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8. 10. 07:04ㆍ게시판
조선일보 조용헌살롱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조용헌살롱]
♡경주 최 부잣집 사랑채
신라(新羅)는 ‘천년왕국’이었다. 세계 역사에서 1000년의 역사를 유지했던 나라를 살펴보면 두 나라이다.
바로 서양의 로마와 동양의 신라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도 길어봐야 200~300년 이었다. 신라 1000년은 대단한 기록인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는 어떻게 해서 1000년이나 되는 세월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어떤 노하우가 있었단 말인가?
경주는 신라 1000년의 역사가 녹아 있는 세계적인 ‘명품도시’(名品都市)이다.
이 명품도시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었던 명가(名家)가 있으니 그게 바로 교동(校洞)에 있는 최 부잣집이다.
최 부잣집이 무려 300년 동안이나 만석꾼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라 1000년의 정신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 정신은 ‘상생’(相生)이고, ‘적선’(積善)이요, ‘보시’(普施)였다. 이러한 철학이 없었더라면 신라가 어떻게 1000년을 유지하고, 경주 최 부잣집이 어떻게 300년 동안이나 만석꾼으로 살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놓고 보면 신라 1000년의 정신이 최 부잣집에 면면이 계승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에 최 부잣집의 사랑채가 복원되었다. 1970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던 사랑채 36평을 5억3000만원을 들여 원래 모습으로 다시 지은 것이다.
이 사랑채에서 수많은 적선과 보시가 이루어졌으며, 영남지역의 수많은 이야깃거리들이 만들어졌다. 최 부잣집의 정신 가운데 하나가 “과객(過客) 대접을 후하게 하라”였다.
종손인 최염(74)씨의 증언에 의하면 1년에 약 1000가마의 쌀을 집에 찾아온 과객들 밥 먹여 주는 데 소비하였다고 한다. 손님 접대용으로 하루에 약 2가마 반의 쌀이 들어간 셈이다. 물론 공짜였다.
사랑채와 행랑채까지 손님이 꽉 차면 100명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평균 80~90명의 손님이 1년 365일 동안 최 부잣집에 상주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사랑채에는 쌀 뒤주가 하나 있었다. 어른 두 주먹이 겨우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이 있는 뒤주였다.
지나가던 과객들이 이 집을 떠날 때 여행 식량으로 필요한 쌀을 퍼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뒤주였다. 이렇게 후한 대접을 받은 과객들은 최 부잣집의 인품과 덕망을 칭송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입 소문이 전국을 강타하면서 경주 최 부잣집의 전설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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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불삼세(富不三世).
부자 삼대 못 간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12대, 300년에 걸쳐 만석꾼(1년 쌀 수확량이 1만석인 대단한 부자)을 지낸 집안이 있다.
바로 ‘경주 최부자’이다.
조선시대 최고 부자였던 경주 최부잣집이 1600년대 초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300년간 만석꾼의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집안 대대로 철칙으로 내려오는 6가지 가훈에 있었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은 하지 말라.’
벼슬을 하면 욕심의 끝이 없어 권력에 맛을 들이게 되고, 결국 다툼에 휘말려 온 가족이 화를 입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최부잣집은 돈은 벌되 권력은 처음부터 포기했다.
선택과 집중, 이른바 정경분리(政經分離)를 실천한 것이다.
둘째,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최부잣집은 1년 소작료 수입은 1만석을 넘기지 않았으며, 그 이상은 소작료 할인 방식으로 사회에 환원했다.
다른 부잣집들이 소작료를 수확량의 70% 정도 받았다면 최부자는 40%에서 멈췄던 것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파 하는 게 우리네 인심이었지만 최부자가 논을 사면 박수를 쳤다고 한다.
현재의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라는 1차원적인 접근에서 진일보해 해외시장 진출, 시장개선, 이미지 제고 등 기업의 사회적 역할과 대외 전략을 한데 묶어 생각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이에 대한 참여가 활발해지고 있는 것과 통하는 것이다
셋째,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면 수천명씩 굶어죽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당장 굶어죽지 않기 위해 갖고 있는 논과 밭을 그야말로 헐값으로 내다 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부잣집은 이런 논과 밭을 결코 사들이지 않았다.
가진 사람이 취할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넷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1년에 약 1,000석의 쌀을 과객들의 식사대접에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과객들이 묵고 가는 사랑채에는 별도의 뒤주를 둬 누구든지 쌀을 가져가 다음 목적지까지 노자로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최부잣집의 인심은 널리 알려졌으며, 민란 등 사회적 혼란기에도 폭도들이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다섯째,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주변 사람이 굶어죽는데 나 혼자 만석꾼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부자 양반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쌀을 무료로 나눠줬다.
여섯째,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집안 살림을 담당하는 여자들이 보릿고개 때는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시집 온 후 3년간은 무명옷만 입도록 했다.
절약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흔히 빌 게이츠를 ‘가진 자의 의무를 다 하는 사람’으로 비유하지만 우리나라에도 경주 최부자와 같은 참다운 부자가 있었다.
‘가진자가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노블레스 오블리주)’ 멋진 부자가 더 많아졌으면 한다.
돈이 많으면 좋고 편함을 누릴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 세상에는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도 존재함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평생 살면서 돈보다 더 가치 있는 무언가를 "하나"라도 찾으면 성공한 삶이 아닐까? 우리나라인들이 심사숙고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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