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안현감, 광주목사, 형조참판 의민공(義愍公) 전유형(全有亨)

2009. 9. 20. 06:51 인물열전

 

청안현감, 광주목사, 형조참판,

의민공(義愍公) 전유형(全有亨)

 

 

[과거 및 취재]

문과 선조(宣祖) 38년 (1605) 을사(乙巳) 정시(庭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

 

[가족사항]

[부]    전 인(全 絪)

[처부] 안 봉(安 鳳)

 

 

1566(명종 21)∼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숙가(叔嘉), 호는 학송(鶴松). 인(絪)의 아들이다.

 

괴산의 유생으로 있으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듬해에

왜군을 방어하기 위한 책략 10여조를 올려 선조의 칭찬을 받았으며, 재주를 인정받아 군자감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사임하였다.

 

이때 다시 민심수습방안 등을 상소하여 유성룡(柳成龍)으로부터도 주목을 받아

 

 

1594년(선조 27)에

특별히 청안현감에 임명되었으며 충청도조방장을 겸하여 왜적의 격퇴에 노력하였다.

 

 

1603년에는

붕당타파·세자보호 등을 포함한 시사(時事)에 관한 15조목에 이르는 소를 올려 조정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605년

40세의 나이로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감찰로 발탁되었으나 전란 중에 부모의 상을 의례에 맞게 치르지 못한 것을 빌미삼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 당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다시 서용되어 함흥판관 등의 외직을 거쳐 분병조참의· 광주목사(廣州牧使)· 형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이이첨(李爾瞻)과 세력을 다투던 임취정(任就正)과 결탁하여 이이첨을 탄핵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의술에도 조예가 깊어 광해군과 왕비의 병을 고치는 데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오장도 五臟圖〉를 그렸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도 재능을 인정받아 문안사로 발탁되어 모문룡(毛文龍)에게 가서 군량을 계속 대기 어려운 연유를 설명하고 이를 주선하게 하였으며, 평안도를 내왕할 때 창성·의주 등 성의 방비상태를 아울러 살피고 돌아왔다.

 

 

1623년(인조 1)

동지중추부사로 있을 때 이유림옥사(李有林獄事)가 일어나자, 그를 석방시켜 벼슬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당류를 고변하게 하자고 청하였다가 조정을 멸시하였다는 죄목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 당하였다.

 

 

이듬해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난군과 내응하였다는 무고를 받아 정상적인 절차도 없이 성철(成哲) 등 37인과 함께 참형을 당하였다.

 

그 뒤 신원이 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42년(영조 18)에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학송집》 1권이 전한다. 시호는 의민(義愍)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增補文獻備考

國朝榜目

大東野乘

 

 

 

[관련 전거 정보]

성명 : "전유형(全有亨)"에 대한 용례

전거 용례

 

 

國朝編年v19

有林等說謀發覺窮問取服頗得其黨與鞫治又有凶檄遍投都監將官家其言極兇今年正月文晦李佑探知逆謀以告奇自獻全有亨等已就獄而李适韓明璉殺都事起兵叛蓋尹仁發諸賊之腹心也自前年五月乘夜訪文晦告以謀蓋以文晦之被誅意其必怨

 

 

 

國朝捷錄v01

與柳公亮全有亨同凶徒李佑等告變

 

 

國朝人物志v2

眕鄭邦說尹安亨韓訢等告變云李适叛奇自獻李時言韓汝吉柳公亮李尹守謙全有亨尹琡韓明璉李榏鄭忠信柳斐然丁好善等中外相應復立廢主使爲政三日盡殺西人一隊然後推爲讓王

 

 

 

학송집 [鶴松集]

 

조선 중기의 문신 전유형(全有亨:1566~1624)의 시문집.

 

구분 필사본, 시문집

저자 전유형

시대 조선시대(1713)

필사본. 1책. 1713년(숙종 39) 증손 이근(爾根) ·이장(爾樟) 등이 간행. 이근의 발문이 있다. 내용은 일기 ·설 ·소 ·시 ·기 ·서 ·정문(呈文) ·부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송일기(鶴松日記)>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선조 25)부터 1623년(인조 1)까지 자신의 개인적인 일은 물론 왕과의 문답, 왜란 발발시 괴산에서 조헌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던 자신의 의병활동 및 전황(戰況) 등에 관한 것들을 기록한 것이다.

 

<예변(禮辨)>은 왕실에서 시행하고 있는 상례(喪禮)의 복제(服制) 중 예에 어긋나는 것이 많음을 지적하고 이의 시정을 요구한 글이다. <소(疏)>는 주로 붕당의 타파와 세자의 보호 등 시사(時事)에 관한 것과 전쟁 후 피폐한 민심의 수습 방안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문>에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전쟁으로 인한 재정의 고갈로 명나라에서 요구한 군량미의 지원이 불가능함을 설득하고, 이를 명왕조에 설명할 것을 요구한 글이 실려 있다.

 

 

▷현감(縣監)

 

조선시대 동반(東班) 종육품(從六品) 외관직(外官職)으로 정원은 138원인데 후기에는 122원으로 줄었다. 부윤(府尹: 從二品)·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正三品)·목사(牧使: 正三品)·도호부사(都護府使: 從三品)·군수(郡守: 從四品)·현령(縣令: 從五品)과 같이 각도 관찰사(觀察使: 從二品)의 관할(管轄) 하에 있었다.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 개혁 때 감무(監務)를 현감(縣監: 從六品)으로 개칭했다. 이로써 현의 수령으로 현령과 현감을 두게 되었다. 당시 지방의 말단기관장인 역(驛)의 찰방(察訪: 從六品)과 동격인, 지방수령으로서는 가장 낮은 관직이었다.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어 대한제국까지 이어졌다. 군직으로는 절제도위(節制都尉)를 겸하였다.

 

현감(縣監)을 두었던 현을 각 도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경기도(京畿道)에는 통진(通津: 도호부사로 승격)·죽산(竹山: 도호부사로 승격)·시흥(始興: 현령으로 승격)·지평(砥平)·과천(果川)·음죽(陰竹)·양성(陽城)·양지(陽智)·교동(喬桐: 도호부사로 승격)·교하(交河: 군수로 승격)·가평(加平: 군수로 승격)·포천(抱川)·적성(積城)·연천(漣川)이 있었다.

 

충청도(忠淸道)에는 보은(報恩: 군수로 승격)·제천(堤川)·직산(稷山)·회인(懷仁)·연풍(延豊)·음성(陰城)·청안(淸安)·진천(鎭川)·목천(木川)·영춘(永春)·영동(永同)·황간(黃澗)·청산(靑山)·대흥(大興: 군수로 승격)·덕산(德山: 군수로 승격)·홍산(鴻山)·평택(平澤)·정산(定山)·청양(靑陽)·은진(恩津)·회덕(懷德)·진잠(鎭岑)·연산(連山)·노성(魯城)·부여(扶餘)·석성(石城)·비인(庇人)·남포(藍浦)·결성(結城)·보령(保寧)·해미(海美)·당진(唐津)·신창(新昌)·예산(禮山)·전의(全義)·연기(燕岐)·아산(牙山)이 있었다.

 

경상도(慶尙道)에는 인동(仁同: 도호부사로 승격)·하양(河陽)·용궁(龍宮)·봉화(奉化)·청하(淸河)·언양(彦陽)·진보(眞寶)·현풍(玄風)·군위(軍威)·비안(比安)·의흥(義興)·신령(新寧)·예안(禮安)·연일(延日)·장기(長鬐)·영산(靈山)·창령(昌寧)·기장(機長)·자인(慈仁: 인조 15년에 신설)·영양(영양: 肅宗 2년에 신설)·거창(居昌: 도호부사로 승격)·하동(河東: 도호부사로 승격)·개령(開寧)·삼가(三嘉)·의령(宜寧)·칠원(漆原)·진해(鎭海)·문경(聞慶)·함창(咸昌)·지례(知禮)·안의(安義: 安陰)·고령(高靈)·산청(山淸: 山陰)·단성(丹城)·사천(泗川)·웅천(熊川)이 있었다.

 

전라도(全羅道)에는 무주(茂朱: 도호부사로 승격)·광양(光陽)·옥과(玉果)·남평(南平)·구례(求禮)·곡성(谷城)·운봉(雲峰)·임실(任實)·장수(長水)·진안(鎭安)·동복(同福)·화순(和順)·흥양(興陽)·장성(長城: 선조 33년에 珍原縣을 編入하고 도호부사로 승격)·대정(大靜: 군수로 승격)·정의(旌義: 군수로 승격)·용안(龍安)·함열(咸悅)·부안(扶安)·함평(咸平)·강진(康津)·고산(高山)·태인(泰仁)·옥구(沃溝)·흥덕(興德)·정읍(井邑)·고창(高敞)·무장(茂長)·무안(務安)·해남(海南)이 있었다.

 

황해도(黃海道)에는 토산(兎山)·장연(長淵)·장련(長連)·송화(松禾)·강령(康翎)·은율(殷栗)이 있었다.

 

강원도(江原道)에는 이천(伊川: 도호부사로 승격)·평강(平康)·금화(金化)·낭천(狼川)·홍천(洪川)·양구(楊口)·인제(麟蹄)·횡성(橫城)·안협(安峽)이 있었다.

 

함경도(咸鏡道)에는 홍원(洪原)·이원(利原: 利城)·길주(吉州: 吉城縣, 牧使로 승격). 명천(明川: 도호부사로 승격)이 있었다.

 

평안도(平安道)에는 양덕(陽德)·맹산(孟山)·태천(泰川)·강동(江東)·은산(殷山)이 있었다.

 

 

▷청안면

 

충청북도 괴산군 서부에 있는 면.

면소재지는 읍내리이다. 면의 서북부일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200~500m의 산지를 이룬다. 북부의 칠보산(540m) 일대에서 청안천과 괴곡천이 발원하여 북서쪽과 남동쪽으로 각각 흐른다. 경지는 이들 하천연안을 따라 분포한다. 쌀 이외에 고추·인삼·참깨 등이 생산된다. 읍내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165호)가 있다. 증평읍 방면의 지방도가 면내를 지난다. 읍내(邑內)·금신(錦新)·문방(文芳)·효근(孝根)·조천(釣川)·청룡(淸龍)·문당(文塘)·운곡(雲谷)·백봉(白峰)·부흥(富興)·장암(長巖) 등 11개 동리가 있다(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은 36개). 면적 70.85㎢, 인구 3,512(2007).

 

 

▷감찰(監察)

 

조선시대 사헌부(司憲府)에 두었던 정육품(正六品) 관직으로 정원은 13원이다.

 

전중어사(殿中御史)라 하여, 1392년(태조 1)에 20원을 두었다가, 1401년(태종 1)에 25원으로 늘렸으나, 세조 이후에는 그 수를 줄여 문관 3인, 무관 5인, 음관(蔭官) 5인, 총 13원으로 하였다.

 

 

▷판관(判官)

 

① 조선시대 종오품(從五品) 경관직으로 돈령부(敦寧府) 1원, 한성부(漢城府) 1원, 수원부(水原府) 1원, 광주부(廣州府) 1원, 상서원(尙瑞院) 1원(후에 폐지), 봉상시(奉常寺) 1원, 사옹원(司饔院) 1원(후에 폐지), 내의원(內醫院) 1원, 상의원(尙衣院) 1원(후에 폐지), 사복시(司僕寺) 1원, 군기시(軍器寺) 1원(후에 폐지), 군자감(軍資監) 1원, 관상감(觀象監) 1원, 전의감(典醫監) 1원, 사역원(司譯院) 1원, 선공감(繕工監) 1원(후에 폐지), 제용감(濟用監) 1원, 전생서(典牲署) 1원, 내자시(內資寺) 1원, 내섬시(內贍寺) 1원, 예빈시(禮賓寺) 1원, 훈련원(訓鍊院) 8원, 별군직(別軍職) 등에 두었다.

 

② 국초인 1414년(태종 14)에 합문(閤門)의 인진부사(引進副使: 正五品)를 고친 이름이다.

 

③ 종오품 지방관직(地方官職)으로 국초(國初)에 각도와 대도호부에 두었다가 후에 폐지하였다. 경기도에 두었던 수운판관(水運判官), 충청(忠淸)·전라도(全羅道)의 도사(都事)가 겸직(兼職)하던 해운판관(海運判官), 후기에는 경기·평안도(平安道)를 제외한 각도와 수원(水原)·경성(鏡城)·청주(淸州) 등 특수지역(特殊地域)에 판관을 두었다.

 

조운과 관련하여 전함사 내에 설치한 수운판관(水運判官)과 해운판관(海運判官)이 있었다. 수운판관은 경기에 좌·우도 1명씩 두었다. 좌도판관은 한강 중상류의 수참(水站)을, 우도판관은 벽란도승(碧瀾渡丞)을 겸하여 황해도 세곡수송을 담당했다. 해운판관은 해상의 세곡수송을 담당한 관리로, 충청도·전라도에 두었다. 후기에는 전라·충청 도사(都事)가 겸임했다. 이들은 모두 무록관(無祿官)이었으며, 해운판관은 조운선을 제때 출발시키지 못하거나 정비 상태가 불량하면 사직해야 했다. 속대전에서 해운판관이 폐지되었고, 대전통편에서 수운판관도 혁파되었다.

 

 

▷목사(牧使)

 

조선시대 관찰사(觀察使) 밑에서 각 목(牧)을 다스리던 정삼품(正三品) 동반 외관직(外官職)이다. 목은 큰 도(道)와 중요한 곳에 두었는데, 왕실과 관계가 있는 지방은 작더라도 목으로 승격시켰다.

 

경기도(京畿道)에 3원[여주(驪州)·파주(坡州)·양주(楊州)], 충청도(忠淸道)에 4원[충주(忠州)·청주(淸州)·공주(公州)·홍주(洪州)], 경상도(慶尙道)에 3원[상주(尙州)·진주(晉州)·성주(星州)], 전라도(全羅道)에 4원[나주(羅州)·광주(光州)·제주(濟州)·능주(綾州)], 강원도(江原道)에 1원[원주(原州)], 황해도(黃海道)에 2원[황주(黃州)·해주(海州)], 함경도(咸鏡道)에 1원[길주(吉州)], 평안도(平安道)에 2원[안주(安州)·정주(定州)] 등 모두 20원을 두었다.

 

 

▷ 광주시

 

이 글은 ‘경기도 광주’에 관한 것입니다. ‘전라도 광주’에 대해서는 광주광역시 글을 참조하십시오.

현황

면적 430.96km²

세대 90,115가구 (2009.07.31)

총인구 236,688명 (2009.07.31)

 

광주시(廣州市)는 대한민국 경기도 중동부에 있는 시이다. 동쪽은 남한강을 끼고 있는 양평군과 여주군이, 서쪽은 성남시가, 남쪽은 용인시와 이천시, 북쪽은 하남시와 한강을 마주보고 있는 남양주시가 있다.

 

 

▷형조참판(刑曹參判)

 

조선시대 형조(刑曹)에 둔 종이품(從二品)으로 정원은 1원이다. 위로 형조판서(刑曹判書: 正二品)가 있고, 아래로 형조참의(刑曹參議: 正三品 堂上) 1원, 형조정랑(刑曹正郞: 正五品), 형조좌랑(刑曹佐郞: 正六品) 각 3원이 있다. 판서를 정경(正卿)이라고 하고, 참판은 아경(亞卿)이라고 한다.

 

원래 사평부(司平府)에 두었던 좌사(左使)·우사(右使)를 1404년(태종 4) 3월 참판사평부사(參判司平府使)라고 개칭했다가, 1405년(태종 5) 1월 사평부가 호조(戶曹)에 병합되고 육조의 의랑(議郞) 각 2원을 좌·우참의(左右參議)로 바꾸었다. 1432년(세종 14)에 참판·참의 각각 1원으로 개편되어 각 조(曹)의 판서를 보좌하는 차관으로, 예하 주요기관의 제조(提調)를 겸하였다.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 이후에는 협판(協辦: 勅任官)이라 하였다.

 

[별칭]

법사당상(法司堂上)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조선시대 중추부(中樞府)에 두었던 종이품(從二品) 관직인 동지사(同知事)로 정원은 8원이다.

 

위로 영사(領事: 正一品) 1원, 판사(判事: 從一品) 2원, 지사(知事: 正二品) 6원이 있고, 아래로 첨지사(僉知事: 正三品) 8원, 경력(經歷: 從四品) 1원, 도사(都事: 從五品) 3원이 있다.

 

중추부는 조선시대 일정한 직무가 없는 당상관(堂上官)들을 우대하기 위해 설치된 관청이다. 본래 나라의 군사관계, 즉 출납·병기·군정·경비·차섭(差攝) 등의 일을 맡은 관청이던 중추원(中樞院)을 1466년(세조 12)에 중추부로 고치고, 그 직무는 병조에 넘겼다. 맡은 일거리가 없는 벼슬아치들을 우대하기 위한 관청으로만 보존해 오다가 고종(高宗) 때 다시 중추원으로 고쳐 의정부에 소속시켰다.

 

동지사 1원은 오위장(五衛將)의 체아직(遞兒職)이었으며, 공석이 있으면 승전(承傳)한 의관(醫官)·역관(譯官)으로 제배(除拜)하였는데 이들은 30개월을 한정하여 체(遞)하였다. 노인직(老人職)으로서 승자(陞資)하여 임명된 자는 3개월에 한하도록 하고, 백세 이상 된 자가 있으면 정원 외 직석(職席)을 가설(加設)하여, 그 1인만을 추천(推薦) 임명하였고, 가설동지사(加設同知事)는 재직 1개월이 지나면 파면(罷免)하였다.

 

[별칭]

동지(同知), 동추(同樞)

 

문관·무관·음관이 모두 조하(朝賀: 조정에 나가 왕께 賀禮하는 일) 때나 동가(動駕: 왕이 탄 수레가 대궐 밖으로 거둥하는 일) 때에는 압반(押班)이 되고 제향(祭享: 나라의 제사) 때에는 제감(祭監)이 되었으며, 시소(試所: 과거를 치르는 곳)에서 문관(文官)은 대감(臺監)이 되었으나 무관·음관은 대감은 될 수 없었다. 모든 면을 감찰하여 기강을 세우고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맡아보았다.

 

대사헌 이하 집의(執義)·장령(掌令)·지평(持平)까지의 사헌부 소속의 관원을 통칭 대관(臺官)이라고 하였으며, 또 장령과 지평을 별칭 대장(臺長)이라고 하였으며,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이 뛰어나 이조(吏曹)에서 대관으로 추천(推薦)된 사람을 남대(南臺)라고 하였다.

[별칭]

전중어사(殿中御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