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수군절도사, 황해도병마절도사 전백록(全百祿)

2009. 8. 28. 17:31 인물열전

 

충청도수군절도사, 황해도병마절도사

전백록(全百祿


 1645(인조 23)∼1712(숙종 38)

68세.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황간(黃澗). 자는 천수(天授). 부총관 우량(友諒)의 아들이다.


1664년(현종 5)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등용되었다.


그뒤 훈련원정에 승직되고, 이어서 장연·교동·정평·안동·무산·경원·경흥·광주(廣州) 등의 중군을 역임하면서 청렴하다는 평을 들었다.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어 충청도수군절도사가 되고, 이어서 금군중추(禁軍中樞)·부총관·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712년 

그가 죽자 임금이 조문사를 보내어 치제를 하였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全氏大同譜 

 

國朝人物志v3 

 路過鏡城往見東彥東彥以其北方豪傑與之談邊事且問吾來此之後政令之失君如有聞可悉言之百祿曰孟子言枉己者未有能直人者北方雖遐遠蓋聞公居臺閣多所彈駁固已聳望其威稜自莅任以來日日大張妓


▷선전관청(宣傳官廳) 

 조선시대 정삼품아문(正三品衙門)으로 형명(形名: 旗와 북으로서 兵士의 坐立과 進退를 號令하는 것)·계라(啓螺: 임금이 거둥[出駕]할 때 軍樂을 시작할 것을 王駕 앞에서 아뢰는 것)·시위(侍衛)·왕명 전달·부신(符信) 출납 등의 일을 관장한다.

 선전관청(宣傳官廳) 관원으로 선전관(宣傳官: 正三品 堂上官∼從九品)이 25원인데, 4인은 정삼품 당상관으로 하고, 7인은 참상관(參上官)으로 하되 품계를 정하지 아니하며, 14인은 종구품 참하관(參下官)으로 하였고, 문신겸선전관(文臣兼宣傳官: 從六品)이 2원이고,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 從六品·從九品)은 50원인데, 종육품 참상관은 40인이며, 종구품 참하관은 10인으로 하였다. 이속(吏屬)으로 선전관청서원 1인, 군사 2명, 무겸청서원 2인, 방직(房直) 1명, 수직군(守直軍) 2명, 조라치(照羅赤) 50명이 있었다.


▷훈련원정(訓鍊院正) 

 조선시대 훈련원(訓鍊院) 정삼품(正三品) 서반 무관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위로 지사(知事: 正二品), 도정(都正: 正三品 堂上)이 있고, 아래로 부정(副正: 從三品), 첨정(僉正: 從四品) 등이 있었다.  

 당상관으로 바로 승진할 수 있는 서반의 요직이었다. 일반 관직체계에서의 정·부정은 1414년(태종 14) 관제개정 때의 감(監)·소감(少監)을 개칭한 것이다. 


▷중군(中軍) 

 ① 조선시대 각 군영(軍營)에 속한 종이품(從二品) 서반 무관(武官)으로 정원은 1원이다.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수어청(守禦廳)·총융청(摠戎廳) 등 5군영의 대장(大將)이나 사(使)의 버금 벼슬로 아장(亞將)이라고 하였다.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는 제수를 받을 수 없었다. 각 군영에서 대장 또는 사를 보좌하면서 실무를 맡아 보았다. 군안(軍案) 관리, 시취(試取)·고강(考講) 감독, 군기검사, 훈련감독 등의 임무를 맡았다.

 ② 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황해·평안·함경 각 도의 감영중군(監營中軍)으로 감사(監司)의 다음인 버금 벼슬이다. 경기도의 황해중군(黃海中軍)·수원중군(水原中軍)·통어중군(統御中軍), 충청도의 병영중군(兵營中軍)·수영중군(水營中軍), 전라도의 병영중군·좌수영중군·우수영중군·제주중군(濟州中軍), 경상도의 좌병영중군·우병영중군·통영중군(統營中軍)·산성중군(山城中軍)·좌수영중군, 황해도의 병영중군·수영중군, 함경도의 남병영중군·북병영중군, 평안도의 병영중군 등 각 군영의 버금 벼슬로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이었다. 

 ③ 개성유수(開城留守)·강화유수(江華留守)의 다음인 버금 벼슬이다. 개성중군(開城中軍)·강화중군(江華中軍)이라고 하였다.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조선시대 각도 수군(水軍)을 총지휘하기 위하여 두었던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 서반 외관직(外官職)이다.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按撫處置使)를 1466년(세조 12)에 고친 것이다. 인원은 경상·전라·함경도에 각 3원, 경기·충청·평안도에 각 2원, 황해·강원도에 각 1원씩 있었다. 1원의 경우는 그 도의 관찰사가 정례대로 겸임하였다. 2원의 경우 1인은 관찰사가 겸임, 나머지 1인은 평안도에서는 병마절도사가 겸임하였고, 경기와 충청은 전임무관(專任武官)이 임명되었으며, 3원의 경우 1인은 관찰사가 겸임하고 나머지 2인은 함경도에서는 남북병마절도사가 각각 겸임하였고, 경상·전라도는 좌·우도에 각각 전임무관이 임명되었다.

 수군절도사는 예하의 진(鎭)·포(浦)·보(堡)와 그에 딸려 있는 전함(戰艦)과 관원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 從三品), 우후(虞侯: 正四品),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從四品), 만호(萬戶: 從四品), 권관(權管: 從九品), 별장(別將: 從九品) 등을 통솔하였다. 교동(喬桐)·보령(保寧)·동래(東萊)·거제도(巨濟島)·순천(順天)·남해(南海)·옹진(甕津) 등은 유명한 절도사의 수영(水營)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각 도의 수사가 진관체제(鎭管體制)에 의해 몇 명의 수군절제사 또는 첨절제사가 관할하는 거진(巨鎭)을 통하여 만호가 관할하는 제진(諸鎭)의 수군을 지휘했다.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을 겪는 도중인 1593년(선조 26)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 설치되었고, 1627년(인조 5) 경기지역 해안의 국방 강화를 위해 경기도·황해도·충청도 수군을 통할하도록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을 설치하였다.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는 경상우수사가, 삼도수군통어사(三道水軍統禦使)는 경기수사가 겸직하였다. 

 수사의 임기는 2년이었으며, 처음에는 중앙의 관직을 띤 채 파견되다가, 1477년(성종 8)부터 중앙 관직을 겸하지 않게 되었다. 병마절도사와는 달리 거의 모두 무신으로 임명했는데, 조선 전기에는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가 수군절도사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조선 후기에는 수군절도사를 거쳐서 병마절도사로 승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895년(고종 21) 기존의 군영이 모두 폐지됨으로써 수군절도사도 소멸되었다. 

 [별칭] 

 수사(水使)

 

▷부총관(副摠管) 

  ① 조선시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에 둔 종이품(從二品) 관직으로 정원은 5원이다. 세조 때의 오위진무소가 오위도총부로 개칭되면서 도진무(都鎭撫)가 도총관(都摠管)과 부총관(副摠管)으로 바뀌게 되었다. 오위도총부의 부책임자로 오위의 입직(入直)·행순(行巡) 등을 지휘 감독하였다. 문(文)·음(蔭)·무(武)의 고급관리가 겸임하였으나 종실이 겸하기도 하였다.  

 ② 대한제국(大韓帝國) 때 승녕부(承寧府)에 두었던 칙임관(勅任官)이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조선시대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던 종이품(從二品) 서반 무관직이다. 1466년(세조 12)에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고친 이름이다. 정원은 경기도(京畿道)에 1원, 충청도(忠淸道)에 2원, 경상도(慶尙道)에 3원, 전라도(全羅道)에 2원, 황해도(黃海道)에 1원, 강원도(江原道)에 1원, 함경도(咸鏡道)에 3원, 평안도(平安道)에 2원 모두 15원이었다. 1472년(성종 3) 관찰사(觀察使)가 1원씩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겸하면서 제도가 확립되게 되었다. 

 7명의 전임관(專任官)이 임명되었는데, 그들을 단병사(單兵使)라 하였으며, 그 밖에 관찰사가 겸하는 겸병사(兼兵使)가 8도에 1명씩 있었다. 경기·강원도·황해도에는 단병사가 파견되지 않았으므로 관찰사가 겸병사로서 그 도의 군대를 통할하였다. 1593년(선조 26)부터는 황해도에도 단병사를 두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16명의 병마절도사가 파견되었다.  

 병마절도사는 아래 병마우후(兵馬虞侯: 從三品)와 군관들, 그리고 많은 아전·노비·공장(工匠)들을 거느리는 한편 유방군(留防軍)을 통솔하였는데, 병영이 설치된 곳을 주진(主鎭)이라 하였다. 보통 무신으로 덕망을 갖춘 자가 임명되었고, 임기는 2년이었다. 함경남북도의 병마절도사는 각각 북청부사(北靑府使)와 경성부사(鏡城府使)를 겸하였다.  

 병마절도사는 평상시에는 지방군의 무예훈련과 습진(習陣), 무기의 제작과 정비, 군사들의 군장(軍裝) 점검, 성보(城堡) 등 군사시설의 수축 등을 엄격히 살펴서 국방 태세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여야 했다. 그리고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에는 즉각적으로 대응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하였고, 이에 따라 유사시에는 군사를 동원하여 조치를 취한 뒤 중앙에 보고할 권한이 부여되었다. 국방(國防)뿐만 아니라 도민에게 해를 끼치는 맹수를 잡거나, 도적을 체포하고 내란을 방지·진압하는 일도 병마절도사의 중요한 임무였다. 

 [별칭] 병사(兵使)


▷가선대부(嘉善大夫)

 조선시대 종이품(從二品) 동서반(東西班) 문무관(文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종이품의 하계(下階)로서 가정대부(嘉靖大夫)·가의대부(嘉義大夫)보다 아래 자리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후로 문무관에게만 주다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종친(宗親: 임금의 4대손까지의 친족)과 의빈(儀賓: 임금의 사위)에게도 이 품계를 주었다. 

 해당 관직으로는 종친부(宗親府)의 군(君)·종정경(宗正卿), 충훈부(忠勳府)의 군(君), 의빈부(儀賓府)의 위(尉), 돈령부(敦寧府)·중추부(中樞府)·의금부(義禁府)·경연청(經筵廳)·성균관(成均館)·춘추관(春秋館)의 동지사(同知事), 육조(六曹)의 참판(參判), 한성부(漢城府)의 좌윤(左尹)·우윤(右尹), 사헌부(司憲府)의 대사헌(大司憲), 규장각(奎章閣)·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제학(提學), 규장각의 직제학(直提學), 교서관(校書館)의 부제조(副提調),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부총관(副摠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좌부빈객(左副賓客)·우부빈객(右副賓客), 세손시강원(世孫侍講院)의 좌유선(左諭善)·우유선(右諭善), 개성부(開城府)·강화부(江華府)의 유수(留守), 교서관(校書館)·제언사(堤堰司)·비변사(備邊司)·선혜청(宣惠廳)·준천사(濬川司)·승문원(承文院)·봉상시(奉常寺)·종부시(宗簿寺)·사옹원(司饔院)·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사복시(司僕寺)·군기시(軍器寺)·사섬시(司贍寺)·군자감(軍資監)·장악원(掌樂院)·관상감(觀象監)·전의감(典醫監)·사역원(司譯院)·선공감(繕工監)·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사도시(司䆃寺)·사재감(司宰監)·전함사(典艦司)·전연사(典涓司)·소격서(昭格署)·종묘서(宗廟署)·사직서(社稷署)·경모궁(景慕宮)·제용감(濟用監)·평시서(平市署)·전생서(典牲署)·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예빈시(禮賓寺)·전설사(典設司)·장흥고(長興庫)·빙고(氷庫)·장원서(掌苑署)·사포서(司圃署)·사축서(司畜署)·조지서(造紙署)·혜민서(惠民署)·도화서(圖畵署)·활인서(活人署)·와서(瓦署)·귀후서(歸厚署)·문소전(文昭殿)·연은전(延恩殿)·영희전(永禧殿)·화령전(華寧殿)·장생전(長生殿)·경리청(經理廳)의 제조(提調), 오위(五衛)·겸사복(兼司僕)·내금위(內禁衛)·우림위(羽林衛)·용호영(龍虎營)의 장(將),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대장(大將),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어영청·총융청(摠戎廳)의 중군(中軍), 총융청·관리영(管理營)·진무영(鎭撫營)의 사(使), 포도청(捕盜廳)의 좌대장(左大將)·우대장(右大將), 팔도(八道)의 관찰사(觀察使)·절도사(節度使)·방어사(防禦使)·통어사(統禦使), 경기도(京畿道)·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함경도(咸鏡道)·평안도(平安道)의 부윤(府尹), 경상도의 수군중군(水軍中軍) 등이 있었다.

 돈령부·중추부동지사를 제외한 동지사, 부총관, 제학, 직제학, 제조, 부제조, 좌우부빈객, 총리영·진무영의 사, 절도사, 방어사는 모두 예겸(例兼)하였다. 처(妻)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