍾悅·張良厚·吳秉權·金宗伯·趙存龜, 副司果李建大·李秉龍·崔元暐·田學仲·李啓興·金翼濟·李根應·金濟儀, 訓鍊副正加設單徐光承, 上護軍五單, 姜世昌·宋載默·金好永·金勝均·趙漢斌。
승정원일기 > 고종 > 고종 11년 갑술 > 1월 7일 > 최종정보
고종 11년 갑술(1874)1월 7일(신해) 맑음
11-01-07[30] 신병이 있거나 지방에 있는 동지중추부사 이동수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 병조가 아뢰기를,
“동지중추부사 이동수(李東壽), 오위장 오병권(吳秉權)ㆍ김종향(金宗珦)ㆍ이홍규(李弘奎)ㆍ황덕연(黃德淵), 경희궁 위장 전일성(全日成)ㆍ최희영(崔禧榮)은 모두 병으로 직임을 살피기 어렵다고 정장하여 체직을 청하였고, 선전관 이기조(李基祖)는 제수되고도 지방에 있어 올라올 기약이 없다고 하며, 새로 제수된 갈파지 첨사 김기석(金箕錫)은 어미의 나이가 올해 79세인데 법으로 볼 때 멀리 떠나 부임할 수 없다고 정장하여 체직을 청하였습니다. 변장(邊將)의 부모가 75세 이상인 자는 그 직임을 체차하도록 법전에 실려 있습니다.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原文]
○ 兵曹啓曰, 同知中樞府事李東壽, 五衛將吳秉權·金宗珦·李弘奎·黃德淵, 慶熙宮衛將全日成·崔禧榮, 俱以病難供職, 呈狀乞遞。 宣傳官李基祖, 除授在外, 上來無期云。 新除授波知僉使金箕錫, 母年今爲七十九歲, 法不當遠離赴任, 呈狀乞遞矣。 邊將之親年七十五歲以上者, 許遞其任, 載在法典, 竝改差,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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