譜學의 전통을 찾아서

2020. 12. 11. 22:18 인물열전

譜學의 전통을 찾아서

 

조용헌 교수

 

‘자본론’과 사회과학 세대에게 빠진 부분이 강호동양학이다. 적어도 50세 정도부터는 강호동양학을 공부해 놓아야만 나이 들어서 외롭지 않다. 강호의 4대 과목은 사주, 풍수, 주역, 그리고 보학(譜學)이다. 보학은 여러 집안의 역사, 인물, 그리고 집안끼리의 사건과 에피소드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보학은 원래 양반 집안 후손들이 어른들과 어울리면서 입으로 배우는 특수 분야였다. 해방 이후로 양반 계급이 몰락하면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과거 양반 집안의 후손으로서 극소수 호고주의자(好古主義者)들 몇몇에게만 그 맥이 희미하게 이어지고 있는 전통이다.

 

나는 양반 집안 출신도 아니지만 어찌하다 보니 보학에 맛을 들이게 되었다. 이것도 팔자소관이라 생각한다. 몇 주 전에 ‘장흥고씨’ 칼럼에서 조선 후기에 보성 군수로 있으면서 토호 세력을 잡들이 하다가 안동김씨들에게 미운털이 박혀 파직당한 고제환의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이 칼럼을 보고 독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때 보성군 옆동네의 능주목사로 있던 김진화(金鎭華)도 같이 한양으로 호출되었고, 김진화는 학봉 집안 서산 김흥락의 아버지이다.” 전화를 준 이 독자는 도산서원 원장인 김병일 선생이다. 김병일은 70대 중반임에도 기억력이 대단한 분이다. 퇴계 관련 한시를 포함하여 한시 200~300여 수를 암기할 뿐만 아니라 영남의 내로라하는 집안의 족보를 훤히 꿰고 있다. 강호 보학의 고단자이다. 필자가 30대 때는 고인이 되신 송준호 교수(조선사회사연구), 전남 장성 손룡에 사시던 한학자 변시연 선생으로부터 보학을 사사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김병일 선생을 만나서 한 수씩 가르침을 받는다.

 

안동의 무실유씨 집안 유일곤 선생도 선수이다. 얼마 전에도 무실유씨 집안 전체 역사를 정리한 두툼한 보학서(‘전주유씨수곡파 460년의 역사’)를 냈다. 인동장씨 여헌 장현광 직계 후손인 장달수 선생. 장달수는 직장 생활 그만둔 50대 후반부터 15년간을 두문불출하고 남의 집안 비문과 행장에 몰두한 인물이다. 호남 쪽의 보학 고단자는 다산(茶山) 전문가인 박석무 선생이다. 집안이 노사 기정진 학맥인 박석무는 일찍이 데모하다 감옥 갔다 왔다. 먹고살기 위해 남의 집안 문집 번역하다가 보학에 정통하게 된 케이스이다. 학봉 종가의 김종성 선생은 필자에게 “김진화는 안동김씨 정권을 심하게 비판하다가 함경도 명천에 유배 갔었던 ‘북천가(北遷歌)’의 저자 김진형(金鎭衡)의 친형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