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29. 22:22ㆍ 인물열전
[ 전씨 연원에 관련된 내용 요약 (전과웅) ]
먼저 서우 전병훈公에 관한 이력을 소개합니다.
1857년 7월 6일 평안북도 출신이고 성리학자로 1892년(35세) 의금부도사, 1899년 중추원의관 및 황해도균전사를 역임하였으며 일제강점기(1907년)에 중국에 망명하여 학문에 전념하여 도사(道士)로서 명성을 떨쳤다.
원세개의 아들 원극정은 조선에도 이와 같은 대유학자가 있었음을 극찬하면서 가르침을 청하였다고 한다.
1927년 9월 14일 71세로 생애를 마치었으며 평안남도 순안면 북창리에 묘소가 있습니다.
공(公)은 특별한 인연으로 중국에서 학문에 힘쓴 적이 있어 현지에서 전씨 연원을 밝히려고 노력한 과정이 전씨총보 서문에 나옵니다.
즉 증보문헌비고(동국문헌비고)에서 전씨는 하우(夏禹)씨의 먼 후손이라는 기록을 보고 중국에서 이를 고증해 보려고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 구양수(歐陽修)저술과 사산(謝山) 전조망(全祖望)의 사례를 연구한 결과를 기록하였습니다.
공(公)이 말하길
『우조(禹祖)로부터 환성군(諱 聶)과 정선군(諱 愃)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혈맥이다.(禹祖至歡城旌善的一脉)』
『동한[東韓(우리나라)]의 전씨는 이 사실(전조망의 선조가 하나라에서 시작한 사실)로 보아서 증거가 생겼으며 문헌(증보문헌비고)에 하우씨로 밝게 등재되어있다. 대가 묘원하여 이어짐을 밝히기에 어려움이 있다.(代遠難紹)』
전씨총보 서
근본(根本)은 하나이지만 수만 가지로 달라지는 이치를 모두 능히 말을 하나 그러나 참으로 태극(太極)의 능력과 조화의 묘용(妙用)에 근원하여 분산함에 세계가 되는 것은 이치를 궁구하고 천성(天性)을 다하는 철인(哲人)의 안목이 통하지 아니한 사람이면 어찌 분명히 알겠는가?
천인(天人)과 만물이 한 근본임을 총관(總觀)하면 태극이다. 태극은 이 정신의 지극한 것이니 상제(上帝)의 성령(性靈)과 능력의 씀이 되었으니 무릇 우주간(宇宙間)의 형상이 이루어진 것은 태극이 피운 꽃이 아님이 없다.
사람이 출생할 때 태극의 건금(乾金)의 영광(靈光)을 성(性)을 삼는 것이니 그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것이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사도(四道)를 종합하여 성(性)으로서 명(命)에 들어가고 명(命)으로 말미암아 성(性)에 돌아가서 성(性)과 명(命)이 합일하여 금(金)이 그 근본(其初)을 회복하면 가히 수명(壽)가 연장될 것이며(長) 서로 도와서 도(道)가 원덕(圓德)의 겸성(兼聖)에 이를 것이다.
이는 일리(一理)를 잡어 만물을 통섭(統攝)하고 인도(人道)가 본원(本源)으로 돌아가는 것(返還) 이다. 사람이 만약 이 이치를 훤히 꿰뚫으면(洞明) 자연히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胸中)에 나라의 한계가 없고 가히 세계 모든 사람(五洲)이 동포(同胞)가 되어 우주(宇宙)내에서 한 집안(一家)이 될 것이다.
(이상은 먼저 우리 종족의 후손들에게 학문은 성인을 겸하는 것으로 법을 삼음을 고함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품성(性)이 같았으나 점점 각성(各姓)으로 분립함에 이르러 세대가 오래되면 소원해진다. 그런 까닭으로 이에 족보의 법이 일어나서 성(姓)을 얻은 할아버지로써 시조를 삼고 사당(祠堂)에서 신주(神主)를 모시는 차례(昭穆)과 통속(統屬)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순서대로 늘어세우고(序列) 분산(分散)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종족(宗族)을 보첩(譜牒)속에 집안 식구들끼리 한자리에 모으게 되었다.(團聚)
첫째로는 선조(先祖)를 높이며 종족(宗族)을 공경하고 다음으로는 종족(宗族)을 애호(愛護)하고 일가친척이 사이가 좋고 화목(敦睦)함이다. 이는 진실로 존경하여 그리워(尊慕)하는 마음을 기탁하고 합류시키는데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 현명한 제도라 하겠다.
병훈(秉勳)이 일찍이 동국문헌비고를 상고하여 본즉 씨족고(氏族考)의 편에 우리 전씨(全氏)의 성이 하우(夏禹)씨의 후손이라 하였으나 그 후에 보첩(譜牒)을 상고(詳考)하여 보니 명확한 증거가 없었으므로 의심하게 되었다.
중국으로 온 이후로 두루 탐문(探問)한바 구양수(歐陽修)가 보학(譜學)에 가장 정밀(精密)하다 하였으므로 그의 족보(族譜)를 열람(閱覽)해 본 즉 예(例)에 이르기를 성씨(姓氏)가 나온 것이 거의 유래가 깊었던 까닭으로 상세(上世)는 많이 없어지고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이로서 사산(謝山) 전조망(全祖望)의 세계(世系)가 멀리 하(夏)나라와 상(商)나라의 종주(宗主)라 하였다.
그러나 송나라 흥국(송나라 태종의 연호 서기 976년경)에 중시어(中侍御)로써 그의 시조로 삼은 것은(송나라 이종황제의 외가) 거의 고대를 밝히기가 어려운 까닭이라고 하였다.
그런즉 동한[東韓(우리나라)]의 전씨는 이 사실(전조망의 선조가 하나라에서 시작한 사실)로 보아서 증거가 생겼으며 문헌(증보문헌비고)에 하우씨로 밝게 등재되어있다. 대가 묘원하여 이어짐을 밝히기에 어려움이 있다.(代遠難紹)
환성군에 이르러서 훈공(勳功)을 세우고 봉작(封爵)을 받아 대수(代數)를 이은 시조가 되었다.
손자 휘(諱) 반(槃)에 이르려 한(漢)나라에 들어가서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이 되어 관서홍농후(關西弘農侯)에 피봉(被封)되었고 손자에 3공(三公)이 있었는데 그 중(仲)과 계(季)는 중국에 거주한다고 하나 역사가 요원하여 상고하기 어렵다.
정선군(旌善君) 휘(諱) 선(愃)공이 공주를 모시고 동국(신라)으로 돌아오니 정선군(旌善君)에 피봉(被封)되어 정선으로 관향(貫鄕)을 삼게 되었다. 휘(諱) 이갑과 의갑의 형제가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개국의 큰 공훈으로 벼슬이 태사(太師)에 이르고 또 군(君)을 봉(封)하였으니 정선군(旌善君)과 죽산군(竹山君)으로 각각 피봉(被封)되었다.
이어서 명유(名儒)과 석학(碩學)이 역대에 걸쳐 배출되었고 충훈(忠勳)과 봉군(封君) 승상(丞相) 대장(大將) 상서(尙書) 그리고 한림(翰林)과 박사(博士)등의 벼슬이 대대로 끊어(乏絶)지지 않았고 혹은 대유(大儒)와 철현(哲賢)으로써 당시의 문형(文衡)을 주장하였으며 또한 서원에 배향되는 등 1940여년의 사이에 관면(冠冕)과 종정(鍾鼎)이 이에 성(盛)함이 되었다.
아! 우주의 정영(精英)이 비록 다 한성에 모였다하여도 과언이 아니라 하였다. 정충(貞忠)과 고절(高節)이 가히 백세에 울려 퍼져 세수(歲數)를 부식(扶植)할 수 있는 사람들이 려조(麗朝)에 이르러 더욱 창성(昌盛)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오매 이르러 은덕(隱德)을 숭상하고 삼가 당쟁(黨爭)을 피한 까닭으로 등용한 큰 벼슬은 비록 전대(前代)에 미치지 못하였다.
[ 이상의 세덕(世德)과 훈명(勳名)은 동국사기에 기재되어 있고 총보(總譜)와 가승(家乘)에 소상히 밝혀져 있는 까닭으로 이제 휘함(諱啣)과 직위(職位)를 매거(枚擧)하지 아니한다. 또 충효열(忠孝烈)의 뛰어나게 훌륭한 행실(卓行)과 저명함을 기록할 겨를이 없음(不遑)이니 독자(覽者)는 가서(可恕) 할지어다.]
자손의 번중(繁衆)함은 가히 그의 수가 억뿐 아니라 매우 많다고 이르겠다.
만약 큰 공덕을 천지인(天地人)의 사이에 수립하지 아니 하였으면 음덕(蔭德)의 보답이 어찌 능히 이와 같으리오?
이로서 나는 더욱 우리 성씨(姓氏)가 대우(大禹)이후에서 계출(系出)하여 환성군(歡城君)의 기본을 개척한 것이 또한 심후함이 분명한 것을 믿겠으니 어찌 무도(無蹈)함을 이기겠는가?[종합예술인 춤이 포함된 대하드라마(중국 하나라 우황제에서 환성군에 이어진 드라마)를 이기겠는가?]
우조(禹祖)로부터 환성군(諱 聶)과 정선군(諱 愃)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혈맥이다. 뒤에 공적(功績)이 무성(茂盛)하고 봉군(封君)이 많아서 한 가족인데 일족(一族)을 볼 때 길에서 우연히 만난 타인(路人)을 보듯이 하는 걱정을 어찌하면 면(免)할 수 있겠는가?
학식과 상식이 있는 사람(識者)들이 이를 걱정하고 두려워 한지 오랜만에 종중(宗中)의 현자(賢者)인 면조, 성욱, 영기, 병기 등 제씨가 개연히 종중을 존중(尊重)히 여기며 씨족(氏族)을 진작시키려는 성의(誠意)로써 종약을 창립하여 권면한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았다.
예속(禮俗)이 서로 선(善)하여지고, 공익을 위해 서로 힘쓸 뿐만 아니라 애친(愛親)하고 공경함이 아울러 지극하여졌다.
이에 면조가 전씨의 총보사(總譜事)를 논정(論定)하고 공문(公文)을 발송하고 수단(收單)을 수합하여 보책(譜冊) 간행(刊行)이 멀지않음에 서문을 나 병훈(秉勳)에게 촉탁(囑託)하여왔다.
아! 이는 곧 전대(前代)에 미처 겨를이 없었던(未遑) 바인데 이제 비로소 거행하게 되었다. 즉 가히 우리 종족(宗族)이 통일되어 흩어 졌던 종인(散者)들이 다시 합하여 지고 이별하였던 자(離者)가 다시 친하여지니 그 정의(情誼)가 일가(一家)로 원만하여졌다고 이르겠다.
이는 선조(先祖)에게 효도하고 후손에게 남겨주는 위대한 종중(宗中)의 사업이며 전성(全姓)의 모든 것이 여러 가지로 다 다른(萬殊) 심리를 수습하여 성초(性初)의 일본(一本)인 태극의 조기(祖炁)에 다시 돌아옴이(歸復)아니겠는가?
하느님이 반드시 보우(保佑)하시어 영재(英才)와 준재(俊才)와 재주와 슬기가 매우 뛰어난 사람(俊彦)이 배출하고, 세상을 개조하고 풍화(風化)를 협찬(協贊)하여 장원한 덕업(德業)이 더더욱 번성하여(光大) 높이 우뚝 솟는 종중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주의 명망 있는 종족(望族)이 되기를 바라며, 총보(總譜)에 경배(擎陪)하면서 경축 무량하여 마지않는다.
환성군 1943년 중원 을축 3월 길일
후손 정3품 통정대부 의금부도사 중추원의관 황해도균전사 병훈 경서
全氏總譜 序
一本萬殊之理類能言之然眞源於太極之能力造化之妙用分散爲世界者非有窮理盡性之哲眼通則安得以瞭然乎總觀天人萬物之一本者太極也太極是精神之至者而爲上帝性靈能力之用凡宇宙成象岡非太極之開花者也人之生也受此太極乾金之靈光爲性而其開花結子者爲身也故綜合四道性以入命由命歸性性命合一金復其初則可以壽長而互助道臻圓德之兼聖矣此其操一統萬人道之返本還源者也人若洞明此理則自然胸無國界可以五洲同胞宇內一家矣
(以上先告吾族後進學兼聖爲法)
然初本同性而漸至分立各姓世久踈遠故於是族譜之法興焉以得姓之祖立爲始祖序列昭穆統屬分散諸族團聚譜牒之內一以尊祖敬宗次以愛族敦睦則是誠寓慕合流之莫善良制也秉薰嘗攷東文獻備攷(氏族攷篇)則全姓爲夏禹氏之後裔而後考譜牒未有係屬之徵驗故懷疑矣來華以後歷觀歐陽公最精譜學其譜例曰姓氏之出其來也遠故其上世多亡不見也是以全謝山之世係遠宗夏殷而乃以宋興國中侍御爲其始祖者(宗理宗之外家)以其古代難明故也然則東韓之全以此視作證據而文獻昭載之我全係出夏禹氏而代遠難紹乃至歡城君始樹勳受封爲繼代之始祖至孫諱槃入漢爲驃騎將軍封關西弘農侯有孫三公其仲季之居華者歷史杳遠難考旌善君諱愃陪公主東還封旌善君因貫旌善諱以甲義甲兄弟統合三韓開國大勳位致太師又封君旌善竹山因茅昨焉繼以名碩歷世輩出忠勳封君丞相大將尙書翰林博士等作世不乏書或以大儒哲賢主張當時文衡而亦多享祀書院一千九百四十餘年之間冠冕鍾鼎於斯爲盛鳴呼宇宙精英雖謂之咸萃一姓恐非過論也貞忠高節可風百代扶植世敎者至麗而尤彰洎入漢朝崇尙隱德愼避黨爭故登庸之大位雖遜於前代而
(以上世德勳名載在東史而條明於總譜之家乘故今不枚擧諱職也且忠孝烈之卓行亦不遑著明覽者可今不恕)
子孫之繁衆可謂其麗不億如非大樹功德於天地人之後則食德之報孰能如是哉是以余則益信我姓氏係出自大禹之後而歡城之拓基者亦深厚也審矣曷勝舞蹈哉禹祖至歡城旌善的一脉而後因功茂君多故視若路人之患安得免乎識者之爲是憂懼日久宗賢冕朝聖旭泳基炳基諸氏慨然以重宗振族之盛意剏立宗約而勸勉有年不惟禮俗相善公益相勗而愛敬幷摯於是冕朝論定全氏總譜事而發文收單成冊不遠屬序於秉薰烏乎此卽前所未遑者而今始擧行則可稱吾族統一而散者復合離者復親誼圓一家矣斯豈非孝先貽後之偉大宗業收拾全姓萬殊之心理復性初一本之太極祖炁者耶天必佑之英才俊彦輩出造世賛化長遠之德業益益光大魏然作宇宙之望族擎陪總譜而慶祝无量
歡城君 一千九百四十三年 中元 乙丑 三月 吉日
後孫 正三品 通政大夫 義禁府都事 中樞院議官 黃海道均田使 秉薰 敬書
◎ 증보문헌비고 제51권 - 제계고 12 부록 씨족 6
◇ 전씨(全氏)
〔하우씨(夏禹氏)의 먼 후손인 왕몽(王蒙)이란 자가 공갑(孔甲)의 난(亂) 때에 유누(劉累)와 함께 조선(朝鮮)으로 도망하였다. 그 후 진한(辰韓)·마한(馬韓) 때에 "초가집에 사는 왕몽이 임금이 되리라."는 동요가 있었다. 왕몽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몸을 바닷가에 숨기고, 사람들이 자기를 왕씨로 알까 두려워하여, 왕자(王字) 위에다 사람 인자(人字)를 더하여 성(姓)을 전씨(全氏)로 하니, 여러 세대(世代) 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 하우[夏禹]
전설시대 물길을 다스리는 치수의 전문가 곤은 장장 9년에 걸친 치수사업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처형당한다. 이 힘겨운 도전을 다시 맡은 사람은 다름 아닌 곤의 아들 우였다. 그는 물길을 막아 홍수를 막으려 한 아버지의 폐쇄적 방식을 버리고 물길의 흐름을 여러 갈래 트는 소통의 방식을 택해 마침내 황하를 비롯한 주요 물길을 다스리는 데 성공했다.
어떤 이는 그가 10여 년에 걸친 힘겨운 치수사업 동안 세 번 자기 집 앞을 지나갔는데 한 번도 집에 들르지 않았다는 감동적인 일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 후 우는 엄청난 홍수에서 백성들을 구한 '대우(大禹)'가 되었고, 순한테서 자리를 양보 받아 마침내 천자가 되어 하 왕조를 열었다.
모략가로서 하우를 평가할 때는 우선 부지런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치수라는 일에 얼마나 열심히 매달렸든지 정강이 털이 다 닳아 다시는 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였다. 부지런함은 모든 모략가가 갖추어야 할 첫 번째 필수요건이다. 다음으로 종합적인 관점에서 일을 처리했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이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우는 또 은혜와 위엄을 동시에 갖춘 모략가였다. 강경하게 일을 처리할 때와 덕으로 상대를 다독거려야 할 때를 구분할 줄 알았던 것이다.
도전정신과 창업정신 그리고 그것을 관리할 줄 아는 경영 마인드를 동시에 갖춘 완벽한 모략가의 전형을 하우에게서 보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우 [夏禹] - 홍수를 다스리고, 구정을 주조하다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2005. 10. 20., 차이위치우, 김영수)
◎ 전조망 [全祖望]
중국 청나라의 학자(1704~1755). 자는 소의(紹衣). 호는 사산(謝山). 유종주의 학통(學統)을 이어 교육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수경주≫를 교정하고, 황종희의 미완의 저서 ≪송원학안≫을 완성하였다.
◎ 관면 [冠冕]
벼슬하는 것을 이르는 말
◎ 종정[ 鍾鼎 ]
주(周) 나라 때에 공신(功臣)의 이름을 새겨 넣었던 종과 솥.
◎ 구양수[ 歐陽脩 ]
중국 송나라의 정치가 겸 문인.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 등의 관직을 거쳐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었다. 송나라 초기의 미문조(美文調) 시문인 서곤체(西崑體)를 개혁하고, 당나라의 한유를 모범으로 하는 시문을 지었다.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으며,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주요 저서에는 《구양문충공집》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양수 [歐陽脩] (두산백과)
◎ 하[ 夏 ]
요약
기록상의 중국 고대 왕조. 요순시대 이후 우(禹)가 세운 왕조이다.
요순시대 천자였던 순이 우(禹)에게 천하를 물려주었고 우에 의해 하(夏)왕조가 세워졌다. 하왕조 이후 이어지는 상(商)·주(周)를 합하여 3대라고 병칭하며, 옛 중국에서는 이상적 성대(聖代)로 불려왔으나, 명확한 유적·유물이 남아 있어 고고학적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상나라 이후이다. 하지만 하(夏)는 그 존재 자체가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지 못했을 뿐이지 전승되는 중국 최초의 왕조이다. 전승에 따르면 하(夏)는 우(禹)에서 걸(桀)까지 17왕 472년 동안(BC 1600년 무렵까지) 존속되었다.
《사기(史記)》〈하본기(夏本記)〉에 의하면, 하왕조(夏王朝)의 시조 우왕(禹王)은 기원전 2070년 왕조를 개국하여, 황허강[黃河]의 홍수를 다스리는 데 헌신적으로 노력하여 그 공으로 순(舜)이 죽은 뒤, 제후의 추대를 받아 천자가 되었다. 우는 제위를 민간의 현자에게 양여하려고 하였으나, 제후는 우의 아들 계(啓)를 추대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선양제(禪讓制)가 없어지고 상속제(相續制)에 의한 최초의 왕조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17대의 이계(履癸), 즉 걸(桀)에 이르러 정치가 포악을 극하였으므로 민심을 잃어서 상나라 탕왕(湯王)에게 멸망하였다. 주나라 때에는 허난성[河南省] 동부에 있는 기(杞)나라가 하의 후예라고 칭하였으나, 만일 하왕조가 실재해 있었다면 그 위치는 오히려 산시성[山西省] 남서부를 중심으로 한 황토대지(黃土臺地)에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또, 고대 중국에서는 오랑캐에 대하여 중국의 제후를 중화(中華)·화하(華夏)라고 총칭하였다. 한편, 유목민족인 흉노(匈奴)를 하의 후예라고 하는 설 따위도 《사기》에는 나타나지만 객관적으로 입증되지 않고 있다.
청의 고증학과 근대 역사학의 발달 과정에서 고대 전승에 대한 비판이 나타나 하왕조에 대한 것을 허구로 판단하는 시각이 확산되어있다. 하지만 고고학이나 갑골문의 발견 등으로 하왕조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연구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한편 이리두(二里頭) 문화가 발견되었을 때 하왕조의 실재를 증명해줄 유적으로 관심을 모았지만, 지금은 대체로 상을 건국한 집단과의 문화적 연계로 확인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 [夏] (두산백과)
◎ 상[ 商 ]
요약
중국 고대의 왕조(BC1600~BC 1046).
상(商)은 문헌에 따라 은(殷)이라는 명칭도 나타나 한때는 국가의 명칭을 은(殷)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은은 상왕조의 마지막 수도일 뿐이며, 은(殷)이라는 명칭은 상 왕조가 멸망한 뒤 주(周)에서 상의 주민들을 낮게 호칭하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정확한 명칭은 상(商)이다.
하(夏)·상(商)·주(周) 3대의 왕조가 잇달아 중국 본토를 지배하였다고 하나, 전승되는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왕조는 그 존재 자체가 아직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지 못했다. 다행히 상왕조는 20세기에 들어서 그 수도에 해당하는 은허(殷墟)의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적어도 그 후기에는 당시의 문화세계였던 화북(華北)에 군림하였던 실재(實在)의 왕조였음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상은 고고학적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중국의 가장 오랜 국가이다. 상나라 전기는 기원전 1600년부터 1300년까지이고, 도읍을 은으로 바꾼 상나라 후기는 1300년부터 1046년까지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상 [商] (두산백과)
◎ 종주[宗主]
중국 봉건 시대에, 제후들 가운데 패권을 잡은 맹주.
◎ 흥국(興國)
중국 송(宋)나라 제2대 태종(太宗)이 쓴 연호의 하나.
연도 : 976-984
① 전씨대동종약원(全氏大同宗約院)
초 대 종약장 전면조(1917---1932)
제02대 종약장 전면조
제03대 종약장 전성욱 (1932---1946)
제04대 종약장 전병기 (1946---1959)
제05대 종약장 전부일 (1959---1961)
제06대 종약장 전예용 (1961---1965)
제07대 종약장 전윤환 (1965---1967)
제08대 종약장 전달현 (1967---1968)
제09대 종약장 전부영 (1968---1970)
제10대 종약장 전규설 (1970---1974)
제11대 종약장 전선한 (1974---1981)
제12대 종약장 전선한
② 전씨총보(全氏總譜)
기본정보
서지
분 류 :사부
작성주체 :전면조(全冕朝) 편집(編輯)
작성시기 :1931
형태사항 :크기: 33.3x22.0 /
판 본 : 신연활자본(新鉛活字本) /
장 정 : 선장(線裝) /
수 량 : 12권(卷) 12책(冊) /
인장정보 : 藏書閣圖書印
청구기호 : K2-1781M/F
번 호 : MF35-4824~4825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전병훈 [ 全秉薰 ]
요약
정신철학을 제창한 구한말의 유학자 및 도교 사상가.
출생-사망/1857 ~ 1927
자는 서우(曙宇), 호는 성암(成庵) 또는 운취당(云醉堂)이며 현빈도인(玄牝道人)이라고도 한다. 조선 철종 9년 1857년 7월 6일, 평안동도(현 평안북도) 삼등현(三登縣) 학서리(鶴棲里)에서 부친 전경(全璟)과 모친 완산 이씨의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전병훈의 생애는 그의 학문 여정에 따라 유학기(儒學期, 1857~1909), 선도기(仙道期, 1910~1916), 정신철학기(精神哲學期, 1917~1927)의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유학기
출생에서부터 관직에 나가 퇴직에 이르기까지, 전병훈(全秉薰)의 인생 전반을 아우르는 시기로 유학에 몰두하여 춘추대의와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내세운 시기이다. 1867년 11세에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계열의 학자인 운암(雲菴) 박문일(朴文一)의 문하에서 처음으로 성리학을 접했다. 1892년 그의 나이 35세 때에 의금부 도사를 제수 받고 관직에 나갔으며, 1898년 사회개혁 내용과 근거를 담은 《백선미근(百選美芹)》을 상소로 올리면서 인재등용과 군사개혁을 주장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전전하다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제기하는 상소를 올리고 좌천을 당하여 1907년 50세 때에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선도기
중국으로 건너가 고공섬(古空蟾)이라는 스승을 만나 도교수련에 매진한 시기에 해당한다. 1910년 광동으로 건너간 전병훈은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를 연구하는 한편, 한중대동학회(中韓大同學會)를 설립하여 중국학자들과 교류를 하고자 하였다. 이후 광동성(廣東省) 증성현(增城縣) 나부산(羅浮山)에 있는 도교 사당인 충허관(沖虛觀)에 들어가 고공섬이라는 도사(道士)를 만나 본격적인 도교수련을 시작하였다. 도교경전인 《도장(道藏)》 2천여 권을 연구하고 배움을 정리하여 《도진수언(道眞粹言)》이라는 책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정신철학기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한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을 집필하고 세상에 이를 전파한 말년 시기를 말한다. 원고 집필에 착수한 것은 1917년부터로, 그의 나이 60세에 북경으로 올라와 중국인 제자 우람전(于藍田)과 조선인 윤효정(尹孝定)을 만나 《천부경(天符經)》에 주석을 달고 이를 바탕으로 《정신철학통편》을 완성하였다. 이후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정신철학사(精神哲學社)라는 조직을 결성, 운영하였으며 이를 매개로 하여 다양한 중국 개혁사상가들과 교류하기도 하였다.
주요 사상
핵심 사상인 정신철학(精神哲學)은 도교의 사상을 현실에 맞게 새롭게 정립한 것으로 도교적 이론에 유교적 이념을 가미한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전병훈은 기존의 도교 내단사상이 지나치게 개인적인 목표 즉, 신선이 되고자 하는 이상에 치중하여 이상사회 건설이라는 사회 공익적 목표에 소홀했음을 지적하였다. 이에 도교에 부족한 경세론(經世論)을 보완하기 위해 유교의 대동사회(大同社會) 이론을 받아들여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이념을 도교 사상 내에서 구현하였으며, 현실 속에서 이를 구현할 정치제도로서 민주제(民主制)와 공화정(共和政)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저서
대표 저작으로 《정신철학통편 精神哲學通編》이 있으며, 이 외에 도교 내단학 사상을 정리한 《도진수언 道眞粹言》 십권, 《백선미근 百選美芹》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병훈 [全秉薰] (두산백과)
◎ 紹 이을 소, 느슨할 초
1. 잇다 2. 돕다 3. 소개하다(紹介--), 알선하다(斡旋--) 4. 받다 5. 노끈(실, 삼, 종이 따위를 가늘게 비비거나 꼬아서 만든 끈) a. 느슨하다 (초) b. 헐겁다 (초)
◎ 初 처음 초
1. 처음, 시초(始初) 2. 시작(始作) 3. 시종(始終: 처음과 끝) 4. 초승(初生), 초순(初旬) 5. 근본(根本), 근원(根源) 6. 본래(本來) 7. 옛일 8. 이전(以前), 종전(從前), 옛날 9. 첫, 첫째 10. 처음으로...
◎ 洎 물 부을 계,물 부을 게,물 부을 기
1. 물을 붓다(액체나 가루 따위를 다른 곳에 담다) 2. 스미다, 배어들다 3. 적시다 4. 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及), 이르다(어떤 정도나 범위에 미치다) 5. 및, 과(와) 6. ~부터
◎ 勗 힘쓸 욱
1. 힘쓰다 2. 노력하다(努力--) 3. 권면하다(勸勉--: 알아
◎ 遑 급할 황
1. 급하다(急--) 2. 허둥거리다 3. 한가하다(閑暇--), 여유롭다(餘裕
◎ 麗 고울 려, 고울 여
1. 곱다 2. 아름답다 3. 맑다 4. 짝짓다 5. 빛나다 6. 매다 7. 붙다(부착) 8. 나라의 이름 9. 마룻대(용마루 밑에 서까래가 걸리게 된 도리) 10. 짝 11. 수, 수효(數爻)
◎ 貽 (끼칠 이)
1. 끼치다 2. 남기다 3. 전하다(傳--) 4. 주다 5. 증여하다(贈與--)
◎ 기려불억[ 其麗不億 ]
그 수가 매우 많음. 억수로 많음. 麗(려)는 數(수). 출전 詩經(시경) 大雅(대아) 文王篇(문왕편).
◎ 무도 [ 舞蹈 ]
조회 때에 신하가 임금 앞에서 행하는 의례(儀禮) 절차의 하나. 손을 휘두르고 발을 구르는 형태를 취함.
◎ 만수 (萬殊)
모든 것이 여러 가지로 다 다름
◎ 태극 [ 太極 ]
정의
유학, 특히 성리학에서 모든 존재와 가치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 실체를 가리키는 유교용어.
내용
≪주역≫ 계사(繫辭)의 “역(易)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兩儀 : 음양)를 낳는다.”고 한 데서 유래했지만, 의미상으로는 선진유학의 천(天) 개념과 연관성을 가진다.
역의 우주관은 역에 태극이 있고 여기서 음양→4상(四象)→8괘(八卦)로 전개되는데, 앞의 문장에서 ‘이것이’라는 말이 태극만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또한 태극으로 본다 해도 ‘낳는다’는 표현이 시간적 선후가 있는 유출론적인 것인가, 아니면 존재론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올 수 있다. 후에 여러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는데, ≪한서≫ 율력지(律曆志)에는 태극을 원기(元氣)로 보았고, ≪주역정의 周易正義≫에서는 천지가 나누어지기 이전에 혼돈 상태로 있는 원기로 보았다.
이는 모두 당시 팽배하던 노장사상의 영향 속에서 태극을 기(氣)로 본 것이다. 즉, 원기인 태극에서 음양이 유출되어 나오는 것으로 본 것이다.
송나라의 주돈이(周敦頤)는 ≪태극도설 太極圖說≫을 지어 ≪주역≫에 나타난 본체관을 좀더 상세히 설명하려 했는데, 무극(無極)과 동정(動靜)의 개념을 첨가해 “무극이면서 태극이다. 태극이 동하면 양이 되고, 정하면 음이 된다.”고 하였다. 또한 오행(五行)을 덧붙여 태극→음양→오행→만물의 우주론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이 과정을 역추(逆推)해 “오행이 음양이고, 음양이 태극이며, 태극이 무극이다.”고 말한 점에서 단순히 유출론적 우주론을 주장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주자(朱子)는 이 태극을 이(理)로 규정해 형체도 없고 작용도 없는 형이상학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자가 존재자이게 할 수 있는 근원 존재로 보았다. 이러한 태극은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원인이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현상의 존재자들 모두의 속에도 이치로서 들어 있다.
이는 태극에서 만물이 나왔다는 논리에서 볼 때, 만물 속에 태극이 그 원인자로 존재하게 되는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태극은 만물의 총체적인 보편 원리인 동시에 특수한 개별자들의 특수 원리가 된다.
이 양면성이 보편 원리라는 점에서는 ‘통체태극(統體太極)’으로 나타나고, 특수 원리라는 점에서는 ‘각구태극(各具太極)’으로 표현된다. 이런 사실은 태극을 통해 특수와 보편을 서로 연계시켜 이해하는 것이다.
즉, 태극은 현상으로 드러나는 음양·오행·만물 속에 내재하는 보편의 원리이며, 또 개별적 존재자의 실(實)과 서로 상함(相涵)되어 있는 개별 존재의 원리이다. 따라서 현상으로 드러난 변화를 말할 때에는 태극에 동정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변화의 원인을 말할 때에는 태극은 본연의 묘(妙)이며 동정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 된다.
명대에 이르러 왕수인(王守仁)은 심즉리(心卽理)의 입장을 취해 ≪전습록 傳習錄≫에서 태극을 ‘생생하는 이치(生生之理)’로 파악했고, 명말·청초의 왕부지(王夫之)는 ≪주역내전 周易內傳≫에서 “음양이 섞여 있는 이치일 뿐”이라고 하여, 태극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음양의 양면성을 함께 갖추고 동정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는 상대성을 가진 존재로 파악하였다.
우리 나라의 성리학은 본체론 보다 심성론이 주된 관심사이었지만, 태극에 대한 이해는 성리학적 심성론 전개의 바탕이 되는 까닭에 조선 초기에 매우 중시되었다. 초기의 이러한 관심은 이언적(李彦迪)에게서 두드러진다. 그는 태극을 초월과 실재의 양면을 지닌 존재로 보아, 그 초월성이란 지극히 가깝고 지극히 사실적인(至近至實) 실재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태극을 혼연(渾然)과 찬연(粲然)의 양면을 함께 지니고 있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초월적 근원자이면서도, 불교나 도가에서 말하는 허무(虛無)·적멸(寂滅)의 본체가 아니라, 빈 듯하면서도 있고(虛而有), 움직임이 없으면서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寂而感) 존재로 이해한다.
따라서 작용이 없는 고요함 속에 이미 능동성을 포함하고 있고, 이 능동성이 현실로 드러날 때 천하의 근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주자를 계승해 태극은 이(理)이고 만물에 앞서 있는 존재로 보아서, 이(理) 우위의 가치중시 철학을 정립해갔다.
한편, 이언적과 거의 동시대에 서경덕(徐敬德)은 이와는 다른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는 장자(莊子)와 장재(張載)의 영향 아래 주기적(主氣的)인 입장에서 태극을 해명하였다.
그는 우주의 본질을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나누고, 선천은 태허(太虛)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태허의 본질은 허(虛)인데, 이것이 곧 기(氣)라 하였다. 그러므로 선천에는 기만 존재하고, 후천에 드러날 때 선천의 일기(一氣)가 지닌 양면성이 동정을 통해 나타나는데, 그 원인이 바로 태극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서경덕에게 태극이란 후천에서만 그 묘(妙)를 드러내는 존재로서, 기의 변화 자체가 가지는 합리적 법칙이며 궤도로 이해된다. 변화를 중시한 서경덕은 본체를 기로 파악함으로써 태극을 변화의 법칙 정도로 낮춘 것이다.
이언적과 서경덕의 태극관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황은 이의 능동성을 말한 이언적을 높인다. 즉, 태극은 음양·동정과 떨어져 있지 않다는 불리성(不離性)을 말하면서도, <비이기위일물변증 非理氣爲一物辯證>을 통해 이기의 부잡성(不雜性)을 강조하였다.
그는 태극을 존재론만이 아니라, 도덕적 측면으로 이해해 남시보(南時甫)에게 준 편지에서 “태극의 극은 단순한 지극의 의미가 아니라, 거기에 표준의 의미를 겸해 사방에서 그를 본받아 바로잡아가는 것”이라며 태극을 극존무대(極尊無對)의 것으로 높였다.
또한 이달(李達)·이천기(李天機)에게 보낸 편지에서 “태극에 동정이 있다는 것은 태극이 스스로 동정한다는 것”이라고 하여, 태극을 능동적 존재로 이해하였다. 이처럼 태극에 대한 능동적 이해와 이·기를 나누어보려는 논리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나누어 보는 인성론의 바탕이 되었고, 이발(理發)도 가능하다는 호발설(互發說)을 성립시켰다.
이와 달리 이이는 태극이 모든 변화의 근본 원인이라고 이해하면서도, 태극은 독립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 속에 있다는 불리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박화숙(朴和叔)에게 보낸 편지에서 “음양이 생기기 전에 태극만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여, 움직이는 실체는 기이고 이는 그 원인자로 보아서 태극의 능동성을 부정하고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였다.
송익필(宋翼弼)은 <태극문 太極問>을 통해 태극에 관한 여러 학설들을 물음의 형태로 종합하고, 이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 밖에 장현광(張顯光)은 <태극설 太極說>·<무극태극설 無極太極說>·<주자태극도설 周子太極圖說> 등을 지어 태극의 연원과 개념에 대한 자세한 해명을 하였다.
정종로(鄭宗魯)는 <태극권자설 太極圈子說>과 <태극동정설 太極動靜說>을 지었으며, 유중교(柳重敎)는 <태극도설잡지 太極圖說雜識>에서 ≪태극도설≫을 해명하면서 태극 개념을 밝히고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태극 [太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췌괘 [ 萃卦 ]
정의
『주역』 64괘 중 45번째에 있는 유교기호. 괘명
내용
췌(萃)는 풀들이 무리를 지어 무성하게 자라나는 모습을 뜻하는 글자인데, 여기에서 모으다[聚]라는 의미가 생겨났다. 괘상을 보면, 땅위에 물이 고여 있는 모습이며, 또한 두 개의 양효를 중심으로 네 개의 음효가 집중되어 있는 모습이다.
췌괘는 인심을 모으는 방법에 관하여 말해주는 괘로서, 59번째 괘인 환괘(渙卦)와 상반되는 괘이다. 인심을 한 곳으로 모으는 방법은 괘사에서 “왕이 종묘에 이르러 제사를 드린다. 대인을 보는 것이 이로우니 올바름을 지켜야 이롭다. 커다란 희생을 바치는 것이 길하고, 가는 것이 이롭다.”라고 한 바와 같이 종묘를 건립하고 정성을 다하여 효향(孝享)을 극진히 하는 것이 우선이다.
종묘는 조상의 영혼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제사지낼 때, 사람들은 한 조상을 둔 후손임을 확인하고 혈연적 일체감을 체험하게 된다. 또한 훌륭한 지도자가 정당한 이념과 방법으로 통치할 때에 인심이 통일될 수 있음을 괘사는 주장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췌괘 [萃卦]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균전사 [ 均田使 ]
요약
조선시대의 관직.
각 도의 전답을 정확히 조사하기 위하여 파견한 어사(御史)로, 전답의 측량뿐만 아니라 품등(品等)도 결정하고, 민정을 살펴 부정의 유무를 조사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각 도의 수령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가 당하관(堂下官)이면 균전사 단독으로 치죄하고, 당상관일 경우에는 왕에게 보고하여 치죄하게 하였다.
도감관(都監官) 이하도 단독으로 처벌 또는 견책할 수 있고, 만약 중신(重臣)이 관련되었을 때는 상부에 보고하여 처단하게 하였다. 그러나 품등 결정과 부세(賦稅) 결정 등에서 폐단이 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균전사 [均田使] (두산백과)
◎ 북송 이종(理宗)황제
대수 |
묘호 |
이름 |
연호 |
즉위년일 |
퇴위년일 |
재위 기간 |
능호 |
14 |
이종 (理宗) |
조윤(趙昀) |
보경(寶慶, 1225년 ~ 1227년) |
1224년 9월 17일 |
1264년 11월 16일 |
40년 60일 |
영목릉(永穆陵) |
' 인물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경선(全敬先) (0) | 2021.02.02 |
---|---|
전량범 [ 全良範 ] (0) | 2021.01.30 |
행정안전부 장관 ( 전해철 ) (0) | 2021.01.27 |
‘님의 침묵’에 빠져 평생을 바친 사람! [ 전보삼 ] (0) | 2021.01.22 |
전유 [ 全柔 ] (0) | 2021.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