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전우화(全遇和)공의 묘소[정승 구덩이]
2018. 2. 26. 17:08ㆍ 인물열전
전우화(全遇和)공의 묘소
전우화(全遇和)공의 묘소
정승 구덩이
전분(全賁)의 묘소
향토자원 현황
- 자원명
- 전우화(全遇和)공의 묘
- 소재지 주소
-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 분류
- 문화 > 유적
향토자원 소개
▣ 전우화(全遇和)공의 묘 연구의 배경
정선읍 용탄3리(행매부락)에서 동남쪽으로 옛날 정선의 관문인 성마령(해발979m)옛길을 따라
1.7km에 오르면 신기한 묘가 있다. 보통 묘와 달리 지표면에서 약15m 사다리 원통형 깊이의 구덩
이 바닥에 묘(비석포함)가 있으니 이상하기 그지없다.
봉분이 있는 구덩이는 깊이가 약15m 되고, 바닥의 직경은 약14m, 묘의 상부 가장자리 둘레의 직경
은 약40m로서 아무리 폭우가 내려도 물이 고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구덩이 외부 둘레에 접한 곳에는 거북이와 흡사한 바위(높이90cm, 길이2.7m, 넓이1.9m)가 머
리를 동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구덩이 안에 있는 묘의 정면(동남쪽)25m 지점에 구덩이 안에 있는
묘와 상태가 비슷한 묘비가 있어 이 두 묘의 관심을 두고 연구하기로 하였다.
우선 두 장의 묘비문을 기초로 정선 전씨 채미헌파 종중들을 만나고, 2009년 9월 도서출판 예인에
서 발간한 삼현실기(三賢實記)를 접하게 되어 이 두 묘에 대한 정체성을 알 수 있었다.
구덩이 안에 있는 묘는 고려문화시중평장사를 지낸 전우화(全遇和)公의 묘이고, 구덩이 밖에 있
는 묘는 고려 문충보절 보리공신 광정대부 도첨의 좌참찬을 지낸 전우화의 장남 전분(全賁)의 묘로서 아버지(전우화)묘는 구덩이 안에 있고, 아들(전 분)묘는 구덩이 밖에 있는 부자지간 묘임을 확인케 되니 이 묘에 대한 의구심과 호기심이 더해 갈 수밖에 없었다.
삼현실기에 의하면 고려가 망하자 망복(罔僕)의 의리를 지킨 두문동 72현 중 뜻있는 선비 7인(전
오륜, 김충한, 고천우, 이수생, 신안, 변귀수, 김위)에 대한 내용이 있다. 그 중 한사람으로 고
려 예문관 응교 진현관 대제학 전법판서를 지냈으며 정선 전씨 중시조인 채미헌(호) 전오륜은 전
우화(全遇和)공의 장손임을 알 수 있었다.
□ 전우화의 약전(略傳)
전우화공은 정선 전씨 시조 환성군(歡城君) 휘 섭의 27세손이고 관조(貫祖) 정선군(旌善郡)의 휘
선의 20세손이며 감문위상호군(監門衛上護軍) 휘 전자공(子公)의 손자이고
정선읍 용탄3리(행매부락)에서 동남쪽으로 옛날 정선의 관문인 성마령(해발979m)옛길을 따라
1.7km에 오르면 신기한 묘가 있다. 보통 묘와 달리 지표면에서 약15m 사다리 원통형 깊이의 구덩
이 바닥에 묘(비석포함)가 있으니 이상하기 그지없다.
봉분이 있는 구덩이는 깊이가 약15m 되고, 바닥의 직경은 약14m, 묘의 상부 가장자리 둘레의 직경
은 약40m로서 아무리 폭우가 내려도 물이 고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구덩이 외부 둘레에 접한 곳에는 거북이와 흡사한 바위(높이90cm, 길이2.7m, 넓이1.9m)가 머
리를 동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구덩이 안에 있는 묘의 정면(동남쪽)25m 지점에 구덩이 안에 있는
묘와 상태가 비슷한 묘비가 있어 이 두 묘의 관심을 두고 연구하기로 하였다.
우선 두 장의 묘비문을 기초로 정선 전씨 채미헌파 종중들을 만나고, 2009년 9월 도서출판 예인에
서 발간한 삼현실기(三賢實記)를 접하게 되어 이 두 묘에 대한 정체성을 알 수 있었다.
구덩이 안에 있는 묘는 고려문화시중평장사를 지낸 전우화(全遇和)公의 묘이고, 구덩이 밖에 있
는 묘는 고려 문충보절 보리공신 광정대부 도첨의 좌참찬을 지낸 전우화의 장남 전분(全賁)의 묘로서 아버지(전우화)묘는 구덩이 안에 있고, 아들(전 분)묘는 구덩이 밖에 있는 부자지간 묘임을 확인케 되니 이 묘에 대한 의구심과 호기심이 더해 갈 수밖에 없었다.
삼현실기에 의하면 고려가 망하자 망복(罔僕)의 의리를 지킨 두문동 72현 중 뜻있는 선비 7인(전
오륜, 김충한, 고천우, 이수생, 신안, 변귀수, 김위)에 대한 내용이 있다. 그 중 한사람으로 고
려 예문관 응교 진현관 대제학 전법판서를 지냈으며 정선 전씨 중시조인 채미헌(호) 전오륜은 전
우화(全遇和)공의 장손임을 알 수 있었다.
□ 전우화의 약전(略傳)
전우화공은 정선 전씨 시조 환성군(歡城君) 휘 섭의 27세손이고 관조(貫祖) 정선군(旌善郡)의 휘
선의 20세손이며 감문위상호군(監門衛上護軍) 휘 전자공(子公)의 손자이고
삼중대광 판삼사사 문하시중 평장사(三重大匡 判三司事 門下侍中 平章事) 휘 전보문(普門) 안경공(安敬公)의 아들이다.
공은 천성이 관후 고결하고 기개가 강정하며 지기가 뛰어났고 재예가 비범하고 지절이 견확(堅確)
하였으며 학문에 정려하여 정자ㆍ주자의 성리학을 정숙하여 전수자의 대가로서 당대 문사에 능통
함에 명망이 당세에 추중되었다.
충숙왕조에 경주 부윤이 되고 공민왕조에 예문관 대제학겸 성균관 대사성 경령전사를 거쳐 추중보
절 동덕찬화 공신에 채록 되었고, 이어 삼한 삼중대광 문하시중 평장사를 역임 하였다.
공의 배위는 정경부인 옥천황씨로 영삼사사(領三司事) 덕보(德甫)의 여식이다.
공은 천성이 관후 고결하고 기개가 강정하며 지기가 뛰어났고 재예가 비범하고 지절이 견확(堅確)
하였으며 학문에 정려하여 정자ㆍ주자의 성리학을 정숙하여 전수자의 대가로서 당대 문사에 능통
함에 명망이 당세에 추중되었다.
충숙왕조에 경주 부윤이 되고 공민왕조에 예문관 대제학겸 성균관 대사성 경령전사를 거쳐 추중보
절 동덕찬화 공신에 채록 되었고, 이어 삼한 삼중대광 문하시중 평장사를 역임 하였다.
공의 배위는 정경부인 옥천황씨로 영삼사사(領三司事) 덕보(德甫)의 여식이다.
3남을 두었으니
장남 전분(賁)으로 공부상서 보문각 대제학 지춘추관사 삼사 좌사겸 대사성을 지냈고 후일 문충보절보리공신 광정대부 도첨의 좌참찬을 하사 받았으며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둘째아들(仲子) 전순(順)은 공민왕조에 전공판서로 성산백에 봉군되고 성산파 파조이다.
셋째아들(季) 전승(承)은 문하시랑평장사를 역임했다.
둘째아들(仲子) 전순(順)은 공민왕조에 전공판서로 성산백에 봉군되고 성산파 파조이다.
셋째아들(季) 전승(承)은 문하시랑평장사를 역임했다.
전우화(全遇和)의 손자는 일곱분으로
장손 전오륜(五倫)의 호는 채미헌으로 문과에 등제하여 예문관 응교 진현관 대제학 전법판서를 지냈고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뜻있는 칠현(七賢)과 함께 정선(남면, 거칠현)으로 낙향하였다.
둘째 손자 전오돈(五敦)은 중랑장,
둘째 손자 전오돈(五敦)은 중랑장,
셋째 손자 전오기(五紀)는 전법판서,
넷째 손자 전오임(五任)과,
다섯째 손자 전천로(天老)는 무전(無傳)이고,
여섯째 손자 전현로(玄老)는 통운대부 사헌부 감찰을 지냈고,
일곱째 손자 전빈(賓)은 문과에 등제하여 정연 숙천군수 보문각 대제학을 지냈다.
이와 같이 충신어군자지문(忠臣於君子之問)의 위국충절로 문호창성 하였으나 고려조의 멸망으로
이분들은 새왕조의 회유와 억압과 핍박에 굴하지 않고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일가솔
을 데리고 정선 성마령 아래로 낙향 은거 하였다고 전한다.
실록과 고려사 행장, 묘갈명 등에 비추어 시중공 전우화와 평강공 전분, 채미헌 전오륜으로 삼대
에 걸쳐 고결한 성품과 절의로 고려사를 빛내고 고려에 충성하고 국태민안에 진력 하였기에 이 세
분을 일컬어 三賢이라 부르고 있다.
전우화(全遇和)공의 묘는 공께서 낙향 은둔 하실 정선읍 용탄3리 원골 태백산의 낙맥인 성마령하
에 안치하여 세칭 전정승혈로 전해지고 있다.
□ 전정승혈(전우화 묘)의 전설
고려 문화시중 평장사를 지낸 전우화 공은 고려가 망하자 조선왕조로부터 화를 피하기 위하여 심
심산중에 은거 하고자 장남 분을 비롯한 둘째 순과 셋째 승 그리고 맏며느리(안동권씨)와 함께 몇
날며칠을 두고 정선을 찾아오던 중 노구의 몸을 이끌고 험난한 정선의 관문인 성마령을 넘으면서
과로에 지쳐 지금의 정선읍 용탄3리 행매부락에 잠시 머물기로 했지만 그대로 병석에 눕게 되었
다.
우화공의 장남 분과 두 동생은 끼니를 해결하기 위하여 산전을 일구어 농사라도 지어야 할 형편이
라 매일 같이 산전을 일구고 씨앗을 파종하여 머루랑 다래랑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
이든지 구해야 했다.
하루는 장남 분의 처인 안동권씨가 남편과 시동생이 일하는 메밀밭에 점심을 가져다주고 빈 그릇
을 챙기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노승이 쓰러져 있음을 목격하자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스님께
연유를 물어본즉 노승께서는 허기에 지쳐 기운을 차릴 수 없다고 하자, 안동권씨는 난감하기 이
를 때 없었다. 주변에 사람도 없을뿐더러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빈 그릇뿐........
그렇다고 아사직전에 있는 행인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터라 생각 끝에 돌아 앉아 혈기왕성
한 젊은 때라 자신의 젖을 종지에 짜 담아 노승에게 먹였더니 잠시 후 정신을 차리므로 안동권씨
는 노승을 요기라도 시키기 위해 자기집으로 모시고 왔으나 그때 병석에 누웠던 아버님 전우화 공
께서 막 숨을 거두고 말았다.
돌아가신지 삼일만에 우화공의 아들 삼형제는 장사를 치르기 위해 우화공의 시신을 모시고 문 밖
으로 나가려고 할 때, 노승께서는 목숨을 건져 준 보은의 대가로 소승이 묘지를 잡아주겠다고 간
청하기에 아들 삼형제는 노승과 함께 묘지를 잡으로 성마령 산하를 답사한 바, 노승께서는 지금
의 묘 터(전정승구덩이)를 가리키며 이곳이 명당입니다. 이곳에 안장하면 후손이 높고 귀하게 되
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노승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즉 이곳에 땅을 석자 정도 파면 암반이 나올 것이니 암반을 일구지 말고 암반위에 그대로 하관하
되 본 소승이 성마령(묘지에서500m정상)을 넘어가거든 하관 하십시오. 꼭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당부하고 노승은 성마령 쪽으로 사라졌다.
노승을 보낸 후 하관을 하기 위해 삼형제는 광중을 파내려 가니 노승의 말대로 암반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맏상주 분(賁)은 노승이 시킨대로 암반위에 부친의 시신을 안장하려 하였으나, 순과 승
의 두 동생은 암반위에 어떻게 모시느냐고 암반을 파내어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형제간 언쟁이 벌
어지자 성미 급한 막내 동생 승이 암반을 일구어 내자 난데없는 왕벌 3마리가 쏜살 같이 튀어나
와 한 마리는 왕대곡 쪽으로 한 마리는 변방산 쪽으로 날아가고 나머지 한 마리는 성마령 쪽으로
날아가 성마령 고개를 막 넘으려하던 노승을 쏘아 즉사시키고 말았으니 이는 노승이 천기를 누설
한 보복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전우화 공의 묘소는 쾅! 하는 굉음과 함께 깊이 15m 묘소 언저리 40m가 사다리 원통
형으로 내려 않고 묘소 언저리 옆에 거북모양(높이 90cm, 폭 1.9m, 길이 2.7m)의 바위가 자리하
니 후손들은 기이하게 여기며 이를 영구암(靈龜岩)이라 하고 마을 사람들은 이 묘소를 전정승구
덩(全政承穴)이라 부르고 있다.
□ 전우화(全遇和) 公의 묘지 관리 실태
우화공의 최후 행적은 물론 묘지를 실전(失傳)하였으나, 사적인 동국여지승람에서 공이 정선 출신
이며 목은(牧隱)선생께서는 중지설(仲至說)에서 전씨는 정선의 명망 높은 가문임을 밝히고 있는
것과 정선 전씨 을묘보(乙卯譜:1795년)의 기록과 후손과 동리 고노(古老)들의 증언을 참고로 현재
의 묘(전정승구덩이)가 공의 유택임을 확인하고 乙亥년(1935년) 묘역을 개수하고 위토도 마련하
여 매년 제향을 해오던 중 1973년 불성실한 후손이 위토를 몰래 매각한 후 종적을 감추었다.
그러나 그동안 위토를 소작하였던 심성착한 이모씨가 몇 년간 벌초와 제향을 받들다가 궁핍한 생
활을 면하기 위하여 인근 평창으로 이사하여 지금은 부자가 되었는바, 이를 두고 동리 사람들은
우화공의 보살핌이라고 말하고 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본 묘소의 위선사업추진위원장인 전성용씨의 주관으로 비와 석물을 세우
고 묘역을 단장하였다. 비문에는 후일에 관광명소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새겨져 있다.
□ 전우화 공의 묘소에 얽힌 이야기
전우화 공의 묘(전정승구덩이)는 지하 15m의 구덩이 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폭우가 내려도 물이
고이지 않아 신기하다고 하나, 묘지 지하부에 석회석 동굴이 형성되어 있어 물이 잘 빠지므로 물
이 고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고 사료되며, 전설에 광중을 파던 중 암반을 일구어 내자 묘지가 15m
깊이로 내려앉았다고 한 것은 묘지 지하가 동굴이기 때문에 암반을 건드리므로 연결된 지층과 함
께 내려앉은 것으로 추정 된다.
전설 속에서 전우화 공의 시신을 묻기 위한 광중에서 암반이 나와 그것을 일구어 내자 왕벌 3마리
가 튀어 나왔다고 하였는데, 2008년 9월 11일 성마령 정상에 옛날 정선의 관문을 알리기 위한 표
석으로 비석을 세우고 제막식을 하기 위해 정선문화원 회원 등 150여명이 전우화 공의 묘지 옆을
지나 성마령 옛길을 따라 얼마쯤 올라가는데 난데없이 왕벌 떼가 출몰하여 기관ㆍ단체장 등 10명
이 벌에 쏘여 병원으로 후송하는 등 제막식 행사에 차질을 가져왔던 사건이 있었다.
동리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성마령내에 크고 작은 행사나 토석을 다루려면 전우화 공의 묘소에 예
의를 갖추어야 무사하다고 하는데 이날 왕벌이 출현한 것도 우화 공의 하관시 나타났던 벌과 연관
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 든다. 이 외에도 병을 고치고 아들을 얻고 소원성취를 위하여 본 묘
소에 잔을 올리는 등 예의를 갖추면 모두 해결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 필자(정선문화원 원장님:유경은)의 소견
-약 600년전 고려조에서 문화시중 평장사를 지냈던 전우화 공은 고려 멸망과 함께 정치에 환멸
을 느낀 나머지 심심산중으로 은거하여 여생을 보내고자 정선으로 오던 중 과로로 돌아 가셨으
나, 착한 며느리가 스님을 도와 좋은 묘지를 얻게 된 아름다운 이야기와
-정선의 옛 관문인 성마령은 우마차가 다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지난 원님들이 울고 왔
다 울고 갔다는 애환을 연상키에 충분하며, 조선시대 공무로 출장시 여정의 피로를 풀기위해 투숙
하였던 원(행마원)터와 당시 이용했던 샘터의 흔적도 그대로 있으며, 성마령을 소재로한 정선아리
랑 가사도 전해지고 있다.
-제주도 삼성혈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고려 문화시중 평장사를 지낸 전우화 공의 묘소는 누가 보
아도 이상하고 신기하므로 향토사적 보존과 문화관광명소로 개발가치가 있다고 사료 된다.
☞ 이 자료는 정선문화원원장님(유경은)의 연구자료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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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총서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6권 > 강원도(江原道)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6권
강원도(江原道)
정선군(旌善郡)
【인물】 고려 문간(文幹) 본성(本姓)은 전(全)이다.
중국 조정에 들어가 문장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문씨(文氏)로 사성(賜姓)하였으며,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문관(文冠) 청렴하고 정직하며 관후(寬厚)하였다.
생업을 일삼지 않았으며, 관(官)에 있어서는 절조를 지켜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벼슬이 참지정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을 때에 도부서(都部署) 한충(韓冲)이 와서 알현하니 문관이 선 채로 절을 받고 한 마디도 말을 주고받지 아니하니 한충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진정 원수(元帥)다운 기상이 있다.” 하였다.
전우화(全遇和) 공민왕조(恭愍王朝)에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전오륜(全五倫)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본조 전빈(全賓) 태종조(太宗朝)에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봉화 (역) ┃ 1970
출처 : 전씨(全氏) 광장
글쓴이 : 전과웅 (55세/정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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