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 고찰 [ 전익지(全益祉) ]

2021. 2. 5. 11:18 인물열전

승정원일기 275책 (탈초본 14책) 숙종 6년 2월 4일 갑자 10/10 기사 1680년 康熙(淸/聖祖) 19년沈璛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有政。吏批, 以沈璛爲醴泉郡守, 李元祿同義禁, 權尙任爲豐基郡守, 洪萬朝爲兵曹佐郞, 辛必馨爲監察, 金是鉉爲承文校檢, 睦昌明爲吏曹參議, 全益祉爲東部主簿, 具仁熙爲典籍, 李最晩爲繕工副正, 申命伯爲歸厚別提, 洪璡爲工曹正郞, 李煦爲長湍府使, 金麟至爲連原察訪, 申懹爲咸鏡都事, 朴純爲刑曹參議, 李華鎭爲司諫, 李元祿爲知義禁, 權珪爲兵曹佐郞, 李麟徵爲正言, 閔就道爲大司諫, 朴琳爲橫城縣監, 權脩爲水原府使。政軸

 

◎ 동부 [ 東部 ]

 

구분

동명 > 조선시대 행정구역

조선왕조는 개국 후에 1394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후 1395년 6월 6일에 한양을 한성부로 개칭하고, 태조 5년(1396) 4월에 한성부 행정구역을 동부 · 서부 · 남부 · 북부 · 중부 등 5부로 나누고, 이를 다시 52방으로 구획해서 방명표(坊名標)를 세우게 하였다. 한성부의 관할구역은 ≪세종실록≫ 지리지에 도성 밖 5리~10리까지로 하였는데 이를 ‘성저오리’, 또는 ‘성저십리’라고 하였다.

동부는 5부 중의 하나로서, 도성 안에 연희방 · 숭교방 · 천달방 · 창선방 · 건덕방 · 덕성방 · 서운방 · 연화방 · 관덕방 · 흥성방 등 10개 방이 있었고 성 밖에는 숭신방과 인창방 2개 방이 있었다. 그 후 큰 변화가 없다가 영조 때에 와서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영조 27년에 반포된 수성책자(守城冊子)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연희방 · 천달방 · 덕성방 · 서운방 · 흥성방 · 관덕방 등 6개 방을 폐지하여 12개 방에서 6개 방으로 되었다. 고종 2년(1864)에 발간된 ≪육전조례≫에는 경모궁방이 신설된 것 외에는 한성부 5부제는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골격은 변함없이 유지되다가, 갑오개혁 때 경모궁방이 폐지되고 숭신방을 성내외로 분리하고 부(部) 명칭만 서(署)로 바뀌었다.

1910년 10월 1일 일제에 의해 한성부가 경성부로 개칭되고 경기도에 예속되었으며 1911년 4월 1일에 경기도령 제3호로서 경성부의 행정구역을 개정하여 도성 안을 5부 36방으로 하고 도성 밖을 8면으로 하는 5부8면제를 실시할 때 숭신방은 숭신면으로, 인창방은 인창면으로 바뀌어 동부에서 제외되었다. 동부는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로 지금까지 실시해오던 방(坊) · 계(契) · 동(洞) 제도를 폐지하고 경성부 행정구역을 186개 동(정 · 정목 · 통 포함)으로 하여 경성부가 직할할 때 폐지되었다. → 동서 [조선시대 행정구역]

참고문헌

세종실록, 도성삼군문분계총록, 육전조례(1864년)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동부 [東部] (서울지명사전, 2009. 2. 13., 서울역사편찬원)

 

◎ 주부 [ 主簿 ]

 

정의

조선시대 관서의 문서와 부적(符籍)을 주관하던 종6품 관직.

내용

1392년(태조 1) 7월 신반관제(新頒官制)에서는 고려말의 관제를 승습하였다. 이 때 종6품의 주부(注簿)·승(丞)·부사(副使)와 종8품의 주부(注簿)가 있었는데, 이들이 차차 개변되어 1466년(세조 12)에 종6품의 주부(主簿)로 개칭되었다.

그 소속 아문과 구성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경국대전』에 의하면 돈녕부·봉상시·사복시·군기시·관상감·훈련원에 각각 2원, 종부시·사옹원·내의원·상의원·내자시·내섬시·사도시·예빈시·사섬시·제용감·선공감·사재감·장악원·풍저창·광흥창·전의감·의영고·장흥고·양현고·전생서·혜민서·전옥서·사역원·사온서에 각각 1원, 군자감에 3원, 5부에 5원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 뒤 조선 후기까지 변동이 없다가 1746년(영조 22)에 이르러 한성부에 새로이 1원을 두었고, 돈녕부는 2원에서 1원, 군자감은 3원에서 1원, 관상감도 2원에서 1원을 감원하였으며, 장악원은 오히려 1원에서 2원, 훈련원은 2원에서 18원이나 증치되었다.

이어 1785년(정조 9)에 한성부는 1원에서 2원으로 증치되고 평시서에 1원이 새로이 설치되었다. 이와 같이 큰 변동 없이 부분적으로 증감이 되거나 치폐가 있어오다가 1865년 조선 말기에 이르면 사옹원은 2원에서 3원, 예빈시·장흥고는 각각 1원에서 2원으로 증치되고, 훈련원은 18원에서 20원이나 증치된 38원으로 개변된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완전히 정비된 주부는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그대로 변동 없이 존속하였다.

참고문헌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주부 [主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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