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의 삶을 두루 넉넉하게

2015. 12. 29. 10:13게시판




백성들의 삶을 두루 넉넉하게

[번역문]

  정릉 직장(靖陵直長) 신사준(愼師浚)이 써서 올린 소회(所懷)이다.
  “첫째, 토지 제도를 새로 정하여 백성들의 삶을 넉넉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신이 들으니, 『서경(書經)』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하였습니다. 근본을 튼튼하게 하는 방도는 백성들의 삶을 넉넉하게 해 주는 데 있고, 백성들을 넉넉하게 해 주는 방도는 토지 제도를 새로 정하는 데 있습니다.
  토지 제도에 한정이 없어 백성들의 생업이 고르지 못하다 보니 가난한 자는 기근과 추위에 지쳐 선(善)을 행할 겨를이 없고 부유한 자는 재물에 뜻을 빼앗겨 선을 행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전(私田)은 이미 오랫동안 이어져서 그 폐단을 갑작스레 고치기 어려우니, 토지를 구분하여 등급을 나누고 재해 입은 정도에 따라 부세(賦稅)를 조정하되 모두 지금의 제도를 그대로 따르면서 약간의 제한만 두어 겸병(兼竝)을 억제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부자는 엄청난 땅을 소유하고 있지만, 빈자는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습니다. 그래서 빈자는 부자의 땅을 빌려 농사짓는데, 온몸이 땀범벅에 흙범벅이 되면서 일 년 내내 부지런히 일해도 추수 때가 되면 부자는 가만히 앉아 수확의 반을 거두어가고 고생한 빈자는 겨우 그 반을 얻게 됩니다. 이 때문에 부익부 빈익빈이 빚어지니 제한을 두어 겸병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가난한 백성을 끝내 구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원문]

靖陵直長愼師浚書陳所懷曰: “…… 其一曰, 定田制以裕民。臣聞書曰‘民惟邦本, 本固邦寧。’ 蓋 固本之道, 在於裕民; 裕民之道, 在於定田制。…… 田無限制, 民業不均, 貧者困於飢寒而不暇爲善, 富者以財損志而不肯爲善。…… 私田之弊, 行之已久, 亦難猝革, 則無寧別土地而上下其等, 隨災穰而增減其賦, 悉因今制而略爲限節, 以抑兼竝, 庶乎其可矣。…… 我國之人, 富者田連阡陌, 貧者地無立錐。故貧人佃作富人之田, 沾體塗足, 終歲勤勞, 而及其秋成, 富人坐收一半之利, 貧人作苦者僅得其半。此所以富益富而貧益貧, 若不爲限節, 以抑兼竝, 則貧民終無可救之道矣。……”

 
- 『승정원일기』 정조 20년(1796) 3월 7일

 

  
  신사준은 전라도 영암(靈巖)의 성리학자로서 장흥(長興)의 위백규(魏伯珪) 등과 함께 실학적 경세론을 폈던 인물이다. 그는 학덕(學德) 높은 인물로 천거 받아 정조 16년에 휘릉 참봉(徽陵參奉), 19년에 정릉 직장이 된 뒤 부름을 받고 올라와 정조를 만난 바 있었다. 그리고 이때 향당(鄕黨)의 여론을 글로 써서 올리라는 명을 받고 소회로 10조항을 써서 올렸다.

  토지 제도를 새로 정하여 백성들의 삶을 넉넉하게 해 주고, 재용(財用)을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양역(良役)을 고르게 부과하여 쇠잔한 백성을 소생시키고, 수령을 잘 골라 은혜로운 교화를 펴고, 교화를 돈독히 하여 풍속을 장려하고, 과거(科擧)의 폐단을 없애 선비의 습속을 바로잡고, 학교를 정비하여 인재를 잘 기르고, 정도(正道)를 높여 사설(邪說)을 금지하고, 관원의 선발을 신중히 하여 벼슬길을 맑게 하고, 간쟁을 받아들여 언로(言路)를 열 것을 청한 내용이었다.

  윗글은 이 중 토지 제도의 개혁과 관련하여 부자들의 토지 겸병 문제를 지적한 부분이다. 신사준은 토지란 백성들 삶의 원천이자 국가 재정 운영의 근간임을 학문과 체험을 통해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에 이 문제를 첫 번째로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어서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다. 땅 주인이 소출의 반 이상을 가져가는 현실을 개혁하여, 공세(公稅)로 소출의 10분의 1을 내고 땅 주인은 10분의 2 내지 3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소작민이 가져가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부자는 계속 부자로 살 수 있고 소작민도 충분히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어서 빈부에 조금이라도 균형을 잡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나아가 스스로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사대부는 5결(結), 일반 백성은 3결로 한정하고 나머지는 무조건 가난한 친족이나 이웃에 소작을 놓도록 하면 부의 집중으로 인한 토지 겸병의 심화를 늦출 수 있는 차선책이자 최우선 방책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 여유 있는 자의 것을 취해 부족한 자에게 분배해 주현(州縣)의 빈부가 현격하게 차이 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는 주자(朱子)의 말과 부자의 토지를 건드리는 것이 어렵지만 시행되면 많은 사람이 기뻐하게 된다는 장재(張載)의 말을 인용해 자신의 논거로 삼았다.

  이에 대해 정조는, 일리 있는 말이니 유념하겠으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기강(紀綱)이 서지 않은 데 있다는 비답을 내렸다. 당초 정조는 서울과 인근의 유생들이 서학(西學)과 북학(北學)에 경도된 경향을 타개하고자 성리학을 정학(正學)으로 수호하고 있는 지방 유생층을 끌어안기 위해 신사준 같은 인물들을 등용하였고 그들의 의견을 수렴한 터였다.

  결국 정조의 초점은 정학에 있었는데, 신사준은 경제 정책의 문제를 제기하였으니 비답을 내리기 어려웠을 듯하다. 더구나 간절한 바람을 담은 의견이긴 해도 정책으로 실현하기 쉽지 않은 개혁의 방향이었으니 의례적인 비답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물론 이후 어떠한 정책적 변화도 없었다. 그리고 조선이 어떤 역사의 길로 나갔는지는 모두 아는 일이다.

  부자는 토지의 겸병으로 끊임없이 부를 늘려 가고, 빈자는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었던 사회. 한 우활한 선비의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200년도 더 지난 오늘날의 우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신사준이 제시한 개혁안의 현실성 여부를 떠나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소득과 분배의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글쓴이 : 김경희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주요 역서
      - 『현종실록』, 『정조실록』
      - 고종대 『승정원일기』
      - 정조대 『일성록』
      - 『국조보감』, 『임하필기』, 『홍재전서』, 『명의록』 외 다수의 번역에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