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澗松) 전형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 미술삼가(美術三家)

2008. 8. 10. 07:08 인물열전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간송(澗松)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구한말에서부터 해방 무렵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3대 부자를 꼽는다면 화신백화점을 가지고 있던 박흥식, 광산을 해서 큰돈을 벌었던 백 부잣집,

 그리고 간송(澗松)전형필(全鎣弼·1906~1962) 집안이다.   간송 집안은 윗대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무반(武班) 집안이었지만, 구한말에는 상업에 뛰어들어 서울의 종로 4가, 즉 배오개 일대의 상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왕십리, 답십리, 청량리, 송파 가락동, 창동 일대뿐만 아니라 황해도 연안, 충청도 공주·서산 등지에까지 수만 석의 전답을 보유할 정도였다.

  이처럼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간송은 1938년에 성북동 97번지에다가 보화각이라는 개인박물관을 짓고 일제 치하에서 일본인 수장가들에게 흘러 들어가고 있던 민족 문화재들을 수집하여 보관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고서, 그림, 도자기와 같은 우리 문화재들을 구입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물건값을 절대로 깎지 않았기 때문에 중개상들은 귀중한 물건들을 간송에게 제일 먼저 가지고 왔다.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심사정(沈師正)의 ‘촉잔도권’(蜀棧圖卷)은 당시 서울의 큰 기와집 5채 값을 지불하고 구입한 그림이다.

  이 ‘촉잔도권’을 수리하기 위해서 일본 교토의 전문가에게 간송이 지불한 비용은 기와집 6채 값이었다. 간송은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농사도 잘 지었다.

  미술사의 대가들인 최순우, 김원용, 황수영, 진홍섭, 정영호가 다 간송 문하를 출입하면서 그의 후원을 받은 후학들이다.

  최순우(1916 ~1984)는 원래 본명이 최희순(崔熙淳)이었는데, 간송이 순우(淳雨)라고 지어주었다. ‘우’()자는 간송의 아들 항렬이 쓰는 글자이다. 아들같이 생각하고 지어주었던 것이다.

  1961년에 최순우가 한국의 국보급 문화재를 구라파에 전시하기 위해서 김포공항에 가던 길이었다. 택시 안에서 최순우의 낡은 손목시계를 본 간송은 “우리국보를 보여주러 가는 책임자가 이런 낡은 시계를 차면 체통이 안 선다”하면서, 자신의 ‘론진’ 손목시계를 그 자리에서 풀어 채워주었다.

  최순우는 살아생전에 이 일화를 주변사람들에게 여러 번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마지막 서울 부자의 품격을 대표하는 집안이 간송 집안이고, ‘간송미술관’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원문출처 : [조용헌 살롱]

♡미술삼가(美術三家

  노론(老論)이 200년 장기집권에 들어가기 시작하는 17세기 말엽부터 남인(南人)은 춥고 배고픈 야당이 되었다.

  남인 중에서도 영남남인(嶺南南人)들은 완전히 끈 떨어진 신세가 되었다. 춥고 배고팠던 영남남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은 도산서원이었다.

  퇴계학이 그 굶주림과 외로움을 극복하게 하였다.

  사정이 조금 나았던 기호남인(畿湖南人)들이 모였던 살롱은 해남의 고산(孤山) 윤선도 저택인 녹우당(綠雨堂)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녹우당은 500년 동안 호남의 알아주는 부잣집이었다. 손님대접이 후했다. 몇 달 동안의 숙식제공은 물론이거니와 돌아가는 손님들에게 노잣돈도 두툼하게 지급할 정도로 재력이 있었다.

  이 녹우당에서 기호남인의 예술혼이 꽃피었다. 재력도 있고, 벼슬길은 봉쇄당한 상태이고, 재능은 있었던 사람이 갈 길은 예업(藝業)이었던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해남윤씨 집안에서 배출한 문인화가인 윤두서(1668~1715)와 윤용(1708~1740)은 오늘날 호남을 예향(藝鄕)으로 부르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아니다.

  남종화의 대가인 허소치(許小痴)도 녹우당의 영향권 내에 있었으므로, 허소치의 맥인 목포의 ‘남농미술관’과 광주 ‘의재미술관’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녹우당에 당도하게 되어 있다.     우리나라 집안 가운데서 근래에 녹우당의 미술사적 위치에 필적할 만한 집안이 서울 성북동의 간송(澗松) 전형필 집안이다.

  구한말에 장사로 번 10만석 재산을 모두 우리 미술품 구입에 아낌없이 썼다. 일제 강점기에 뭘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황해도의 금싸라기 전답을 팔아 쓸데없는 사기대접을 산다’는 비아냥을 들었던 간송이다. 간송이 없었더라면 이 미술품들은 대부분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을 것이다.

  현재의 간송미술관은 바로 그 간송 집안이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라고 생각된다.

  녹우당과 간송 집안 다음으로 미술품 수집에 많은 투자를 한 집안이 삼성가(三星家)로 알고 있다.

  호암 이병철도 고미술품에 특별한 안목이 있었고, 그 며느리인 홍라희 대에 이르러 세계적 수준의 미술관인 ‘리움’이 한남동에 들어섰다.

   이제 리움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남았다. 어떻게 하면 녹우당과 간송 집안처럼 존경 받을 수 있을 것인가?

  


--------------------

♡간송 전형필

   정선(旌善)전씨 47세손이며, 호는 간송(澗松)으로, 서울 출생이다.

  1926년 휘문(徽文)고보를 거쳐 1929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오세창(吳世昌)의 지도로 민족문화재를 수집하는 데 힘쓰는 한편,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지원·경영하며 문화재가 일본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1940년 경영난에 빠진 보성(普成)고보를 인수하여 교주(校主)가 되었으며, 1945년 광복이 되자 보성중학교 교장직을 1년간 맡았다.

  1954년 문화재 보존위원이 되고, 1956년 교육공로자로 표창을 받았다.

  수집한 문화재는 그의 개인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현 간송미술관)에 보존하였는데, 수집품 중에는 1942년 일본인 몰래 안동에서 거금 2,000원을 주고 구입한 《훈민정음(訓民正音)》 원본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서적·고서화·석조물·자기 등이 있으며, 10여 점 이상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1962년 문화포장, 1964년 문화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