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26. 07:36ㆍ 인물열전
만재 전면조公 행장[晩齋 全公冕朝 行狀]
공의 휘는 면조(冕朝)요 자는 헌경(軒卿)이며 호는 만재(晩齋)이요 성은 전(全)씨이시다.
정선으로 계(系)를 이어 왔으며 백제 개국원훈 환성군 휘 섭(百濟 開國元勳 歡城君 諱 聶)을 비조(鼻祖)로 한다. 후손 반(槃)은 한나라에 입조하고 그곳에서 벼슬하여 홍농후(弘農候)로 봉하였으며 자손이 잉거(仍居)하였다고 하나 그 무징(無徵)함을 개탄할 뿐이다. 누전(屢傳)하여 유(有) 휘(諱) 선(愃)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신라에 벼슬하여 정선군(旌善君)이 되니 이분을 중조(中祖)로 한다.
고려 초에 휘(諱) 이갑(以甲)은 고려의 태조 왕건을 도와 삼한을 통합하고 견훤의 난에 동수산(팔공산)에서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기신(紀信)이 초나라를 속이던 계책을 써서 태조를 샛길로 나가게 하여 포위를 벗어나 드디어 구사일생(九死一生)의 위기를 면하였다. 그러나 공은 드디어 순절하니 태조가 심히 애도하고 관(官)을 태사(太師)로 시(諡)를 충렬(忠烈)이라고 하고 정선군(旌善君)을 습봉(襲封)하였다.
우리 전(全)은 이로부터 알려져 휘(諱) 보인(輔仁)은 경학박사 좌복야(左僕射)요. 휘(諱) 수송(守松)은 경상도순사이고 휘(諱) 흥(興)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진현관 제학(提學)이요, 휘(諱) 대승(大升)은 참지정사(參知政事)며, 휘(諱) 길(佶)은 태부문하평리 상서좌복야(太傅門下評理 尙書左僕射)인데 이 분을 분파의 조(祖)로 한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석증(碩曾)이니 증 통정대부 공조참의(工曹參議)이고 조(祖)의 휘(諱)는 정륜(挺倫)이니 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오위 도총부 부총관이며 고(考)의 휘(諱)는 형철(亨哲)이니 호를 동재(東齋)라 하였는데 인산진 병마첨절제사(麟山鎭 兵馬僉節制使)를 거쳐 가선대부 동중추부사(嘉善大夫 同中樞府使)에 올랐다.
비(妣)는 정부인 연안차씨니 성균진사 남수(楠洙)의 따님이다.
고종8년 신미(1871년)에 안산리제(安山里第)에서 낳으시니 천자(天姿)가 영리하고 어버이를 섬기는데 효성이 지극하였다.
광무5년 (1901년) 5월에 공은 중추원 의관(議官)직에 있다가 7월에 면직되었으며 11월에 육군보병 참위(參尉)로 임관되더니 이듬해 광무6년 9월에 진위4연대 제일대장(第一大將)으로 전보되었다.
이듬해 7년(1903년)에 고종이 등극한지 40년을 경축할 때 사무관으로 참획(參劃)하였고 부위(副尉)로 승진하였다.
광무 8년 2월에는 보급관으로 전임하여 정위(正尉)에 올랐다. 7월에 면직되었고 9월에 진위(鎭衛) 보병 7대대장이 되었다. 이때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는데 공은 비분강개(悲憤慷慨)하였으나 그러나 다만 하나의 기둥으로 어찌 능히 큰 집이 기우는 것을 지탱하겠는가?
이듬해 병오년 5월에 조비(祖妣) 안씨(安氏)상(喪)을 당하여 승중(承重)임에도 명령을 받고서 다시 공무를 집행하니 마필(馬匹)을 하사받았다. 이 해 10월에 참령(參領)으로 승진하고 익년(翌年) 3월에 교육국 교육과로 옮겼다가 동년 9월에 해직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암운이 한양 상공에 저미(低迷)하더니 한(韓)나라 국운이 다하여 사직(社稷)이 사가(私家)로 화함에 앙천통곡(仰天痛哭)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고종 황제의 인산(因山)에는 별도로 배종(陪從)하였고 순종 황제 인산(因山)에는 장례행열원(葬禮行列員)이 되었으니 인(因)하여 대례복(大禮服) 두 벌을 하사받았고 또 강원도 강릉시 월호평동 땅을 사패지(賜牌地)로 받았는데 공은 드디어 그 땅 10,000평을 숭인(崇仁) 서운(瑞雲) 양재궁(兩齋宮)의 제수(祭需)에 보태도록 받쳤다.
이어서 종약(宗約)을 창설(剏設)하여 종족을 합하고 친목을 돈독히 하였으며 시조 단소(壇所)를 설단(設壇)하여 추원보본(追遠報本)하였고 총보(總譜)를 닦아 사람 된 도리를 밝혔으니 실로 공은 위선(爲先)하고 애족하는 지극한 행실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지만은 오직 미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였다. 의왕 이강은 일찍이 돈애당(敦愛堂)을 현호(顯號)하고 찬(贊)을 하여 말하기를 인(仁)을 독실하게 함을 덕(德)이라 이르고 널리 사랑함을 인(仁)이라 하는데 덕(德)의 가장 큰 것은 조상을 존숭함이고 인(仁)의 가장 큰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일인데 예전에 그 뜻을 들었더니 이제 그 사람을 보았노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정부에서 신증문헌비고(新增文獻備考)를 중간(重刊)할 때 종시(終始)를 고민(考閔)하였는데 민족(民族) 홍문(弘文) 예문(藝文)등을 고람(考覽)할 때 마다 누락됨이 많았고 과반수가 김씨로 오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공(公)과 홍규(洪奎) 성욱(聖旭) 3분이 인(因)하여 내각에 정단(呈單)을 함이 네 번째에 이르렀고 마침내 개정하라는 허가를 얻어내어 그 오기(誤記)를 개정하고 누락을 보완하였다.
아! 세상에 선업(先業)을 계술(繼述)하고 후손에게 물려주는 일이 적다할 수 없지만 누가 공(公)을 앞지르겠는가? 공(公)의 평생 사업이 위선(爲先)이 아님이 없었으니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公)은 실로 교화하여 풍속을 독실하게 하는 분이였으며 우리 종중에서는 일등특별유공종약원(一等特別有功宗約員)으로 추대하고 숭앙(崇仰)하였다.
1942년 임오 정월 8일에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시니 향년 72세라 시흥군 군자면 거문리 산 유좌에 장사하였다가 파주군 광탄면 분수리 돈암성당묘지로 이장하였다.
배(配)에 숙부인 연안김씨는 참봉 인수(仁洙)의 따님이요. 부원군 제남(悌男)의 후손으로 고종7년 경오(1870년) 생이며 정해 5월 14일에 졸하니 화장하였다.
또 배(配)에 숙부인 경주최씨는 학주(學周)의 따님이니 고종 23년 병술(1886년) 생이요. 1929년 기사 5월 15일에 졸하시니 묘는 거문리 대치동 해좌에 있었는데 파주 공(公)의 묘와 동원(同原)으로 이장하였다.
3남 1녀을 두었는데 남(男)에 정일(廷日) 정선(廷璿) 정욱(廷彧)이요 여(女)는 충주 이홍종에게 출가하였다.
정일(廷日)이 1남을 두니 규홍(珪弘)이요. 정선(廷璿)이 1남을 두니 종홍(鍾弘)이고, 정욱(廷彧)이 2남을 두니 대홍(大弘)과 계홍(啓弘)이다.
돌아 보건데 무사기역(無似記役)이 본디 그 사람이 아니지만 조선(祖先)을 위하여 계술(繼述)함에 감동되어 참람(僭濫)함을 무릅쓰고 그 대략을 적는다.
서기 1990년 경오 5월 일
宗後學 在魯 謹識
◎ 전면조[全冕朝]
① 전씨대동종약원(全氏大同宗約院)
초 대 종약장 전면조(1917---1932)
제02대 종약장 전면조
제03대 종약장 전성욱 (1932---1946)
제04대 종약장 전병기 (1946---1959)
제05대 종약장 전부일 (1959---1961)
제06대 종약장 전예용 (1961---1965)
제07대 종약장 전윤환 (1965---1967)
제08대 종약장 전달현 (1967---1968)
제09대 종약장 전부영 (1968---1970)
제10대 종약장 전규설 (1970---1974)
제11대 종약장 전선한 (1974---1981)
제12대 종약장 전선한
② 전씨총보(全氏總譜)
기본정보
서지
분 류 :사부
작성주체 :전면조(全冕朝) 편집(編輯)
작성시기 :1931
형태사항 :크기: 33.3x22.0 /
판 본 : 신연활자본(新鉛活字本) /
장 정 : 선장(線裝) /
수 량 : 12권(卷) 12책(冊) /
인장정보 : 藏書閣圖書印
청구기호 : K2-1781M/F
번 호 : MF35-4824~4825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기신[紀信]
출생 - 사망
미상 ~ BC 204년
전한 초기 때 사람. 초한(楚漢) 전쟁 때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섬겼다. 고조가 형양(滎陽)에서 항우(項羽)의 군사에게 포위되었을 때 자청하여 고조로 가장하고 수레를 타고 잡힘으로써 유방을 탈출시켰다. 분노한 항우가 불태워 죽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신 [紀信]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1. 20. 이회문화사)
◎ 전보인[全輔仁]
고려 전기의 문신이다. 명경과 출신으로 여러 차례 학관을 지내면서 성실히 후학을 가르쳐 칭송을 들었다.
◎ 전길(全佶)
정선전씨 28세로, 복야공파(僕射公派) 의 조(祖)입니다. 평북 정주군(定州郡)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공께서 밀직부사로 재임할 때 고려 고종18년(서기 1231년) 8월에 몽고 태종은 고려국을 침략할 계략을 세우고, 몽고의 장군 살례탑으로 하여금 고려국을 치게 하였다. 이때 전공을 세웠다.
◎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고려 시대 전교시(典校寺)의 정3품 관직.
[네이버 지식백과] 판전교시사 [判典校寺事]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참지정사[參知政事]
고려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2품 벼슬.
◎ 문하평리[門下評理]
고려시대 문하부(門下府)의 종2품 관직.
◎ 전형철(全亨哲)
승정원일기
고종 12년 을해(1875, 광서1)
1월 28일(신묘) 맑음
12-01-28[61] 유득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전형철(全亨哲)을 인산 첨사(獜山僉使)로, 문경애(文慶愛)를 부총관으로, 은진영(殷震榮)을 경복궁 위장으로, 백인석(白獜錫)을 수문장으로, 김상익(金相翼)을 발포 만호(鉢浦萬戶)로, 김홍민(金弘民)을 장수 별장(長壽別將)으로, 신백중(辛百重)ㆍ함희만(咸熙萬)을 오위장으로, 최광순(崔光淳)을 충청 중군으로, 이성헌(李成)을 유원 첨사(柔遠僉使)로, 신재현(申在鉉)을 보산 별장(保山別將)으로, 박종건(朴鍾健)ㆍ유한극(兪漢極)을 오위장으로, 정희(鄭㵙)를 문신겸선전관으로, 전계응(田啓應)을 마도 만호(馬島萬戶)로, 송영순(宋榮淳)을 서평포 만호(西平浦萬戶)로, 홍병선(洪秉善)을 첨지로, 김제하(金制河)를 오위장으로, 배덕화(裵德化)를 수문장으로, 김화면(金華勉)을 미전 첨사(美錢僉使)로, 이기순(李淇舜)을 오노량 만호(吾老梁萬戶)로, 김익진(金翊鎭)을 도총관으로, 서승보(徐承輔)를 부총관으로, 이춘영(李春英)을 경복궁 위장으로, 강희로(姜熙老)ㆍ윤희손(尹喜孫)을 경희궁 위장으로 하였다.
◎ 참령[參領]
1894년(고종 31)의 군제개혁에 따라 정한 주임관(奏任官) 3등급, 즉 3품관에 해당하는 영관급으로, 부령(副領)의 다음이고 정위(正尉) 위이며 지금의 소령과 같다.
‘육군 장관직제(將官職制)’에 의해 개편된 12계급 중 제6위에 해당되는 계급으로서, 기병대 ·포병대 등의 대대장에 보임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령 [參領] (두산백과)
◎ 인산[因山]
태상왕•태상왕비, 임금•왕비, 왕세자•왕세자빈, 왕세손•왕세손빈의 장례. 장례의 사무는 계제사(稽制司)에서 맡는데 특별한 경우에는 국장도감(國葬都監)을 설치하여 장사를 지냄. [유사어]국장(國葬). 인봉(因封). 예장(禮葬).
[네이버 지식백과] 인산 [因山]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대례복[大禮服]
조선시대에는 오례(五禮:嘉禮 ·吉禮 ·賓禮 ·軍禮 ·凶禮)에 따라 제복(祭服) ·조복(朝服) ·공복(公服) ·상복(常服)을 착용했는데, 1895년 8월 10일 대례복 ·소례복 ·상복을 제정 반포한 뒤에는 대례 ·소례에 따라 대례복 ·소례복을 입었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대례복으로는 왕 ·왕세자의 면복(冕服)이 있었으며, 조신(朝臣)들은 조복 ·제복이 있었다. 또 왕비 ·왕세자빈에게는 적의(翟衣)가 있었고, 내명부(內命婦) ·외명부(外命婦)는 의식에 따른 예복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여러 차례의 의제개혁 때마다 조신의 대례복이 지정되었다. 즉 1894년 12월의 개혁 때 흑단령(黑團領), 즉 상복(常服)을 조신의 대례복으로 승격시켰다. 다음해 8월에는 문관의 복장을, 조복 ·제복은 예전대로 착용하고, 대례복은 흑단령 ·사모(紗帽) ·품대(品帶) ·화자(靴子)로 하여 동가(動駕) ·경절(慶節) ·문안(問安) ·예접(禮接) 때에 착용하며, 소례복은 진현(進見) 때 또는 대례 때에도 착용하도록 간소화했다.
97년 국호를 대한으로 고치고 황제 ·황후 등의 관복을 중국 명(明)나라와 동격으로 정했다. 1900년 4월에는 문관의 대례복을 구미식으로 정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례복 [大禮服] (두산백과)
◎ 사패지지[賜牌之地]
나라의 임금이 내려 준 땅. 사패땅. 사패지
◎ 승중[承重]
장손(長孫)으로서 아버지·할아버지를 계승하여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일, 또는 그 일을 책임지는 사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3년부터 1908년 사이에 칙명(勅命)으로 편찬, 간행된 장고(掌故 : 典禮와 故事) 집성의 유서(類書).
[네이버 지식백과] 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전홍규(全洪奎)
전씨대동보소(全氏大同譜所)로 종사(宗事) 활동
일 시 : 1917년 9월 8일까지
장 소 : 경성부(京城府)의 전홍규(全洪奎) 종친의 사저
한 일 : 제반 종사 관령 활동
◎정단[呈單]
관아에 명단(名單)이나 단자(單字)를 제출하는 일.
[네이버 지식백과] 정단 [呈單]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璿구슬 선
1. 구슬 2. 옥(玉) 3. 선기(천문 관측 기기, 혼천의)
◎ 彧문채 욱
1. 문채(文彩: 아름다운 광채) 2. 긴 모양 3. 무성(茂盛)한 모양 4. 문채(文彩)가 나다 5. 무성하다(茂盛--)
◎ 월호평동[月呼坪洞]
강원도 강릉시 월호평동
명칭 유래
월호평동(月呼坪洞)은 두 형제가 집에서 일하는 여종인 월이에게 서로 일을 시키기 위해 “월아, 월아” 하고 불렀다 하여 ‘월이를 부르는 들’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마을에 어정걸·어정직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월이란 여종이 있었다. 월이는 여러 노비들 가운데 일도 가장 잘하고 예쁘고 상냥하여 두 형제의 신임을 얻었다. 그래서 두 형제는 월이에게 자주 일을 시켰다. 형이 “월아” 하고 부르면 이어서 동생도 “월아” 하고 불러 마을에는 월이를 부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월호평동은 예전에는 갯벌이어서 오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오리들’이라고도 한다.
자연환경
월호평동은 불하산(佛下山)에서 내려다보면 반달 모양으로 둥글게 모여 있는데 사방이 5리[1.963636㎢]나 되는 넓은 들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월호평동 [月呼坪洞]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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