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소개> 『전식(全湜) 선생의 사행시(槎行詩)를 통해 본 사행(槎行) 재조명』

2023. 4. 5. 10:47 인물열전

<신간 소개> 전식(全湜) 선생의 사행시(槎行詩)를 통해 본 사행(槎行) 재조명

 

조선 시대 외교관(성절사)으로 중국()을 해로(海路)로 다녀온 사서 전식(全湜) 선생의 체험시()”

 

 

사서 전식(全湜)선생의 12대손인 전재몽 옥천전씨 판서공파 종회 이사가 2년 동안 정성을 들여서 <전식(全湜)선생의 사행시(槎行詩)를 통해 본 사행(槎行) 재조명> 책을 출간했습니다.

 

사서(沙西) 전식(全湜) 선생은 조선 인조 3(1625) 5, 동지사(冬至使) 겸 성절사(聖節使)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어 조선에서 명()으로 해로(海路)를 이용 사행(使行)을 다녀왔으며, 이 사행의 기록으로 사행록(槎行錄)”을 남겼다. 사행 기록은 현재 두 가지 판본이 존재하는데 첫째는 목활자본 사서선생문집 판본이고, 둘째는 필사본인 사서항해조천일록(沙西航海朝天日錄)”이다. 그리고 사행할 때의 체험을 담은 시()와 사행을 가기 전 문인들이 시로 전송한 송별시가 사서선생문집(沙西先生文集)에 따로 수록되어 있다.

 

 

 

편저자(編著者)는 사서 선생의 시()가 사서선생문집에 등재되어 있는데 사행록(槎行錄)의 날짜별 기록을 근거로 구체적으로 어떤 경로를 통해서 다녀왔는지 지도에 상세하게 표현하여 그 당시를 복기하여 시를 감상하고 싶었습니다. 이를 정리하여 전식(全湜) 선생의 사행시(槎行詩)를 통해 본 사행(槎行) 재조명을 발간(發刊)하였습니다.

 

사서 선생의 나라를 위하는 충정(衷情)을 후손(後孫)들에게 교육할 교재가 될 수 있으므로 일독(一讀)을 권()합니다.

 

 

 

편저자의 들어가며 내용 일부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사서 전식(全湜)선생의 사행록 1625 8 3일 배표한 일로부터 사행선 4척이 출발하여 1626 4 15일 선사포(宣沙浦, 旋槎浦로 개명)에 마지막으로 4()이 도착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사서 전식(全湜)선생의 사행은 종전의 일반적인 사행선과 달리 정사(正使)와 서장관(書狀官)으로만 구성하였기에 4척의 배를 이용하였는데, 1선에는 정사(正使) 사서 전식(全湜)선생이, 2선에는 서장관 이목(李莯), 3선과 4선에는 역관들과 군관들이 타고 있었으며, 승선 인원은 1척의 배에 40명씩 총 160명 정도라고 하였다.

사서 선생의 사행은 많은 사고가 있었다. 가는 길에 일행 중 1명이 급사(急死)하였고, 풍랑을 만나 간신히 배를 정박하였으며,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제3선이 침몰당하는 안타까운 일도 발생하였다.

항해 중에 홀연 심한 풍파로 닻이 부러지는 등 배가 위험해져 모두 정신을 잃었으나 홀로 배 위에 안연(晏然)히 앉아 시()를 읊는 등 역경과 고난을 물리치고 무사히 도착하니 모두가 신조(神助)라 여기고, 중국 조정에서는 유덕재상(有德宰相)이라 칭송하였다.

현재까지 사서 전식(全湜)선생의 사행록에 나와 있는 송시와 사행 체험시의 번역내용은 전씨관면록(1960) 전식(全湜)의 사행록과 해로 사행의 체험시 조창록(2011), 국역 전식(全湜) 사행록 홍호 조천일기 김영문(2021)등에 일부가 실려 있다. 이에, 본 고에서는 사서 전식(全湜) 선생이 남긴 사행록을 기준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오고 갈 때의 사행 노정을 지도상에 표기하여 이해를 돕고, 사서 전식(全湜) 선생이 명나라에 사행 가기 전 선생이 교유하던 문인들이 사행길을 전송한 송시(送詩) 24제와 송서(送序)인 봉송시(奉送詩) 3, 사서 전식(全湜)선생이 사행을 하면서 체험한 시()  29 34수에 대해, 일부 미번역된 것은 번역을 완료한 뒤, 전체 번역내용을 정리하여 당시 문인들이 쓴 송시의 내용과 사서 선생이 사행(槎行) 중 지은 시의 내용을 통해 사행(槎行) 당시 사서 선생의 심정을 헤아려보고자 한다. 또한 금번 편집을 하면서 이해를 돕기 위해 각 시()마다 주석을 추가로 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