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22. 14:48ㆍ 인물열전
전기업公 사적(忠臣公 事績)
공의 휘는 起業이니 성산군(星山君) 휘 흥(全興)의 10세손이요. 사와공(謝臥公) 휘 신(信)의 8세손이시며 연일현감 통정대부 절충장군 초계군수 강화중군 정사원 (靖社原) 일등공신 휘 이직(以直)의 장자로 광해 을묘 서기 1615년에 출생하시어 통정대부 휘 극성(克誠)에게 출계(出系)하였다.
공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의분을 참지 못하고 절의(節義) 성품을 지녔으며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곁에 있어서는 일찍이 쓸데없는 말과 급한 안색이 없고 침착하였습니다.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남아로 세상에 태어나 군왕 섬기기를 충성으로서 하고 부모 섬기기를 효도로서 함이라 일렀습니다.
인조 14년 병자 정축 양란(兩亂)을 당하여 강화도성이 실험(失險)에 처하여 있을 때였다. 당시에 공의 부친은 연일현감으로 군영에 부임한터이다.
공께서는 홀로 집에 남아 의병을 모집하여 적군을 방어할 계책을 세우니 모친 흥양 오씨는 교동수사(喬桐水使) 휘 의국의 따님이다. 모친께서 이르시기를 네 부친은 일찍이 연일로 부임하셨고 나의 친정 부친께서도 또한 교동군영(喬桐軍營)에 계시오니 나라의 은총이 망극하도다. 하시고
너 이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들 내 무슨 한이 있으랴하고 이내 가위와 칼을 들어 공의 이마 위 머리칼을 조금 잘라 모자간의(母子間) 마지막 정표를 나누었다.
공께서 잠시 머무른 뒤 모친에게 하직인사를 드린 다음 공은 촌각을 다투어 죽기로서 적과 싸우고자 하나 손에 칼 한 자루 없어 나무를 깎아 병기를 삼았습니다.
동지 8인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남아가 죽을지언정 불의에 굴하지 말라 하시고 적진에 뛰어들어 좌충우돌하면서 적 수 십 인을 격살시켰으나 공의 전신에는 극심한 창상(創傷)을 입었으며 대세는 이미 적의 눌린바가되어 고군(孤軍)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고 나라를 지키시다가 순절하셨습니다. 이때가 인조 15년 정축 1월 22일 서기 1637년이요 공의 향년 23세로 일기(一期)로 세상을 마치셨습니다.
그때 김상용(金公尙容)등이 서문상(西門上)에서 분신자살하였으며 드디어 국운이 다하매 인조대왕이 삼전도에 나아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을 하였으니 우주는 원기를 잃고 일월은 광명을 잃었으며 백성은 설 땅을 일조(一朝)에 잃었으니 이 이상의 국치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가호와 열성조의 돌보심이 어찌 없으랴?
숙종 병술 서기 1706년에 강화유수 민진원이 공의 사적을 고찰하여 그 후손들에게 완문(完文)을 내려 모든 잡역을 면제토록 하였으며 영조 임신 서기 1752년에 강화유수 조관빈이 사림의 공의를 모아 표창과 상(賞) 50부(負)를 급(給)하였다.
또한 공의 10세손 용순(龍淳)의 제의로 회순(會淳) 치순(致淳) 학순(學淳) 정순(廷淳) 인순(寅淳)과 11세손 동진(東震) 및 종손 기향(紀享)등의 성산군(星山君) 설단(設壇)과 나라를 위하여 충절을 바치신 충신공(全起業)의 충렬사 배향을 추진하였습니다.
전국사림의 추천으로 강화 충렬사에 배향하시어 충문(忠門)이 크게 열리고 의로(義路)가 호연하도다. 공의 충혼이 일월같이 밝아 이제 다시 나라를 지키시니 오직 생과 사가 다를 뿐이요.
공의 위업은 길이 청사(靑史)에 기록되고 향화(香火)는 천추만세(千秋萬歲)토록 그치지 않으리라.
◎ 전이직[全以直]
요약
조선 후기의 무신이다. 강화군중군, 연일현감, 백령진수군첨절제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출생지
경기도 강화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경기도 강화(江華)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였다. 1627년(인조 5) 병자호란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가 되어 궁중의 식품을 관리하였다.
이후 강화군중군, 연일현감(延日縣監) 등을 거쳐 관직이 절충장군(折衝將軍) 백령진수군첨절제사(白翎鎭水軍僉節制使)에 이르렀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국가의 재물은 사사로이 쓰지 않아 칭송을 들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이직 [全以直] (두산백과)
◎ 김상용[金尙容]
요약 조
선 중기 문신. 글씨에 뛰어났는데, 그 서체는 이왕체를 본뜨고 전은 중체를 겸하였으며, 시조로 유고에 《오륜가》,《훈계자손가》등이 있고, 그 밖에도《가곡원류》등에 여러 편이 실려 있다.
본관 안동. 자 경택(景擇). 호 선원(仙源) ·풍계(楓溪). 시호 문충(文忠). 1582년(선조 15) 진사(進士)가 되고,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등용되었으며, 상신(相臣) 정철(鄭徹), 판서 김찬(金瓚)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었다. 병조좌랑(兵曹佐郞) ·응교(應敎) 등을 역임하고, 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호남지방을 왕래하였으며, 1598년(선조 31)에 승지(承旨)가 되고, 그해 겨울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정주(定州) ·상주(尙州)의 목사(牧使)를 역임하고, 광해군 때에 도승지에 올랐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한 사람으로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를 거쳐 예조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있었다. 1630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노령으로 관직을 사퇴하려고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1632년(인조 10) 우의정에 임명되자 거듭 사양하여 허락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족을 시종하고 강화로 피란하였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글씨에 뛰어났는데, 그 서체는 이왕체(二王體: 왕희지와 왕헌지의 글씨체)를 본뜨고 전(篆)은 중체(衆體)를 겸하였으며, 시조로 유고(遺稿)에 《오륜가(五倫歌)》(5편)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9편) 등이 있고, 그 밖에도 《가곡원류(歌曲源流)》 등에 여러 편이 실려 있다. 인천의 충렬사(忠烈祠), 양주(楊州)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상주(尙州)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안변(安邊)의 옥동서원(玉洞書院), 정주(定州)의 봉명서원(鳳鳴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선원유고(仙源遺稿)》, 저서에 《독례수초(讀禮隨抄)》, 작품으로 글씨에 《숭인전비(崇仁殿碑)의 전액(篆額)》(平壤) 《군수 장인정비(郡守張麟禎碑)의 전액(篆額)》(豊德)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상용 [金尙容] (두산백과)
◎ 민진원[閔鎭遠]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 인현왕후의 오빠. 전라도 관찰사 때 서원이 난립되자 이를 막았다.《숙종실록》,《경종실록》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좌의정·영중추부사에 이르렀고, 노론의 영수로서 활약했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단암주의》등 저서가 있다.
본관 여흥(驪興). 자 성유(聖猷). 호 단암(丹巖)·세심(洗心). 시호 문충(文忠)이다. 아버지는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이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이자 우참찬 민진후(閔鎭厚)의 동생이다.
1691년(숙종 17) 증광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동생 인현왕후의 유폐로 등용되지 않다가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후에 등용되었다. 사복시정(司僕寺正)·집의(執義)를 거쳐 1703년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서원이 난립되자 지방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원인을 들어 이를 막았다.
《숙종실록》 《경종실록》 등의 편찬에 참여하고, 《가족제복론(加足帝腹論)》을 찬하였다. 벼슬은 좌의정·영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노론(老論)의 영수로서 활약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영조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단암주의(丹巖奏議)》 《연행록(燕行錄)》 《민문충공주의(閔文忠公奏議)》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민진원 [閔鎭遠] (두산백과)
◎ 조관빈[趙觀彬]
정의
1691(숙종 17)∼1757(영조 33).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국보(國甫), 호는 회헌(悔軒). 조계원(趙啓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희석(趙禧錫)이고, 아버지는 노론4대신인 조태채(趙泰采)이다. 어머니는 심익(沈益)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14년(숙종 4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검열이 되었다. 1716년 도당록(都堂錄)에 선입되고 수찬(修撰)·정언(正言)·부교리(副校理)·교리(校理)·헌납(獻納) 등을 역임하였다. 1719년 승지로 특채되고, 1720년(경종 즉위년) 대사간·대사성·승지를 거쳐 이듬해 이조참의에 올랐다.
1723년 신임사화에 화를 당한 아버지에 연좌되어 흥양현(興陽縣)에 유배되었다가, 1725년(영조 1) 노론이 집권하자 풀려나왔다. 이 후 호조참의·이조참의·강화유수·대사성·동지의금부사·호조참판·홍문관제학 등을 역임하고, 대사헌으로 신임사화를 논핵하였다.
1727년 동지돈녕부사로 임명되자 노론 4대신인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 등이 죄적(罪籍)에 있으므로 의리상 취임할 수 없다고 그 삭제를 상소하였다. 그 해 정미환국으로 파직되었다. 1731년 대사헌에 있으면서 다시 신임사화의 전말을 상소하여 소론의 영수인 이광좌(李光佐)를 탄핵하였다가, 당론을 일삼고 사감으로 대신을 논척했다는 죄로 대정현(大靜縣)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났으나 등용되지 못하고 있다가 1736년 도승지에 임명되고, 1740년 호조참판·예조판서를 거쳐 1742년 평안도관찰사를 지낸 뒤, 1744년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의 불화로 면직되었다. 그 해 우참찬·홍문관제학에 다시 기용되고, 이듬해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판의금부사·판돈녕부사·공조판서·형조판서·강화유수 등을 거쳐 다시 수어사(守禦使)가 되어 남한산성에 군량을 저장할 것을 청해 시행하게 하였다. 1753년 대제학으로 죽책문(竹冊文)의 제진(製進)을 거부하여 성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이어 삼수부(三水府)에 유배되었다가 곧 단천(端川)으로 이배되었다.
그 해 풀려나와 이후 좌빈객(左賓客)·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철저한 노론계열로 아버지의 신원과 포상의 추진에 일생을 보냈으나, 문형(文衡)으로 많은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저서로 『회헌집』 20권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관빈 [趙觀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부[負]
요약
토지 면적과 수확량을 동시에 표시하는 단위.
파(把) ·속(束) ·부 ·결(結)로 이루 어진 결부법(結負法) 단위의 하나로서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이미 통일신라시대에는 채택되어 대체로 전시과체제가 무너지는 고려 후기 무렵까지 토지의 면적을 표시하였다. 이후 결부법의 변화에 따라 토지의 면적과 아울러 그 토지에서 내는 수확량, 국가에서 거둘 토지세 액수를 표시하는 단위의 하나로 되었다. 실제 면적은 결부법과 양전제(量田制)의 변천에 따라 달라졌으나, 대개 장년 농부의 열 손가락 폭을 10지(指)로 한 지척(指尺) 64척이 만드는 정사각형의 넓이에 해당하였다.
토지를 측량할 때 그 등급에 따라 길이가 다른 자를 사용하는 수등이척법(隨等異尺法)이 사용되면서 토지의 등급에 따라 실제 면적이 달라졌으나, 1444년(세종 26) 공법(貢法)이 실시된 뒤부터 그 면적은 각 등급의 토지를 측량하는 자로 사방 10척의 정사각형 면적이 되었다. 1902년(광무 6) 100 m2인 1a를 1부로 정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 [負]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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