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 3. 10:20ㆍ 인물열전
인조 5년 정묘(1627, 천계7)
5월 10일(을해) 맑음
05-05-10[04] 정언 오달승에 대한 처치를 잘못하였으므로 체차해 주기를 청하는 대사간 전식의 계
대사간 전식(全湜)이 아뢰기를,
“어제 정언 오달승(吳達升)을 처치(處置)할 때에 신의 생각에는 ‘시강원에 해당 담당 관원이 없는 데다가 오달승은 입직했던 관원도 아니다. 더구나 다섯 바리의 서책은 결코 배 5척에 실을 분량이 아니니, 찰추(察推)를 받을 이치가 없다.’라고 여겨져 상의하여 출사(出仕)시키기를 계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오달승이 재차 피혐한 말을 보건대, 처치가 마땅함을 잃은 잘못은 실로 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감히 그대로 직임을 차지한 채 다시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직임을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인조 5년 정묘(1627, 천계7)
5월 10일(을해) 맑음
05-05-10[06] 정언 이성원 등이 물러나 물론을 기다리고 있다는 윤이지의 계
윤이지가 아뢰기를,
“정언 이성원(李性源), 대사간 전식, 헌납 이소한이 재차 아뢰는 것은 번거롭게 해 드리는 일이므로 물러나 물론을 기다리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인조 5년 정묘(1627, 천계7)
12월 4일(정유) 맑음
05-12-04[04] 정사가 있었다
정사가 있었다. 이조 참의에 전식(全湜)을, 승지에 조찬한(趙纘韓)을, 판윤에 김자점(金自點)을,면천 군수(沔川郡守)에 유대일(兪大逸)을, 이천 부사(伊川府使)에 홍명구(洪命耈)를 차하하였다.철원 부사(鐵原府使) 이의전(李義傳)과 이천 부사(利川府使) 신해(申垓)를 서로 바꾸었다. 호조 좌랑에 김효성(金孝誠)을, 지춘추관사에 이홍주(李弘冑)와 김상헌(金尙憲)을, 예조 참의에 정백창(鄭百昌)을, 곽산 군수(郭山郡守)에 최유길(崔惟吉)을, 가산 군수(嘉山郡守)에 서우신(徐佑申)을, 직강(直講)에 권도(權濤)를 차하하였다.
인조 7년 기사(1629, 숭정2)
7월 16일(기해) 흐림
07-07-16[16] 이비의 관원 현황
이비에, 겸판서 김상용(金尙容)은 병이고, 참판 오백령(吳百齡)은 나왔고, 참의 이경여(李敬輿)는 나왔고, 좌부승지 윤지경은 나왔다.
이홍주(李弘冑)를 겸지춘추관사로, 남이공(南以恭)을 겸동지의금부사로, 홍서봉(洪瑞鳳)을 정헌대부(正憲大夫) 행 사헌부대사헌 겸 지의금부춘추관사 동지경연사 익녕군(益寧君)으로, 박정(朴炡)을 지제교(知製敎)로, 정백령(鄭百齡)을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지 지제교로, 목장흠(睦長欽)을 통정대부 장례원판결사 지제교로, 전식(全湜)을 통정대부 사간원대사간 지제교로, 김광욱(金光煜)을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 지제교 겸 사헌부장령으로, 김반(金槃)을 통훈대부 행 의정부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 세자시강원보덕 교서관교리로, 김광현(金光炫)을 통훈대부 행 홍문관응교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세자시강원필선으로, 조경(趙絅)을 중직대부(中直大夫) 행 홍문관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 사헌부지평으로, 유수증(兪守曾)을 통훈대부 행 성균관직강 겸 사헌부지평으로, 홍척(洪䨥)을 통정대부 행 성균관 직강으로, 신계영(辛啓榮)을 통훈대부 - 2자 원문 빠짐 - 수찬 지제교 겸 경연 - 4, 5행 원문 빠짐 - 으로 삼았다.
병비에, 겸판서 이귀(李貴)는 주강(晝講)에 입시하였고, 참판은 아직 차임되지 않았고, 참의 이목(李楘)은 나왔고, 참지 정백령(鄭百齡)은 아직 숙배하지 않았고, 좌부승지 윤지경은 나왔다.
이홍주(李弘冑)를 정헌대부(正憲大夫) 행 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으로, 박정(朴炡)을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으로, 송석조(宋碩祚)를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사직(行龍驤衛副司直)으로, 이존여(李存輿)를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사직으로 삼았다.
인조 7년 기사(1629, 숭정2)
7월 18일(신축) 맑음
07-07-18[02] 배표 대례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체차해 주기를 청하는 대사간 전식의 계
대사간 전식(全湜)이 아뢰기를,
“신이 8일의 배표대례(拜表大禮)에 서증(暑症)을 심하게 앓아 나아가 참여하지 못하였으므로 현재 응추(應推) 중에 있으니 외람되이 언관(言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신을 체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인조 8년 경오(1630, 숭정3)
1월 28일(무신) 맑음
08-01-28[11] 이비가 정광성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비가 정광성(鄭廣成)을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로, 전식(全湜)을 통정대부 예조참의 지제교로, 민기(閔機)를 통정대부 장례원 판결사로, 김반(金槃)을 통훈대부(通訓大夫) 종부시정 지제교 겸 세자시강원보덕 교서관교리로, 유경집(柳景緝)을 통훈대부 행 사간원 정언으로, 이상질(李尙質)을 조봉대부(朝奉大夫) 행 성균관 전적으로, 이의전(李義傳)을 통정대부 행 양근 군수(行楊根郡守)로, 임효달(任孝達)을 통훈대부 행 광산 현감(行光山縣監)으로, 김원(金瑗)을 통훈대부 행전주교수 겸 제독속교관(行全州敎授兼提督屬校官)으로 삼았다.
병비가 유비(柳斐)를 가선대부(嘉善大夫) 평안도 병마수군절도사로, 송준(宋駿)을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으로, 유항(柳恒)을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으로, 이익(李翊)을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사직으로 삼았다.
인조 8년 경오(1630, 숭정3)
3월 21일(신축) 흐림
08-03-21[05] 풍정이 끝난 뒤 환궁하겠다는 하교에 대해 때맞추어 논계하지 못한 잘못이 있으므로 직임을 파척해 주기를 청하는 대사간 전식 등의 계
대사간 전식(全湜), 정언 이시직(李時稷)이 아뢰기를,
“어제 풍정이 끝난 뒤에 환궁하겠다고 하교하셨는데, 하리들이 나뉘어 출발해서 저물어서야 도착하였습니다. 신들이 머물고 있는 곳은 각기 동ㆍ서쪽의 한 귀퉁이에 있어 의논을 통할 즈음에는 필시 밤이 깊어질 터였는데, 그 때문에 유문(留門)하는 것이 온당치 못할 뿐만 아니라 어두워진 뒤에 들어가서 동가(動駕)를 청하는 것은 형세상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때맞추어 논계(論啓)하여 잘못된 일을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신들의 잘못이 이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습니다. 신들은 버젓이 그대로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가 없으니, 신들의 직임을 파척(罷斥)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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