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3. 14:13ㆍ 인물열전
독립유공자 공훈록[ 전좌한 ]
성명 전좌한
생존기간 미상 ~ 미상
출생지 충북 옥천
운동계열 창의단
훈격(연도) 독립장 (63)
공적내용
충북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12월 비밀단체 경성상업실업단(京城商業實業團)으로부터 그의 조부인 전흥규(全興奎)에게 '명령'이라는 제목의 '대한민국임시정부군정서'명의의 납세불납 문서가 도착하자, 그는 동지 임선재(任善哉)와 함께 동 문서를 인쇄하여 배포, 게시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1921년 2월 9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았으며, 1921년 3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심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는 같은 고향의 김응선(金應先)과 같이 계속 독립운동을 할 것을 의논하던 중 창의단원(倡義團員)이라는 계의산(桂義山)을 만나 총독부, 시청, 신궁 및 종로서 등에 폭탄을 투척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포고문을 살포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전좌한과 김응선은 고향에서 폭탄 6개를 만들어 1925년 음력 9월초에 그중 1개를 옥천과 금산군의 경계에 있는 진위산중(鎭威山中)에서 실험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같은 마을의 김운용(金云用)·정명옥(鄭明玉)·송암우(宋岩于) 등에게 서울구경을 시켜준다는 구실로 이들을 동 거사에 가담시켰다.
1926년 1월 30일 계의산이 상경할 여비를 송금하여 옴에 따라 이들은 다음날 서울에 올라와 중국음식점 광흥원(光興園)에서 계의산을 만나 구체적인 거사계획을 들었다.
그러나 이들이 숙소인 청진동의 진일여관(進一旅?)에 돌아오자 바로 일경에게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이들과 행동을 같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체포되지 않고, 만주로 도피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기록은 없다.
만주에서는 1926년 음력 4월 초순경에 길림성 중동철도연선 이도하자(二道河子)에 있는 유해강(柳海崗)의 집에서 남 정(南正)·이응서(李應瑞) 등과 함께 비밀결사 조선혁명군대본영(朝鮮革命軍大本營)을 조직하고 4∼50명의 단원을 확보하여 군자금 모집, 경고문 인쇄, 배부 및 일제 주요기관을 파괴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하여 1926년 10월 1일 경복궁으로 옮겨 지은 총독부 신청사의 낙성식을 기하여 주요기관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고, 그는 선발대가 되어 김봉준(金鳳俊)과 함께 권총과 탄환 및 각종 문서를 서울로 가지고 들어왔다.
그러나 동년 9월 22일 그의 매부인 신화수(申華秀) 및 이일화(李一化)등과 함께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1927년 8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 3월 26일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註·판결문(1927. 8. 31 경성지방법원) ·기려수필 350·351·352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0권 822·823면 ·동아일보(1927. 6. 21, 7. 10, 8. 12, 8. 13, 8. 23, 8. 27, 9. 1)
[출처]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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