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21. 21:56ㆍ 인물열전
정선 전씨 합보서 (1795년)
[번역문 (2021년 전과웅 번역)]
오호라.
세대(世代)가 멀고 지파(支派)가 번성(繁盛)함에 따라 종족(宗族)을 합하여 열조(烈祖)를 받들기 위해 족보(族譜)를 닦음이로다. 가문마다 종법(宗法)을 밝힘이 소중(所重)함이니 전씨(全氏)들도 그 도리(道理)를 다했음이라.
전씨(全氏)가 백제(百濟)로 시작(始作)하여 8세에 정선군(旌善君)을 봉(封)하니 신라조정(新羅朝庭)에서 공훈(功勳)을 세웠기에 정선(旌善)에서 살게 하니 이로 인(因)하여 정선(旌善)을 본관(本貫)으로 삼다.
그 후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두 시대(時代)에 공훈(功勳)을 인정받아 군(君)을 봉(封)한 열조(烈祖)가 12분이니 각각 봉군(封君)한 곳을 관(貫)으로 삼았다.
조선조정(朝鮮朝庭)에 들어와 채미헌(採薇軒) 전오륜公이 계시니 실(實)로 포은(圃隱) 정몽주선생에 비길만한 인물(人物)이다. 부제학 사서(沙西) 전식公이 계시고 참판(參判) 학송(鶴松) 전유형公이 계시니 원사(院祠)에 배향 받으시니 곧 퇴계(退溪) 선생의 종유인(從遊人)이라.
이어서 벼슬한 분들과 은덕(隱德)이 계신 분들을 다 기록(記錄)치 못하고 대개 정선군(旌善君)으로부터 지금까지 50여세에 1600여년 오랜 세월(歲月)에 자손(子孫)이 창성(昌盛)하여 12파에 각각 전승(傳承)함을 잃지 아니하였다.
세대(世代)가 멀어진 즉 번성(繁盛)하는 것은 자연(自然)의 이치(理致)이니 무성(茂盛)해서 막힘이 없으니 문득 유덕(遺德)을 갚음이 어렵도다.
세대(世代)가 멀어짐이 이와 같고 번성(繁盛)함이 또 이와 같아서 아득히 먼 모든 자손(子孫)이 능히 제족(諸族)을 거두고 종족(宗族)을 공경(恭敬)하는 의리(義理)를 알아서 이제 이 족보(族譜)를 합하게 되었다. 이제 하나가 시작(始作)되니 이로 인(因)하여 전씨(全氏) 성(姓)을 지닌 사람은 비록 말 배우는 어린아이라도 다 정선군(旌善君) 전선(全愃)이 중시조(中始祖)임을 알게 되었다.
누대(累代)에 쌓은 큰 덕(德)에 크게 보덕(報德)하는 아름다운 법이 지금까지 이어져 그 자손에 게 이르렀다. 군자들이 이른바 계보(系譜)를 밝혀서 종족(宗族)을 거두어 종법(宗法)을 세워서 열조(烈祖)를 높임이니 전씨(全氏)도 어찌 그와 같이 아니하리오.
생원진사를 많이 배출하는 집안이니(上舍) 곧 나라에 공로(功勞)가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閥閱)의 아름다운 선비들이라
옛날부터 아는 사이인 사람(전씨 문중)[嘗有素]이 지난 날 어느 하루에 나를 만나서 말하기를
우리 종족(宗族)은 합보(合譜)에 대한 의론(議論)이 올해뿐 아니라 오래전부터 있어왔었다. 문헌(文獻)에 의한 검증(檢證)이 부족하고 신(辛)년임(壬)년에 발간(發刊)한 족보(族譜)가 어지럽고 어긋남(紊錯)이 많아서, 학식(學識) 있는 사람들의 탄식함이 오래되었다. 종인(宗人) 전치선 전대흡 전덕태 전석경 등이 이를 애석하게 생각하여(慨然) (문헌증거를 찾기 위하여) 눈물을 머금고 대관령(大關嶺)을 넘어서 찾게 되었다. (수소문 끝에) 한 믿을 수 있는 기록(信蹟)을 얻어서 이를 초고(草稿)로 삼아 보책(譜冊)을 완성하게 되었으므로 서문(序文)을 기록하여 주실 것을 나에게 정중히 요청하였다.
내 말하기를 참으로 열조(烈祖)를 숭앙(崇仰)하는 사람들이로다. 아득한 자취를 찾아내어 능히 그 근본(根本)을 중히 여기고 종족(宗族)을 공경(恭敬)하는데 마음을 다 했으니 더욱 공경(恭敬)할만하다.
드디어 사양(辭讓)치 못하고 간략히 그의 세덕(世德)을 서술(敍述)하여 돌려주노라.
숭정기원3 을묘(정조19년 서기 1795년) 계동
정헌대부 의정부 우참찬 병조판서 홍문관 제학 구상 찬
[해문 (1990년 경오보)]
嗚呼라
世代가 멀고 繁盛함으로 宗族을 合하여 烈祖를 받드는 것이 族譜를 닦아 宗法을 밝힘이 所重함이니 全氏들이 其道理를 다했음이라
全氏가 百濟로 始作하여 八世에 旌善을 封하니 新羅朝에 受勳으로 旌善에서 살게 하니 이로 因하여 旌善을 本貫으로 삼다. 그 후 新羅와 高麗 두 時代에 功勳을 받아 君을 封한 烈祖가 12분이 各各 其封한 곳을 貫을 삼았다.
李朝에 들어와 號 採薇軒이 계시니 實로 圃隱先生에 비길만한 人物이다. 副提學 沙西公이 계시고 參判 號 鶴松이 계시니 院祠에 拜享받으시고 곧 退溪先生의 從遊人이라
이어서 벼슬한 분들과 隱德이 계신 분들을 다 紀錄치 못하고 대개 旌善君으로부터 只今까지 五十餘世에 千六百餘年 오랜 歲月에 子孫이 昌盛하여 12派에 各各 其傳한 것을 잃지 아니하였으니 世代가 멀어진즉 繁盛하는 것은 自然의 理致이니 茂盛해서 막힘이 없으니 문득 遺德을 갚음이 어렵도다.
世代가 멀어짐이 이와 같고 繁盛함이 또 이와 같아서 아득히 먼 모든 子孫이 能히 諸族을 거두고 宗族을 恭敬하는 義理를 알아서 이제 이 族譜를 合하니 其 하나가 始作되니 이로 因하여 全氏로 姓한 사람이 비록 말 배우는 어린아이라도 다 旌善君이 始祖됨을 알게 하니 累代에 쌓은 큰 德과 크게 報德하는 아름다운 法이 只今에 이르러 其子孫에 끼쳤으니 君子들이 이른바 系譜를 밝혀서 宗族을 거두며 宗法을 세워서 烈祖를 높임이 어찌 全氏와 같으리오.
譜系가 호활하니 곧 繁列한 집안의 아름다운 선비들이라
내 일찍 先祖의 글 지음이 있더니 하룻날에 나한테 알려 말하기를 우리 宗族은 合譜의 議論이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文獻의 證據가 없고 辛年壬年에 發刊한 族譜가 착오됨이 많아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歎息함이 오랬더니 宗人 致善 大歙 德泰 錫璟 等이 이를 慨歎하여 눈물을 머금고 大關嶺을 넘어서 한 믿을 수 있는 史蹟을 얻어서 겨우 譜冊을 이루었으니 한 말씀으로써 記錄하신 序文을 나에게 얻기를 願한다. 하니 내말하기를 참으로 烈祖를 崇仰하는 사람들이다.
아득한 자취로서 能히 그 根本을 重히 여기고 宗族을 恭敬하는데 마음을 다했으니 더욱 恭敬할만하도다. 드디어 사양치 못하고 簡略히 그의 世德을 敍述하여 돌려주노라.
[原文]
嗚呼世遠而支衍合族以尊祖此乃譜家之所重宗法之由明而全氏其庶幾乎全肇自百濟八世而有旌善君羅朝以勳食采于旌善仍籍焉其後羅麗兩朝封勳者十一各以封氏焉入我朝有號採薇軒實圃隱之流也有副提學號沙西參判號鶴松掇享俎豆即退陶之士也襲冠冕抱隱德者不可彈述盖旌善君祗今五十一世千六百餘年久而子孫熾昌十二派能各不失其傳世遠則支衍固自然之理而盛而不替抑毓德之報也歟難矣哉也之遠如是支之衍又如是而殘孫末裔猶能知收族敬宗之義今此合譜之擧亦其一端而爲之兆耳於是乎以全爲氏者雖學語小兒咸知旌善君之爲其祖而積累之盛錫報之美式至于今貽厥子孫君子所謂明系譜而收族立宗法而尊祖者豈不然乎全上舍最浩即閥閱佳士也嘗有素一日謁余曰吾宗合譜之議匪今斯今而文獻無徵辛壬之刊率多紊錯識者之歎久矣宗人致善大歙德泰錫璟慨然於淚含斯跋關嶺得一信蹟底于成書願得一言以記之余曰是眞知尊祖者也以遐荒之跡能盡心於重本敬宗尤可敬也遂不能辭略敍其世德而歸之
崇禎紀元後三乙卯季冬 正憲大夫議政府右參贊兵曹判書弘文館提學 具庠 撰
◎ 신(辛)년임(壬)년에 발간(發刊)한 족보(族譜)
1761년 辛巳譜 (정선전씨 세보)를 지칭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 전오륜(全五倫)
정의
고려후기 우상시, 좌산기상시,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관리.문신.
개설
본관은 정선(旌善). 호는 채미헌(採薇軒). 대제학(大提學) 전분(全賁)의 아들이다. 고려 말에 고관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이성계 세력에 의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창업되자,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켜 두문동으로 들어간 인물로서 유명하다.생애 및 활동사항1373년(공민왕 22) 과거에 급제하였다. 1391년(공양왕 3) 우상시(右常侍)·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형조판서(刑曹判書)를 차례로 역임하였다.1392년(공양왕 4)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가 조선 태조에 의하여 본향안치(本鄕安置)의 처벌을 받았다. 이때 본향안치된 인물이 성석린(成石璘)·이윤굉(李允紘)·유혜손(柳惠孫)·안원(安瑗)·강회중(姜淮中)·신윤필(申允弼)·성석용(成石瑢)·정희(鄭熙) 등인데, 이들 중 성석린과 같이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살았던 인물들도 있었다. 뒤에 풀려나서 서운산(瑞雲山, 강원도 정선 소재)에 은거하였다.두문동 72인 중의 한 사람이며, 뒷날 경상남도 안의(安義)에 소재한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전오륜의 유고(遺稿)와 행적 관련 자료를 모아놓은 책이 『채미헌실기(採薇軒實記)』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태조실록(太祖實錄)채미헌실기(採薇軒實記)「채미헌 전오륜의 생애와 업적」(김대순,『강원문화사연구』14,강원향토문화연구회,2009)「소위 ‘두문동72현’의 정치성향」(김정자,『부대사학』15·16,1992)
집필자
집필 (1995년) 이희덕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전오륜(全五倫))]
◎ 전식 [ 全湜 ]
정의
조선시대 대사간,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 전팽조(全彭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혼(全焜)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전여림(全汝霖)이며, 어머니는 월성이씨(月城李氏)로 참봉 이신(李信)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해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김응남(金應南)의 추천으로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이 되었다.
1599년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으로 전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03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607년 전적·예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1611년 울산판관이 되어 고을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다음해 전라도도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 산수를 유람해 세칭 상사(商社)의 삼로(三老)라 일컬어졌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새 왕이 등위하자 예조정랑에 이어 수찬·교리가 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태복시정(太僕寺正)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천안에 이르러 집의가 되었으며,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와 원수 장만(張晩)의 실책을 논하였다. 이어 병조참의·병조참지에 승진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대사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어했고, 왕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와 예조참판에 임명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계(陞階)했으나 사양하였다.
1638년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대사성이 되었다. 왕이 순검사에 명해 하삼도의 수군을 정비하게 했으나 적절한 시책이 아니라고 반대하였다. 1642년 자헌(資憲)의 품계에 오르고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그 뒤 재차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상주 백옥동서원(白玉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사서집(沙西集)』
『용주유고(龍洲遺稿)』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응속잡록(凝續雜錄)』
『응천일록(凝川日錄)』
『묵재일기(默齋日記)』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전식 [全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전유형(全有亨)
정의
조선시대 청안현감, 광주목사,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숙가(叔嘉), 호는 학송(鶴松). 아버지는 전인(全絪)이다.생애 및 활동사항괴산의 유생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이듬해 왜군을 방어하기 위한 책략 10여조를 올려 선조의 칭찬을 받았으며, 재주를 인정받아 군자감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사임하였다. 이 때 다시 민심수습방안 등을 상소해 유성룡(柳成龍)으로부터도 주목받아 1594년(선조 27) 특별히 청안현감에 임명되었으며 충청도조방장을 겸해 왜적의 격퇴에 노력하였다.1603년에는 붕당타파·세자보호 등을 포함한 시사(時事)에 관한 15조목의 소를 올려 조정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605년 40세의 나이로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감찰로 발탁되었으나 전란 중에 부모의 상을 의례에 맞게 치르지 못했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다시 서용되어 함흥판관 등의 외직을 거쳐 분병조참의·광주목사(廣州牧使)·형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이이첨(李爾瞻)과 세력을 다투던 임취정(任就正)과 결탁해 이이첨을 탄핵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의술에도 조예가 깊어 광해군과 왕비의 병을 고치는 데 참여했으며 「오장도(五臟圖)」도 그렸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도 재능을 인정받아 문안사로 발탁되어 모문룡(毛文龍)에게 가서 군량을 계속 대기 어려운 연유를 설명하고 이를 주선했으며, 평안도를 내왕할 때 창성·의주 등 성의 방비상태를 아울러 살피고 돌아왔다.1623년(인조 1) 동지중추부사 때 이유림옥사(李有林獄事)가 일어나자, 그를 석방해 벼슬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당류를 고변하게 하자고 청했다가 조정을 멸시했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난군과 내응했다는 무고를 받아 정상적인 절차도 없이 성철(成哲) 등 37인과 함께 참형을 당하였다.그 뒤 신원(伸寃)주 01)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42년(영조 18)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학송집』 1권이 전한다. 시호는 의민(義敏)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인조실록(仁祖實錄)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국조방목(國朝榜目)대동야승(大東野乘)
집필자
집필 (1997년)우인수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전유형(全有亨))]
1566년 명종 21년에 출생하여 1624년 인조 2년에 사망하였고 본관은 평강, 자는 숙가, 호는 학송이다. 괴산의 유생으로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군 격퇴에 주력했다. 임란이 끝난 1603년에는 붕당 타파와 세자 보호 등을 포함, 시사에 관해 15조목에 이르는 상소를 올려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전유형은 의술에도 조예가 있어 <오장도>를 그렸고 광해군과 왕비의 병을 고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생존 시 그에 대한 기록이나 그의 문집 어디에도 그가 해부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가 해부를 한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사망 후 한참 뒤인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의 문집에서이다. 이익은 그의 문집인 「성호사설」에서 전유형이 임진 때 세 번에 걸쳐 사체를 해부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출처] https://www.scienceall.com/전유형-2/
◎ 1833년 박지방(朴之芳) 등 소지(所志)
1833년 林之芳 등이 경상도순찰사에게 올린 議送
陳
癸巳正月二十日龍門書院儒生林之芳林鍾典鄭陽騏李龍鎭愼必學
朴履奎鄭大寅全德弼鄭玭金昌益
姜鵬會朴毖洙林之峻全致澤田錫采
尹得濟林長源尹莘濟田錫一郭必濟等
全致善愼處純李寅燮宋廷顯
鄭世岦林致中愼性薰李萬益
愼東建柳應龍愼大圭吳慶會
李基榮劉瑭鄭瑬洪秉圭
金希冕成致協姜龍會鄭師天
兼使(押)
◎ 이황[ 李滉 ]
개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
[네이버 지식백과] 이황 [李滉]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구상(具庠)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이조참판(吏曹參判)
[인물요약]
자(字) 백은(伯殷)
문무구분 문관
생년 경술(庚戌) 1730년(영조 6)
졸년 미상(未詳) (미상)
시대 조선후기
왕대 영조(英祖)
본관 능성(綾城)
활동분야 관료
항목 이조참판(吏曹參判)
[관련정보]
[문과] 영조(英祖) 35년(1759) 기묘(己卯) 별시(別試) 병과(丙科) 2위(5/12)
[생원] 영조(英祖) 35년(175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8위(13/100)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병조판서(兵曹判書)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예조판서(禮曹判書)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제학(提學)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홍문관(弘文館)
[지방관] 조선후기 지방관 경기도(京畿道) 개성유수(開城留守) 1790[경술(庚戌)]
[관인정보]
제수년월 1772 [임진(壬辰)]
[품관 정보]
품관 종2품
[출전]
『청선고(淸選考)』(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603])
◎ 상사 [ 上舍 ]
①고려 태조 5년(922) 서경유수관에게 둔 벼슬의 하나. ②고려 시대 국자감에 들어가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한 사람을 일컬음. ③조선 시대에 성균관의 유생으로서 생원(生員)•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말함. ④중국 송(宋)나라 태학의 삼사(三舍) 제도 중 마지막 단계를 말함.
[네이버 지식백과] 상사 [上舍]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벌열 [ 閥閱 ]
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음, 또는 그런 집안
[네이버 지식백과] 벌열 [閥閱]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용어사전), 2012.)
대문의 양쪽 기둥을 벌열이라고 하는데 문의 왼쪽기둥을 벌 문의 오른쪽기둥을 열이라고 한다. 중국의 당송이후 작위 있는 집안에 있는 대문에 세운 기둥으로 두 기둥의 간격은 10척으로 주두에는 기와통을 얹는데 이를 오두벌열이라고 한다. 국가에 공을 세운 집안을 뜻하다가 귀족을 일컫는 말로 바뀌었다.
[출처] 삼동학회
◎ 시경(詩經)[주송(周頌)-제3 민여소자지십(第三 閔予小子之什)296-재삼(載芟)-풀 뽑으며
재삼(載芟)-풀 뽑으며
載芟載柞(재삼재작) : 풀 뽑고 나무 베어
其耕澤澤(기경택택) : 밭흙을 갈아엎는다.
千耦其耘(천우기운) : 수없이 짝을 지어 밭 갈고 김맨다.
徂隰徂畛(조습조진) : 낮은 곳 둔덕진 곳에서
侯主侯伯(후주후백) : 가장과 맏아들
侯亞侯旅(후아후려) : 작은 아버지와 여러 자제들 하며
侯彊侯以(후강후이) : 품앗이꾼과 삵꾼
有嗿其饁(유탐기엽) : 여럿이서 떠들썩 들점심 먹으며
思媚其婦(사미기부) : 아내를 반가와 하고
有依其士(유의기사) : 남편을 위로한다.
有略其耜(유략기사) : 날카로운 보습으로
俶載南畝(숙재남무) : 남녘의 밭을 갈기 시작하여
播厥百穀(파궐백곡) : 온갖 곡식 씨앗 뿌리면
實函斯活(실함사활) : 그 씨알 물기 머금고 자라나
驛驛其達(역역기달) : 뾰죽뾰죽 싹이 트고
有厭其傑(유염기걸) : 이른 새싹 예쁘게 돋아나며
厭厭其苗(염염기묘) : 가지런히 자란 싹들
綿綿其麃(면면기포) : 구석구석 솎아주고 김매 준다.
載穫濟濟(재확제제) : 풍성하게 곡식 걷어 들여
有實其積(유실기적) : 차곡차곡 쌓인 노적가리
萬億及秭(만억급자) : 억수로 많아
爲酒爲醴(위주위례) : 술 빚고 단술 걸러서
烝畀祖妣(증비조비) : 조상들께 제사 올려
以洽百禮(이흡백례) : 갖가지 예절 다 갖추리라
有飶其香(유필기향) : 향긋한 그 음식 맛
邦家之光(방가지광) : 나라의 빛이며
有椒其馨(유초기형) : 은은히 퍼지는 향기
胡考之寧(호고지녕) : 선조들도 편히 여기시리라
匪且有且(비차유차) : 이 같은 풍년이 이곳만이 아니고
匪今斯今(비금사금) : 올 같은 풍년이 올해만이 아니라
振古如茲(진고여자) : 예부터 떨쳐 이와 같았도다
[출처] ◈시경(詩經)[주송(周頌)-제3 민여소자지십(第三 閔予小子之什)296-재삼(載芟)-풀 뽑으며
◎ 庶幾
맹자 양혜왕 하 제 1장 양혜왕 하 / 맹자
莊暴見孟子,曰:“暴見於王,王語暴以好樂,暴未有以對也。”曰:“好樂何如?” 孟子曰:“王之好樂甚,則齊國其庶幾乎!”
장포가 맹자를 뵙고 말하였다. “포가 왕을 알현하였을 때 왕께서 저에게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으나, 제가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장포가 물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맹자께서 대답하셨다. “왕께서 음악을 매우 좋아하신다면 제나라는 잘 다스려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맹자 양혜왕 하 제 1장|작성자 문세간정시하물
◎ 有素
1. 소양이 있다.
2. [문어] 아는 사이다.
相交有素 (교제하여 잘 아는 사이다)
◎ 庶 여러 서, 제거할 자
1. 여러 2. 거의 3. 바라건대 4. 무리(모여서 뭉친 한 동아리) 5. 서출(庶出: 첩의 자식이나 자손) 6. 벼슬이 없는 사람 7. 지손(支孫), 지파(支派) 8. 가깝다 9. 바라다 10. 많다, 수효(數爻)가 넉넉하다...
◎ 幾 몇 기
1. 몇, 얼마, 어느 정도 2. 그 3. 거의 4. 어찌 5. 자주, 종종 6. 조용히, 조용하고 공손(恭遜)하게 7. 바라건대, 원하건대 8. 가, 언저리 9. 기미(幾微ㆍ機微), 낌새 10. 조짐(兆朕), 징조(徵兆) 11....
◎ 遐荒
외지고 먼 땅. 먼 지방. 벽촌의 거친 땅.
◎ 閥 문벌 벌
1. 문벌(門閥) 2. 가문(家門) 3. 지체(사회적 신분이나 지위) 4. 공훈(功勳) 5. 공로(功勞) 6. 기둥
◎ 閱 볼 열, 셀 열
1. 보다 2. 검열하다(檢閱--) 3. 가리다, 분간하다(分揀--) 4. 읽다 5. 지내다 6. 모으다 7. 공로하다(空老--: 아무 일도 해 놓은 것이 없이 헛되이 늙다) 8. 지체하다(遲滯--) 9. 들어가다 10. 거느리다...
◎ 毓 기를 육
1. 기르다 2. 어리다
◎ 歟 어조사 여
1. 어조사(語助辭) 2. 편안(便安)한 기운
◎ 掇 주을 철
1. 줍다, 주워 모으다 2. 가리다, 선택하다(選擇--) 3. 노략질하다(擄掠---) 4. 그만두다, 중지하다(中止--) 5. 깎다, 삭제하다(削除--) 6. 찌르다 7. 짧다
◎ 조두 [ 俎豆 ]
제기(祭器)의 이름. 俎에는 고기를 담고 豆에는 채소를 담음. 제례(祭禮)의 일.
◎ 俎 도마 조
1. 도마 2. 적대(炙臺: 제사 때 산적을 담는 그릇)
◎ 豆 콩 두
1. 콩(콩과의 한해살이풀) 2. 제기(祭器: 제사에 쓰는 그릇) 3. 제수(祭需: 제사에 드는 여러 가지 재료) 4. 너 되 들이의 용기(用器) 5. 술 그릇 6. 식기(食器)
◎ 抑 누를 억
1. 누르다, 억누르다 2. 굽히다, 숙이다 3. 물러나다, 물리치다 4. 가라앉다 5. 막다, 다스리다 6. 아름답다, 예쁘다 7. 조심하다, 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8. 우울해지다(憂鬱---) 9. 또한 10. 문득
◎ 徵 부를 징, 음률 이름 치
1. 부르다 2. 징집하다(徵集--) 3. 소집하다(召集--) 4. 구하다(求--), 모집하다(募集--) 5. 거두다, 징수하다(徵收--) 6. 징계하다(懲戒--) 7. 밝히다 8. 증명하다(證明--), 검증하다(檢證--) 9. 이루다...
◎ 底 밑 저, 이룰 지
1. 밑, 바닥 2. 속, 내부(內部) 3. 구석 4. 밑절미(본디부터 있던 부분), 기초(基礎) 5. 초고(草稿), 원고(原稿) 6. 어찌, 왜 7. 아주, 몹시 8. 남모르게 9. 그치다, 멈추다 10. (몰래)숨기다 11. 막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