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엔 그림 같은 바다 보고, 낮엔 보티첼리·샤갈 보고 ‘지중해 크루즈’

 

밤엔 그림 같은 바다 보고, 낮엔 보티첼리·샤갈 보고 ‘지중해 크루즈’ 

 

• 크루즈는 ‘여행의 마지막 코스’라고 한다. 비교적 비용이 많이 들어 노년에나 떠날 수 있어서 그렇기도 하고, 여행이라 하면 늘 따라붙는 짐과 이동수단에 대한 고민 등을 모두 해결해주니 한가로워서 그렇기도 하다. 이 여행에서 나는 멈춰 있어도 배가 끊임없이 움직여 미지의 도시와 낯선 문명에 데려다 놓는다. 크루즈로 유럽의 미술관을 둘러본 소설가 천운영씨의 안내로 지중해 코스를 돌아본다.
  
  

  	니스·몬테카를로·칸으로 가는 관문 빌프랑쉐.

  배낭여행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매번 짐을 싸고 교통편을 알아보고 숙소를 찾아 헤매느라 진 빼지 않는 여행을 할 순 없을까? 마을 산책 나가듯이 가벼운 차림으로 낯선 도시를 둘러본 후 집에 돌아가 누군가 차려 놓은 음식을 먹으며 깨끗하게 정리된 침대에 몸을 누이고, 그렇게 한잠 자고 나면 다음 날 아침 새로운 도시의 새로운 풍경이 펼쳐져 있고, 그럼 다시 가볍게 산책하듯 길을 나섰다가 돌아와서 근사하게 차려 입고 정찬을 즐기고. 꿈같은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오후 7시 이탈리아 치비타베키아항을 떠난 배는 다음 날 아침 리보르노항에 도착한다. 꽃의 도시 피렌체. 꽃 중의 꽃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보기 위해 우피치 미술관으로 향한다. 수줍은 듯 관능적인 포즈로 서 있는 비너스를 보고 있자니 손이 근질거린다. 자그마한 가슴에 얹은 그 손 좀 치워봐. 입김이라도 훅 불어 다리 사이를 가린 풍성한 머리칼을 치워내고 싶은 마음이 꼭 봄바람 난 처녀애 치맛자락 같다.
  
  

  	아를르 고흐기념관. 보테로 등 현대작가들의 고흐에 기초한 그림들을 볼 수 있다.

  ‘비너스의 탄생’에 이어서 ‘봄’까지 보고 나면 내 몸에선 온통 꽃바람이 분다. 보티첼리의 그림이 아니더라도 피렌체는 과연 꽃의 도시다. 색색의 대리석으로 조각된 두오모의 꽃들이며 누군가 길 한복판에 그려놓은 파스텔 그림에도 꽃이 만발이다.
  
  배로 돌아와 침대 맡에 ‘비너스의 탄생’ 그림엽서를 올려놓는다. 창문을 열자 신선한 바람이 달빛을 몰고 들어온다. 비너스를 육지로 밀어주던 꽃바람이 이처럼 감미로웠을까? 이날 꿈속에서 나는 비너스처럼 알몸으로 바람을 맞고 서 있을 게다. 분명.
  
  다음 기항지는 프랑스의 빌프랑쉐. 니스 몬테카를로 칸 등으로 가는 관문. 몬테카를로에 가서 모나코의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의 무덤을 찾아볼 수도 있겠고, 칸으로 가서 짐짓 붉은 카펫 위의 여배우인 양 으쓱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단호하게 니스의 샤갈 미술관으로 향한다. 보티첼리의 보드라운 여체를 보았으니, 샤갈의 붉은 색, 혈관을 타고 흐르는 빛의 색깔을 보아야 하니까.
  
  샤갈 미술관의 공식 명칭은 국립 마르크 샤갈 성서이야기 미술관. 성서 해석이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꺼려졌던 것을 앙드레 말로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만들어졌다. ‘인간의 창조’와 ‘이삭의 희생’ 등 대표적인 유화를 비롯해 농도 짙은 붉은 색의 ‘아가’ 시리즈가 전시돼 있다. 보티첼리의 빛이 감미로운 봄바람과 같다면 샤갈의 빛은 첫사랑의 강렬한 입맞춤과도 같다. 샤갈이 성서를 읽으면 한 줄기 빛이 된다는 바슐라르의 말이 실감난다. ‘샤론의 수선화’ ‘골짜기에 핀 백합화’ ‘반으로 쪼개놓은 석류’의 빛을 볼 수 있고 ‘나에게 입 맞춰 주세요, 숨막힐 듯한 님의 입술로’라는 여인의 속삭임도 샤갈의 손에서는 빛이 된다.
  
  

  	보이저호 스태프가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부르며 승객들을 환영하고 있다.

  배는 석양을 등지고 빌프랑쉐를 떠나 마지막 기항지 마르세유로 향한다. 폴 세잔과 에밀 졸라의 고향이면서 고흐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가 사랑했던 곳. 벌써 마음에 설렌다. 매일 저녁 배포되는 선내 신문을 보니 아를르를 돌아보고 프로방스 지역의 와인 시음을 할 수 있는 기항지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내일은 아무래도 아주 긴 하루가 될 듯하다.
  
  마르세유에서 아를르로 가는 길은 해바라기 천지다. 고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처음 대면했을 때 그 귀기스러운 노란색에 숨이 딱 멈춰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유명한 해바라기를 이곳에서 그린 것은 아니지만, 그의 영혼은 오래 전부터 이곳 아를르를 향해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건강과 안정을 찾은 곳도, 그래서 아침 일찍 모티브를 찾아 나서 밤늦도록 작업에 몰두했던 곳도, 화법이나 색채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곳도, 그리고 자신의 귀를 자른 것도 이곳 아를르에서였다.
  
  원형경기장 앞 고흐기념관에 들어간다. 페르난도 보테로를 비롯해 수많은 현대 작가가 고흐에 기초한 작품을 헌사한 곳이다. 고흐의 낡아빠진 구두는 보테로에 의해 둥실하게 부풀어 올랐고, 자화상에 등장했던 파이프와 밀짚 모자도 새롭게 재구성돼 하나의 설치예술이 되었다. 기념관을 나와 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고흐의 말대로 오렌지와 레몬 색을 포함한 청색 같아 보인다.
  
  다시 배에 오른다. 아를르에서 밤의 카페를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선상에서 열린 칵테일 파티로 마음을 달래본다. 저마다 한껏 차려 입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마지막 밤을 즐기고 있다.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간다. 그녀에게서 복숭아꽃 향기가 난다. 조가비에 몸을 실은 비너스가 꽃바람을 타고 나타날 것만 같다. 주먹만 한 별들이 툭툭 떨어져 내릴 것 같은 밤이다. 글·사진=천운영(소설가)
  
  약력=2000년 등단, 『바늘』 『명랑』 『잘 가라, 서커스』 등,
  신동엽창작상(2003) 올해의 예술상(2004) 등 수상.
  
  

  	아를르의 원형경기장

  여행 정보=바다를 떠다니는 리조트 크루즈 여행. 낮에는 각 도시의 매력에 흠뻑 빠지고 밤에는 아이스쇼와 마술쇼, 라이브 뮤직을 즐길 수 있다. 그냥 배에 머물면서 수영을 하거나 암벽등반, 아이스 스케이팅도 가능하다. 매일 아침 요가강습과 댄스강습에 참여해 마지막 선상파티에 활용해 보는 것도 좋을 듯. 다소 어색하지만 새롭고 흥미진진한 경험을 누려보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출항해 이탈리아의 나폴리·치비타베키아·리보르노, 프랑스 남부의 빌 프랑쉐와 마르세유를 경유하는 지중해 코스가 가장 인기다. 문의 로얄캐리비안 크루즈 한국사무소 02-737-0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