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선후기 낙론의 대표적 학자였던 매산 홍직필이 제자인 소휘면에게 준 편지의 한 구절이다. 제자인 소휘면은 9살에 아버지를 여읜 소년 가장이었는데, 이 당시 매산과 나눈 전후의 편지를 살펴보면 장자로서 집안 대소사를 책임지느라 공부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던 상황인 듯하다. 공부하라고 채근하는 스승과 집안일이 많아 공부에 집중하기 어렵다고 핑계를 대는 제자의 모습에서 예나 지금이나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스승은 제자를 일깨우는 존재 즉, 가장 훌륭한 벗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오륜(五倫) 가운데 붕우(朋友)에 해당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집안일 때문에 공부할 여력이 없다는 제자의 투정에 매산은 매우 원론적인 얘기로 답한다. 애초에 학문하는 이유는 현실의 삶에서 생기는 복잡다단한 일을 처리하기 위함이었으니 그 현실의 자리가 바로 공부하는 자리이며, 삶의 현장에서 이치를 따라 일을 처리해나간다면 집안을 바로 세울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 대답을 들은 제자가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독자의 입장에서 이 글을 대하는 우리로서는 상당한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오늘날 학문한다는 행위는 좋은 직장을 얻어 안정되고 부유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인지 공부 잘하는 사람이 자신의 전공 영역에서야 최고일지 몰라도 집안에서 부모와 자식으로서, 또 배우자로서의 그 몫을 충실히 하는 사람일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학문과 삶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학문과 삶이 분리된 사회는 기능적으로 뛰어난 사람은 키워낼 수 있어도, 좋은 사람을 키워내는 것은 쉽지 않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조선의 교육이 오늘날의 교육보다 더 나은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스승은 어떤 모습일지를 생각해보고 싶었다. 뛰어난 기능인이 될 수 있게 돕는 스승과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게 돕는 스승,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스승이 필요할까? 스승의 날이 있는 5월에 한번쯤은 던져볼 만한 질문일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