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충렬공 전이갑장군 유허비 해문(도남재 이충사유허비)

2012. 1. 21. 18:28 인물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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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남재 [道南齎]

대구광역시 북구 도남동 88번지에 있는 재실.

본문

1910년에 건립되었다. 정선전씨 후손 우헌공께서 고려개국공신 충렬공(忠烈公) 전이갑(全以甲)과 충강공(忠康公) 전의갑(全義甲)의 고려 때의 행적을 기리고자 1800년을 전후해 세워졌으나 1910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재실은 일자형 3칸 홑치마 형태를 하고 있다.

[출처] 도남재 [道南齎 ] | 네이버 백과사전

 

충렬공 전이갑장군 유허비 해문(도남재 이충사유허비) 

 

 

□이충비문(二忠碑文)


  칠주(漆州)의 동쪽이고 도남(道洞)의 남쪽에 규수(圭首)1)가 환연(煥然)2)한 비(碑)이니, 비를 추적해보니 이충사(二忠祠)의 유허지(遺墟地)이다. 지난 고려조에 도원선생(桃源先生) 충렬공(忠烈公)이 있으니, 성(姓)은 전(全)이고 휘(諱)는 이갑(以甲)이며 자(字)는 자경(子經)이니, 아우 충강공(忠康公) 휘(諱) 의갑(義甲)으로 더불어 고려의 태조를 도와서 삼한(三韓)을 통합한 개국공신이고 관직은 태사(太師)이다.

  

  견훤(甄萱)3)의 난리에 동수(桐藪)에서 힘써서 싸우다가 형제가 함께 순절(殉節)했으니, 곧 당시 순절한 팔공(八公) 중의 두 사람이다. 난리가 진정(鎭定)됨에 미쳐서 태조께서 심히 그들을 애석하게 여겨서 정선군(旌善君)과 죽산군(竹山君)에 추봉(追封)하고 충렬(忠烈)과 충강(忠康)이라고 증시(贈諡)하였으며, 충렬사(忠烈祠)에 합향(合享)하였다가 태조조(太祖朝)에 이르러 숭의전(崇義殿)에 이봉(移奉)하였으니, 이는 이공(二公)에게 표충(表忠)한 대략이다.

  

  삼가 공의 상대를 상고하면, 시조는 환성군(歡城君)인 휘(諱) 섭(聶)이고, 재전(再傳)하여 휘(諱) 반(槃)은 한(漢)나라에 들어가서 홍농후(弘農侯)가 되었고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며, 휘(諱) 순성(舜成)은 태부(太傅)로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고, 휘(諱) 여균(汝均)은 상서(尙書)로 시호(諡號)는 문헌(文憲)이며, 휘(諱) 운교(雲喬)는 상서(尙書)로 시(諡)는 충달(忠達)이고, 휘(諱) 원근(元根)은 상서(尙書)로 시(諡)는 무절(武節)이다. 이상의 4대는 중화(中華)에 살면서 명위(名位)가 성대하였으며, 휘(諱) 선(愃)에 이르러서 공주(公主)를 모시고 조선(朝鮮)에 넘어와서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졌으니, 이분이 공의 8대조가 되고, 이에 정선(旌善)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후손(後孫)이 되는 9)찬의(贊儀)인 휘(諱) 민련(敏連)은 아호(雅號)가 우헌(寓軒)이니, 정선(旌善)에서 성주(星州) 팔거(八莒)의 국우리(國優里) 도덕산(道德山) 아래로 이거(移居)하였으니, 곧 팔공산(八公山)의 남은 기슭이고 동수(桐藪)의 옛적 싸움터와 가까운 곳이다. 이공(二公)의 순충(殉忠)을 추모하여 읊은 시(詩)가 있으니,

 

八公今安在 /팔공(八公)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

山靜白雲悠 /산은 고요한데 흰 구름만 두둥실 떠가네.

知是二公蹟 /여기에 이공(二公)의 자취 있음을 아니

文嚴自千秋 /글은 천추(千秋)가 되도록 엄정하다네.

  의 구절이다.

 

 아! 이공(二公)의 충절(忠節)은 반드시 동사(東史)에 빛날 것이로되, 그러나 의이(衣履)를 보존한 것 같음에 이르면 증거는 없어지고 전하는 것도 잃었으니, 어찌 후손된 자가 통한(痛恨)하지 않으랴!

 

   우헌공(寓軒公)이 아들 거옹(莒翁) 사헌(士憲)에게 명하여 한강 정구선생(寒岡鄭先生)4)께 예로 물은 까닭은 향도(鄕道)의 사림(士林)으로 더불어 서원(書院)을 침실(寢室)의 동쪽에 지으라는 것이었고, 여헌 장선생(旅軒張先生)5)이 그 편액에 제(題)하기를,

“이공(二公)을 춘추로 제사를 올리는 의례(儀禮)를 정하여 행하였다.”

  고 하였는데, 난리를 만나서 폐사(廢祠)함에 이르렀다. 거옹(莒翁)이 다시 하나의 집을 폐사(廢祠)가 된 그 앞에 지었으니, 이를 일러 도남재(道南齋)라 하는 것이고, 그리고 자손들이 이곳에 산지가 거의 100여년에 이른다. 후손(後孫)은 적요(寂寥)하고 가문에 전하는 문헌은 기(杞)나라와 송(宋)나라6)처럼 증험할 수가 없으니, 이를 더욱 개탄할 뿐이다.

 

  이에 일문(一門)이 모두 모여서 선사(先祠)가 폐허됨을 통한이 여기고 선대의 미덕이 없어짐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곧 그곳에 나가서 조속히 비(碑)를 세우기로 발의하고, 후손인 익동(益東)이 나에게 기사(記事)를 쓸 것을 부탁하였으니, 나를 돌아보면 졸렬하고 어눌하여 진실로 부탁을 받을 수 없지만, 다만 당일의 장한 행적의 높음을 생각하거니, 어찌 승국(勝國, 전대의 왕조)이 옛적에 있었던 것을 어찌 내세에 충성함 권함을 생각하지 않으랴! 이에 명(銘)을 한다.

 

粤在勝國 /승국(勝國)에 있으니

卓乎二公 /이공(二公)보다 높으랴!

萱禍滔天 /견훤의 병화(兵禍)가 천지를 덮었는데

桐藪勁風 /동수(桐藪)에 거센 바람 불었다네

是兄是弟 /이 형과 이 동생이

維義維忠 /오직 의롭고 오직 충성했네.

千古扶綱 /천고(千古)의 벼리를 붙잡아서

一體殉功 /일체가 되어서 순절한 공 있도다.

煒煌封諡 /빛을 발하여 봉군(封君)에 증시(贈諡)하였으니

褒恩嶽崧 /포상한 은혜 높고 높도다.

聖朝移享 /성조(聖朝)를 옮겨서도 제향(祭享)했으니

曠世猶崇 /시대는 달라도 오히려 높였다네.

收議嶺士 /영사(嶺士)의 의견을 수렴하여

問禮岡翁 /예를 한강(寒岡)에게 물었다네.

道德山深 /도덕산은 깊고 깊어서

毓靈蟠雄 /영험을 기르고 웅장하게 서리었네.

建祠揭扁 /사당을 세우고 편액을 거니

寢室之東 /침실(寢室)의 동쪽이라.

春秋是儀 /춘추(春秋)에 올리는 이 의례

俎豆其豊 /제사가 그렇게 풍성하였네.

浩刧滄桑 /창상(滄桑)7)의 기나긴 세월에

舊墟蒿蓬 /구지(舊址)는 쑥대밭이네

羹墻無地 /일정한 장소 없이 갱장(羹墻)8)하면서

雲孫茹恫 /자손들 슬퍼한다네.

載謀樹碑 /이에 비(碑) 세울 것을 꾀하니

四尺穹窿 /사척(四尺)이 높이 솟았네.

聳動觀瞻 /몸을 솟구쳐서 보고 보니

激起彛裏 /이윤(彛倫)을 격동하고 일으킴이라.

丹篆大蚪 /붉은 전서(篆書)는 큰 과두서(蝌蚪書)인데

碧血雙虹 /푸르고 붉은 쌍무지개라네

不轉不泐 /돌을 옮겨 새기지 않을 수 없으니

昭揭無窮 /영원히 밝히 건 것이네.

 

종사랑(從仕郞) 전장릉참봉(前章陵參奉) 진성(眞城) 이충호(李忠鎬)는 삼가 찬(撰)하고

유학(幼學) 사량 최종응(沙梁  崔鍾應)은 삼가 썼다.


○二忠碑文


漆州之東 道洞之南 煥然圭首而碑 碑蹟 二忠祠遺墟也 越在高麗 桃源先生忠烈公 姓全 諱以甲 字子經 與弟忠康公諱義甲 佐麗太祖統合三韓開國功臣 官太師 甄萱之亂 力戰桐藪 兄弟幷殉 卽當時殉節八公之二耳 及亂定 太祖甚悼之 追封旌善君竹山君 贈諡忠烈忠康 合享于忠烈祠 至太祖朝 移奉崇義殿 此二公表忠之大槪也 謹按公始祖歡城君諱聶 再傳諱槃 入漢爲弘農侯 諡文忠 諱舜成 太傅諡文正 諱汝均 尙書諡文憲 諱雲喬 尙書諡忠達 諱元根 尙書諡武節 以上四世 因居中華 名位燀爀 至諱愃 陪公主東渡朝鮮 封旌善君 寔於公八代祖 而仍貫旌善 爲後孫贊儀 諱敏連 號寓軒 自旌善移居星州八莒國優里道德山下 卽八公山餘麓 而桐之古戰墟密邇地也 追感二祖殉忠 有詩 八公今安在 山靜白雲悠 知是二公蹟 文嚴自千秋之句 於乎二公忠節 必有焜耀於東史 而至若衣履之藏 沒證失傳 豈非雲仍之痛恨乎 所以寓軒公 命子莒翁士憲 問禮於寒岡鄭先生 與鄕道士林 建祠于寢室之東 旅軒張先生題其額曰 二忠定行 春秋俎豆之儀 遭亂遂廢 莒翁更搆一堂 祠墟之前 此謂道南齋 而子孫仍居於是 于今幾百有餘載矣 後昆寂寥 家傳文獻 杞宋無徵 是尤可慨也已 於是一門齊會 痛先祠之邱墟 懼遺徽之響 況遂卽其地 亟發竪碑之論 而後孫益東 囑不佞以記事 自顧拙訥固不敢寄 第念當日壯蹟卓犖 豈以勝國之曠古 盍思勸忠於來世也哉 是爲之銘 銘曰 粤在勝國 卓乎二公 萱禍滔天 桐藪勁風 是兄是弟 維義維忠 千古扶綱 一體殉功 煒煌封諡 褒恩嶽崧 聖朝移享 曠世猶崇 收議嶺士 問禮岡翁 道德山深 毓靈蟠雄 建祠揭扁 寢室之東 春秋是儀 俎豆其豊 浩刧滄桑 舊墟蒿蓬 羹墻無地 雲孫茹恫 載謀樹碑 四尺穹窿 聳動觀瞻 激起彛裏 丹篆大蚪 碧血雙虹 不轉不泐 昭揭無窮

 

從仕郞前章陵參奉 眞城李忠鎬 謹撰

 幼學 沙梁 崔鍾應 謹書


[解文] 하담 전규호



1) 규수(圭首): 홀 같은 비(碑)의 머리 부분을 말한다.

2) 환연(煥然): 눈부신 모양. 영예로운 모양. 

3) 견훤(甄萱): 후백제의 시조(?~936). 본성은 이(李 ). 신라의 비장(裨將)으로 있다가 효공왕 4년(900)에 완산에 도읍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929년 고창(古昌)에서 왕건의 군사에게 크게 패한 뒤 차츰 형세가 기울자 936년에 고려에 항복하였다. 

4) 정구(鄭逑): 조선 중기 문신 겸 학자로서, 경학을 비롯하여 산수부터 풍수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도 뛰어났다. 문집으로 《한강집(寒岡集)》이 있다. 

5) 장여헌(張旅軒): 조선 시대의 학자(1554~1637).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학문 연구에만 전심하였다. 덕(德)은 도(道)의 지선(至善)이라 하였다. 저서에 《여헌문집》, 《역학도설》, 《성리설》 따위가 있다. 

6) 기(杞)나라와 송(宋)나라: 기(杞)는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의 주왕(紂王)을 멸한 뒤에 하우(夏禹)의 후손 동루공(東樓公)을 봉하여 하우의 제사를 받들게 한 나라이고, 송(宋)은 주 무왕이 은(殷)의 주왕을 멸한 뒤에 성탕(成湯)의 후손 미자(微子)를 봉한 나라임. 공자(孔子)가, 하(夏) 나라와 은(殷) 나라의 예제(禮制)를 고증하려 하나 기와 송의 문헌(文獻)이 없어서 고증할 수 없음을 한탄하였음.《論語 八佾》 

7) 창상(滄桑): 창해상전(滄海桑田)의 준말이다. 큰 바다가 농토로 변하고 농토가 큰바다로 변한다는 뜻으로 세상사의 변화가 매우 큰 것을 비유한 것이다. 

8) 갱장(羹墻): 사람을 심히 그리워한다는 뜻. 옛날 순(舜) 임금은 앉아서는 요(堯) 임금을 담장에서 보았고, 식사할 때는 국에서 보았다고 한다[坐則見堯於墻食則覩堯於羹].

9)찬의 ( 贊儀 )

① 조선시대 통례원(通禮院)에 두었던 정오품(正五品) 관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1466년(세조 12) 1월 관제 개정 때 판관(判官)을 찬의로 개칭한 것이다. 대전(大殿) 조의(朝議) 때에는 전의(典儀)라 칭하였다.

② 대한제국(大韓帝國) 때인 1897년(광무 1)에 설치한 궁내부(宮內府) 장예원(掌禮院)의 주임관(奏任官)이다

참고문헌: 대전회통(大典會通)


 

출처 : 전씨(全氏) 광장
글쓴이 : 전 정구 [두발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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