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망 [ 全祖望 ]
2020. 12. 19. 10:30ㆍ 인물열전
전조망 [ 全祖望 ]
출생 - 사망
1705년 ~ 1755년
청나라 절강(浙江) 은현(鄞縣) 사람. 자는 소의(紹衣)이고, 호는 사산(謝山)이다.
건륭(乾隆) 원년(1736) 32살 때 진사에 급제하여 서길사(庶吉士)가 되었는데, 『영락대전(永樂大全)』을 빌려 읽으면서 구하기 어려운 책들을 초록했다. 산관(散館)한 뒤 지현(知縣)에 등용되었지만 취임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유종주(劉宗周)가 세운 즙산(蕺山)과 광동(廣東)의 단계서원(端溪書院)에서 주강(主講)을 맡았다.
평생 황종희(黃宗羲)를 흠모하여 그의 미완의 저서 『송원학안(宋元學案)』을 완성시켰고, 『수경주(水經注)』의 교정에 고심했다.
사학(史學)에 밝았다. 명나라 말기의 충렬(忠烈)들과 청나라 초기의 학자들의 사적에 관심을 쏟아 『길기정집(鮚埼亭集)』을 편찬했는데, 이런 부류 인사들의 비(碑)나 표(表), 전(傳), 지(志) 등이 대략 수록되어 있다.
그 밖의 저서에 『경사문답(經史問答)』과 『구여토음(勾餘土音)』, 『한서지리지계의(漢書地理志稽疑)』가 있고, 『곤학기문(困學紀聞)』에 대해 전(箋)을 달았으며, 『용상기구시(甬上耆舊詩)』를 편집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전조망 [全祖望]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1. 20., 임종욱, 김해명)
중국 청나라 때의 저명한 문학가, 역사학자 전조망(全祖望)
전조망은 기원 1705년에 태여났는데, 18세기 중엽 중국의저명한 학자입니다. 어려서 부터 자질이 뛰여났던 그는 4살에 벌써 중국 고대의 유가 경전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8살에 이르러 전조망은 또 중국의 유명 역사학 서적인 <자치통감>을 통독하였습니다. 당시 전조망의 고향인 절강성 녕파는 문화가 매우 발달해 있었으며 장서가들도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중 범가 성을 가진 한 학자는 특별히 책을 좋아하기로 소문나 있었는데 집에 많은 장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조망은 어려서 집안 생활이 가난했기 때문에 책을 살 형편이 못돼 항상 그의 집을 찾아 책을 베껴서 읽었습니다. 학자는 전조망이 이렇듯 배우기를 즐기는 것을 보고 그를 무척 좋아하게 되였으며 나중에는 감동한 나머지 자기의 장서를 전부 전조망에게 주었습니다. 전조망은 26살이 되던 해에 상경해서 북경에 왔습니다. 북경에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한 편의 문장을 지어 당시 학문 대가였던 방포에게 드렸습니다. 문장을 보고난 방포는 절찬을 금치 못하면서 전조망을 극구 건륭황제에게 추천했는데 건륭황제는 바로 전조망으로 하여금 황궁 장서를 총괄토록 하였습니다. 전조망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많은 궁정 장서를 탐독하면서 열심히 관련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수집한 자료를 다시 정리하고 분류해서 보관했는데, 이런 자료는 향후 전조망이 학문을 연구하는 좋은 소재로 역할을 발휘했습니다. 전조망은 서른 세살에 관직을 하사하고 벼슬을 그만 뒀는데 여생을 집필과 학문연구에만 전념했습니다. 그의 문장은 대부분 논술이 깊이 있게 잘 전개되여 있고 유창하면서도 격조 높습니다. 전조망은 이런 작품을 통해 사회 최하층 백성들에 대한 자신의 동정과 봉건 통치자들의 추악한 행태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표현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전조망의 산문은 특히 당시와 후세 문인들의 숭배 대상이 되였는데 습작 범문으로 많은 문인들이 분분이 표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산문은 대부분 사회 하층인물들의 생활모습을 그려냈는데 인물형상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합니다. 전조망은 자신의 명작 <독이필기(讀易筆記)>를 통해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도 동정심이 많은 풍여풍이라는 지식인 형상을 성공적으로 부각해 냈습니다. 풍여풍은 가난한 서생이면서 과거시험에서도 좌절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는 과정에서 자신의 인생 가치를 실현해 나갑니다. 중국의 봉건사회는 등급제도가 아주 삼엄했었는데 지식인은 가난한 일반 백성과 동일한 계층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일부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로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대부분 고결함을 자칭하며 일반 백성들과 내왕하기를 꺼렸습니다. 때문에 풍여풍처럼 위급한 사람을 돕고 가난한 백성을 구제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였습니다. 독자들은 이 작품 속에서 작자 전조망의 그림자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조망은 학문 연구 태도가 아주 엄격했는데 시종 지식인들의 품덕 수양과 엄숙하면서도 진지한 학술 연구 태도를 강조했습니다. 이는 후세의 지식인들에게도 심원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조망은 만년에 전국 각 지에 위치한 서원과 학교를 돌면서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진행하였으며 박식하고 다재다능한데다 학문을 대하는 태도까지 진지해 크게 학생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르는 곳마다 그의 강의는 항상 듣는 학생들이 너무 많아 교실은 언제나 발디딜 틈마저 없었습니다. 당시 청나라 통치자들이 고압적인 사상 통치를 실시하고 있었기때문에 직식인들의 자신의 관점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현실을 떠나 경전 속에 파묻쳐 역사를 연구하게 되였습니다. 전조망이 이들 지식인들과 다른 점이라면 비록 그도 역사학 연구에 착안점을 두었지만 전조망은 연구 초점을 명나라 역사학 연구에 맞췄습니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태여난 정권이였던 관계로 당시 까지만 해도 명나라 역사 연구는 상대적으로 아주 민감한 분야였습니다. 전조망은 역사에 대한 책임감을 지니고 무수한 역사 유적지를 찾아 다녔습니다. 때문에 그가 편찬한 역사 자료는 매우 정확하면서도 상세합니다. 전조망은 또 청나라 침략에 맞서 싸운 많은 명나라 영웅들의 생애와 사적을 전기로 칭송했는데 당시 이는 대역 죄로 묵숨을 잃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전조망은 중국 고대 사학자들의 우량한 전통을 발양해 포악한 행위와 위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직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전조망의 인물 전기는 언어가 아름답고 문풍이 예리해 읽을 재미를 더 해 줍니다. 이런 우수한 문장은 명나라 특히는 명나라 말년의 역사 연구에 풍부하면서도 가치있는 역사학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집필과 학문 연구를 제외하고도 전조망은 많은 지방을 돌아보면서 적지 않은 여행기를 썼습니다. 이런 여행기는 언어가 간결하고 문장이 참신하며 시적인 정취가 풍깁니다. 전조망의 만년 생활은 아주 불행했는데 밤낮없이 학문 연구에 몰두한데다 생활까지 가난해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당지 백성들은 전조망을 아주 존경하고 사랑했는데 그가 돌아가자 백성들은 특별히 사당을 짓고 대를 이어 그를 기념했습니다. 동시에 그의 작품은 후세 사람들에 의해 <천일각 문집>이라는 책으로 편찬, 발행되여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출처] 중국 청나라 때의 저명한 문학가, 역사학자 전조망(全祖望) |작성자 쎄쎄니중국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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