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1. 14:03ㆍ 인물열전
國史館論叢 第72輯 > 朝鮮初期 官人層 硏究(李東熙) > Ⅲ. 出身家門의 高麗時代 家勢 > 3. 安東張氏 ~ 永川皇甫氏
3. 安東張氏 ~ 永川皇甫氏
1) 張思吉(安東)
장사길은 義州의 土豪로 武材가 뛰어나 태조 이성계의 심복이 되었으며, 개국공신에 책봉되었다.
그 아우 張思靖도 개국공신이다. 장사길의 父는 義州萬戶 張烈로, 化寧(安東)에서 의주로 이주해 義州帖吏가 되었으며, 활을 잘 쏘고 權貴에게 뇌물을 바쳐 만호가 되었다 한다.註 188
안동장씨는 장사길을 1세조로 하고 있다.
2) 全伯英(慶山)
전백영은 공민왕대 과거에 급제하고,
우왕대 諫官으로서 李詹과 함께 李仁任을 탄핵하다 유배되었던 인물이다.
『氏族源流』에는 전백영부터 기재되어 있고, 『實錄』의 전백영 졸년기사에 선대에 관한 기사가 없으며, 『文科榜目』에도 그 父가 공란으로 되어 있다. 『勝覽』 경산현 인물조에는 전백영 외에 등재되어 있는 자가 없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그 선대를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전백영에 이르러 성장한 가계가 아닌가 한다.
3) 鄭矩·鄭欽之·鄭甲孫·鄭昌孫(東萊)
동래정씨는 대대로 戶長을 세습하다 鄭穆이 과거를 통해 攝大府卿에 올랐으며, 그 아들 鄭沆이 과거에 급제하고 인종의 총애를 받아 知樞密院事를 역임하면서 가세가 신장되었다.註 191
그러나 조선건국 후 거족을 형성한 가계는 정항의 兄 鄭澤 系列로, 이 鄭澤 계열은 여말에 이르기까지 재추급 관인을 배출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鄭矩의 父 鄭良生이 우왕대에 大司憲에 제수되었는데,
위 인물들은 그 후손들이다. 정양생의 子가 정구이며, 손자가 정흠지이다. 정갑손과 佐翼·翊戴·佐理功臣 정창손은 정흠지의 子이다. 이 가계는 무신집권 이전에 중앙에 진출하였으나, 거족으로의 발전은 조선건국 후에 이루어졌다.
4) 鄭道傳·鄭津(奉化)
정진은 정도전의 子이다. 주지하다시피 정도전의 가계는 戶長出身으로 여말에 성장한 신흥세력이다. 정도전의 高祖는 奉化戶長 鄭公美이며, 曾祖는 英餐(秘書郞同正), 祖는 均(檢校軍器監)이다.
이 가계는 정도전의 父 鄭云敬으로부터 實職에 진출하였다. 정운경은 충숙왕대 과거에 급제하고 공민왕대 刑部尙書를 역임하였다.
5) 鄭淵·鄭鎭(延日)
위 인물들은 鄭夢周系와는 다른 監務公派로 鄭思道의 손자들이다. 정사도는 충숙왕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공민왕대 同知密直司事를 거쳐 우왕대 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註 196
이 가계는 1세조 鄭克儒로부터 昌祐—均之(贈門下侍郞)—潤(知制敎)—侑(宗簿令)—思道로 발전하였다.
『氏族源流』에 정극유와 정창우가 각각 監務와 判禮賓寺事를 역임하였다고 하나, 史書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고려후기 일찍부터 중앙에 진출한 것 같으나, 宰相家로 성장한 것은 여말이다.
6) 鄭苯(晉州)
진주정씨 정분의 가계는 鄭臣重—以吾—苯으로 이어진다.
정이오는 李穡과 鄭夢周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공민왕말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건국 후 藝文館大提學을 역임하였던 인물이다.
그의 父 정신중은 『氏族源流』에 관직이 기재되어 있지 않으며, 『實錄』의 정이오 졸년기사에도 그에 관한 기사가 없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정분의 가계는 여말선초에 성장한 신흥세력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萬姓大同譜』에는 정신중이 鄭天德의 子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氏族源流』에 정천덕과 정신중이 다른 파로 기재되어 있고, 『文科榜目』에도 정분의 증조가 공란으로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후대에 연결된 것이 아닌가 한다. 『氏族源流』에 의하면 정천덕의 가계는 鄭守珪(內府令)—椽(三司副使)—乙輔(贈工部侍郞)
—天德(府使)으로 이어진다.
7) 鄭擢(淸州)
청주정씨는 무신집권기에 武班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鄭顗가 고종대 武功을 세우고 大將軍을 역임하였으며,
『百氏通譜』에 의하면 정의의 父와 祖도 別將이었다.
정의의 子 儇은 監察御史를 지냈으며, 손자 瑎는 충렬왕대 贊成事에 올랐다. 정해의 두 아들 忄責과 怡 또한 각각 判膳工監事와 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鄭忄責의 子 䫨와 誧도 각각 僉議評理와 左司議大夫를 역임하였으며, 誧의 子 公權(樞)은 공민왕대 문과에 급제하고 政堂文學에 올랐다.
그 정공권의 子가 바로 형제간에 開國功臣 1등에 책봉된 鄭摠·鄭擢 형제이다. 청주정씨는 元 간섭기에 재추급 관인을 배출하면서 권문세족으로 성장하여 갔다.
8) 鄭麟趾, 鄭招(河東)
정인지 가계는 吏職을 세습하다가, 縣吏 鄭國龍의 子 鄭芝衍이 충숙왕대 僉議贊成事를 역임하였다.
『氏族源流』에 의하면 이후에도 翊(大護軍)—乙貴(宗簿署令)—興仁(縣監)—麟趾로 이어지면서 관직자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정초는 정인지와 別派로, 그 선대는 『氏族源流』에 의하면 鄭綮(河川君)—承慶(僉議贊成)—台輔(密直副使)—熙(執義)—招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들 중 공양왕대 司憲執義를 역임한 정희
외에는 『高麗史』에 나오지 않으며, 『勝覽』의 하동현 인물조에도 등재되어 있는 자가 없다. 또한 『實錄』의 정초 졸년기사에도 정희의 아들로만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정초의 조카 佐翼功臣 鄭守忠의 行狀에 보면, 정태보는 일찍 卒하였으며, 밀직부사는 추증된 것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정승경의 찬성사직도 實職이 아닌 것 같다. 정초가계는 여말에 성장한 가계가 아닌가 한다.
9) 鄭易(海州)
정역은 孝寧大君의 장인으로, 우왕대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태종대 原從功臣에 책봉되었던 인물이다.
『氏族源流』에 의하면 정역의 가계는 시조 鄭肅(典法正郞)으로부터 王言(少府少尹)—允珪(郎將)—易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實錄』의 정역 졸년기사에는 그 선대에 관한 언급이 없으며, 『高麗史』 등의 史書에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이 가계는 여말선초 정역이 득세하면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10) 趙啓生·趙末生·趙克寬(楊州)
조말생·조계생 형제는 書雲觀正 誼
의 子이며, 조극관은 조계생의 子이다. 『氏族源流』에 의하면 조말생의 曾祖는 戶長 岑, 祖는 保勝別將 仁弼이다. 조말생의 가계는 호장의 후예로 여말선초 중앙에 진출한 신흥세력이라 할 수 있다.
11) 趙庸(眞寶)
조용은 공민왕 23년 문과에 급제하고 成均司藝 등을 역임하다, 조선건국 후 藝文館大提學을 지냈으며 性理學에 정통하였다.
조용은 진보조씨의 1세조로 『實錄』의 조용 졸년기사에 선대에 관한 기사가 없으며, 『勝覽』의 진보현 인물조에도 조용 외에 등재되어 있는 인물이 없다. 또한 조용의 졸년기사에 의하면 ‘집이 빈한하였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조용 선대의 가세는 미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2) 曺錫文·曺備衡(昌寧)
조석문은 密直副使 曺敬修의 손자이며,
조비형은 按擦使 曺益修의 子이다.
조경수와 조익수는 曺敏修의 형제들이다. 이 가계는 조민수가 우왕대 門下侍中에 오르면서 번창하였다.
조민수의 선대는 『氏族源流』에 조민수의 父 遇禧가 贈門下侍中, 祖 元桂가 閤門袛侯, 曾祖부터 平章事 曺子奇 전까지 5대가 모두 少監으로 되어 있다. 조자기는 平章事라고 하나,
『高麗史』에서는 현종대 侍御司憲을 지낸 것만이 확인되어, 의문의 여지가 있다.
13) 趙浚·趙璞(平壤)
조준·조박은 모두 開國1等功臣이다. 주지하다시피 평양조씨는 趙仁規를 필두로 附元勢力을 대표하는 가문이다. 조인규는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나, 몽고어의 譯官으로 성장하여 충렬왕대 수상인 中贊에 올랐던 당대 최고의 권세가이다.註 217
조인규의 女는 충선왕의 妃가 되었으며, 子 瑞(三司事)·璉(贊成事)·珝(改名:延壽,贊成事)·瑋(贊成事) 또한 모두 재상을 역임하였다.
조준은 그러한 조연의 손자이며, 조박은 조우의 증손이다. 평양조씨는 元 간섭기에 권문세족으로 성장하여 조선건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세력이다.
14) 趙溫·趙涓·趙惠·趙英茂(漢陽)
한양조씨는 한양에서 고려후기 咸鏡道 龍津縣으로 이주하여, 趙暉가 蒙古 침입시 이에 협력 雙城摠官이 되었으며, 그 아들 良琪도 附元勢力으로 쌍성총관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조양기의 아들 趙暾은 高麗에 협력, 고려 이민 쇄환과 쌍성총관부 수복 등에 공을 세우고 공민왕대 禮儀判書를 역임하였다. 조돈의 아들 趙仁璧은 李成桂의 妹夫로 공양왕대 三司左使에 올랐으며, 趙仁玉은 密直代言을 역임하고 朝鮮 건국 후 開國1等功臣에 책봉되었다.
조인벽의 子가 開國·定社·佐命功臣 조온과 佐命功臣 조연이며, 조혜는 조연의 子이다. 開國·定社·佐命功臣 조영무는 趙暉의 從曾孫이다.
이들의 가문이 한미하였음은, 李成桂가 “趙溫이라는 자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 몸뚱이 하나 뿐이다.…조영무라는 자는 東北面 侍衛軍에서 발탁하여 牌頭로 삼아, 벼슬이 宰相에 이르고 功臣의 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세 사람은 비록 분골쇄신하더라도 어떻게 내 은혜를 갚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데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한양조씨는 북방에서 세력을 키우고 李成桂家와 밀접히 연결되면서 여말선초 거족으로 성장하였다.
15) 崔迤(江陵)
『實錄』의 최이 졸년기사에는 최이가 江陵君 崔有璉의 子로 되어 있으며, 『氏族源流』에는 崔文沃의 子로 되어 있어서 그 선대를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최이가 임종시 “吾家本以州吏 至于今者 以廉謹小心耳 汝等勉之”라고 한 점으로 보아,
吏職을 세습하다 여말선초에 성장한 가문으로 생각된다. 『氏族源流』에 의하면 그 선대가 崔漢柱(宗正卿)—湫(贈典農寺事)—文沃—迤 로 이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16) 崔龍蘇(江華)
최용소의 가계는 『氏族源流』에 1세조 崔益厚 이래 관직자를 배출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崔益厚—孝章—光義—瑾 등이 재상을 역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동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崔瑾이 고종대 上將軍을 역임하고 있음이 『高麗史』에서 찾아질 뿐이다.
또한 『實錄』의 최용소 졸년기사에도 선대에 관한 언급이 없으며, 『勝覽』 강화부 인물조에도 등재되어 있는 자가 없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이 가계는 적어도 재추급 인물을 배출한 가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17) 崔恒(朔寧)
최항의 가계는 『氏族源流』에 의하면 崔善甫(郎將)로부터 忠(供造署丞)—潤文(戶部典書)—士柔(成均司藝)—恒으로 이어진다. 한편, 徐居正이 撰한 최항의 碑銘에는 曾祖 최충과 祖 최윤문이 이름만 기재되어 있으며, 태종대 문과에 급제하고 成均司藝를 역임한 父 최사유만 관직이 기재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최항 가계는 여말선초에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18) 崔有慶·崔士康, 崔府(全州)
전주최씨 崔宰계는 武班으로 진출하였다가 최재의 父 得枰이 충숙왕대 典理判書를 역임하면서 文班家로 발전하였으며, 최재는 충숙왕대 문과에 급제하고 공민왕대 密直副使를 역임하였다.
최재의 子 최유경은 창왕대 同知密直司事에 오른 뒤 조선건국 후 開國原從功臣에 책봉되어 參贊을 역임하였다.
최사강은 최유경의 子이다.
최부는 여말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인물로
『氏族源流』에 그 父가 判慈州事 崔溶으로 되어 있으나, 祖父부터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또한 『實錄』의 최부 졸년기사에 선대에 관한 언급이 없으며, 『勝覽』의 전주부 인물조에도 그 선대로 보이는 자는 없다. 최부가계는 고려중기의 崔陟卿·崔松年·崔均 계열이나, 앞의 최재 계열과는 달리 여말선초에 이르러 진출한 세력이 아닌가 한다.
19) 崔閏德(通川)
최윤덕의 祖 崔祿은 공민왕대 護軍으로 高郵의 싸움에 공을 세웠으며, 父 崔雲海는 그 공으로 관직에 진출하였다. 최운해는 여말 왜구 격퇴에 지대한 공헌을 한 명장으로서, 우왕대 密直副使를 역임하였으며, 威化島回軍 후 原從功臣에 책봉되어 조선건국 후 參判承樞府事에 올랐다.
최윤덕의 가계는 武班으로 여말에 성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20) 卓愼(光州)
탁신은 左諫議大夫 光茂의 子이다.
『氏族源流』에 보면 탁신은 戶長의 후예로, 祖父로부터의 선대들은 贈職·同正職 등을 띠고 있다. 이 가계는 여말에 이르러 중앙에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21) 河崙, 河敬復, 河演(晉州)
하윤은 현종대의 左司郎中 河拱辰의 후예라고 하며, 그 후손인 河湜(膳官署丞)으로부터 河恃源(式目都監錄事)—允潾(順興府使)—崙으로 이어진다.
이 가계는 하윤이 定社·佐命1等功臣에 책봉되면서 거족으로 성장하였다. 하경복은 武將으로, 『氏族源流』에 의하면 하윤의 증조 河湜으로부터 巨源(典客令)—乙浮(判軍器監事)—承海(書雲副正)—敬復으로 이어진다. 이들 중 史書에서 찾아지는 인물은 없으며, 『實錄』의 하경복 졸년기사에도 선대에 관한 언급은 없다. 이 가계도 여말선초에 중앙에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하연의 가계는 하윤의 가계보다 성장시기가 조금 빨랐던 것 같다. 즉 曾祖 河楫이 공민왕대 豊海道按廉使를 역임하고 贊成事로 致仕하였으며, 祖 允源은 우왕대 大司憲을 역임하였다.
고조부와 5대조는 『氏族源流』에 護軍으로 되어 있으나, 史書에서 확인되는 자는 없다.
22) 韓尙敬·韓明澮·韓繼美·韓繼禧·韓確(淸州)
청주한씨는 韓康이 고종대 문과에 급제하고 충렬왕대 知密直司事를 역임하고 贊成事로 致仕하면서 벌족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강의 손자 韓渥은 贊成事를 역임하고 충혜왕초 中贊에 올랐으며, 韓永은 元에서 벼슬하여 河南府摠官을 역임하였다. 한옥의 아들 大淳(知都僉議司事)·公義(淸城君)·仲禮(政堂文學)—方信(贊成事) 또한 모두 재상 등 고위관료를 역임하였다. 한상경·한명회·한계미·한계희는 韓公義의 子인 同知密直司事 韓脩의 子와 孫들이고, 한확은 韓方信의 증손이다.
청주한씨는 원 간섭기에 權門世族으로 성장하여 여말에 이르기까지 재상이 끊이지 않았다.
23) 咸傅霖(江陵)
함부림은 우왕대 문과에 급제하고 開國功臣에 오른 인물로, 그 父는 檢校中樞院學士 咸承慶이다.
이 가계는 『氏族源流』에 함부림부터 기재되어 있으며, 『勝覽』의 강릉부 인물조에도 등재되어 있는 자가 없다. 함부림의 가계는 여말에 이르러 중앙에 진출한 것 같다.
24) 許稠·許誠·許詡(河陽)
하양허씨는 戶長의 후예로, 허조의 墓誌銘에 始祖 許安康으로부터 許得胥까지는 이름만 기재되어 있으며, 허득서의 아들 裕(大將軍)로부터 綏(判典客寺事)—允昌(正郞)—貴龍(開城府尹)—周·稠—誠·詡로 이어지면서 관직자를 배출한 것으로 되어 있다.註 236
『氏族源流』에 허유가 고종 17년生이라고 하므로, 이 가계는 원 간섭기에 중앙에 진출하여, 여말선초에 재추급 인물을 배출하였다고 할 수 있다.
25) 洪應·洪達孫(南陽)
고려전기에 이미 宰相을 배출하고 있는 남양홍씨는 고려후기의 대표적인 權門世族으로 무신집권기 이후 여말에 이르기까지 재상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런 가세는 조선으로까지 이어졌다.
홍달손은 僉議中贊 洪奎의 손자인 門下侍中 洪彦博의 5대손이며, 홍응은 僉議中贊 洪子藩의 아들인 僉議評理 洪順의 5대손이다.註 238
26) 洪允成(懷仁)
홍윤성은 靖難·佐翼·佐理功臣에 책봉되고 領議政에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그 선대의 가세는 한미하였던 것 같다. 『萬姓大同譜』에 의하면 그 선대가 延甫—容—濟斗—允成으로 이어지나 모두 관직기사가 없으며, 『實錄』의 홍윤성 졸년기사에도 그 선대에 관한 언급이 없다.
또한 『勝覽』의 회인현 인물조에도 홍윤성 외에 등재되어 있는 자가 없다. 이 가계는 홍윤성이 世祖를 도와 공신에 봉해지면서 득세한 것으로 보인다.
27) 黃喜·黃致身·黃守身(長水)
황희는 조선초를 대표하는 宰相으로, 황치신과 황수신은 그 아들이다. 장수황씨는 황희의 父 黃君瑞가 判江陵府使를 역임하였을 뿐, 그 祖 均庇와 曾祖 石富(장수황씨 1세조)는 모두 贈職者이다.0
장수황씨는 조선건국 후 황희에 이르러 巨族으로 성장한 가문이라 할 수 있다.
28) 黃居正(昌原)
황거정은 開國·佐命功臣으로, 그 父는 黃愼이다. 황신은 창원황씨의 1세조로 『氏族源流』에 의하면 漢城尹을 지냈다고 하나 『高麗史』 등의 史書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勝覽』의 창원부 인물조에도 그 선대로 등재되어 있는 자가 없다. 황거정 선대의 가세는 미미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29) 黃象(平海)
황상은 黃希碩의 子이다. 황희석은 이성계 휘하의 武將으로 開國功臣에 책봉되었던 인물이다. 『氏族源流』에는 황희석부터 등재되어 있으며, 『實錄』의 황희석 졸년기사에도 그 先系에 대한 기사가 없다. 『勝覽』의 평해군 인물조에도 황희석의 선대로 등재되어 있는 자가 없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황상의 가계는 여말 이성계 휘하에서 성장한 신흥무장세력으로 보인다.
30) 皇甫仁(永川)
영천황보씨는 晉州牧使 皇甫安을 1세조로 하고 있다. 그 아들 皇甫琳은 名將으로 위화도회군후 功臣에 책봉되었으며, 공양왕대 平壤尹을 역임하고註 242
조선건국 후 知中樞院事에 올랐다.
황보인은 그런 황보림의 아들이다. 또한 『勝覽』에도 고려 태조대 金剛將軍 皇甫能長을 제외하고는 등재되어 있는 자가 없다. 황보인의 가계는 武班으로 여말선초에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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