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세상으로부터의 초월을 꿈꾸게 했을 승경(勝景)들

2009. 9. 28. 06:57게시판

      
 중국 삼청산 기행   ‘물의 땅’ 중국의 속살을 보다
인간 세상으로부터의 초월을 꿈꾸게 했을 승경들

 

 

▲ 용호산을 휘감아 도는 노계하를 거슬러 오르는 뗏목.
 
 
 

물의 땅 중국. 그렇다. 중국은 물의 나라다. 대륙의 이미지로만 중국을 떠올리는 것은 일종의 고정관념이다. 고대 중국 문명을 일으킨 것도, 오늘의 중국을 살리는 것도 장강(長江)과 황하(黃河)의 물길이다.

중국은 넓다. 러시아와 캐나다 다음으로 넓은 이 나라는 북쪽으로 고비사막, 서쪽으로 티베트와 히말라야, 동남쪽으로 황해와 남중국해에 걸쳐 있다. 아한대와 열대의 기후가 공존한다.

자연 경관만큼 사람살이의 모습도 다양하다. 13억 인구의 92%에 달하는 한족 외에 중국 정부에서 공인하는 소수민족이 56개나 된다. 베이징올림픽에서 보여준 스펙터클한 이미지의 이면에는 티베트와 위구르의 분리독립 요구 같은 첨예한 갈등이 상존한다.

참으로 복잡한 나라다. 어떤 모습으로든 규정할라치면 불쑥 다른 얼굴을 내민다. 하지만 자연으로 눈길을 돌리면, 춘추전국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자본주의적 광풍에서 살짝 비켜나면, 유유자적한 여행의 발걸음을 허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적어도 ‘용호산수’ 유람과 ‘삼청산’ 산행길은 그랬다. 호객 행위는 찾아볼 수 없었고 가짜나 바가지를 의심해야 하는 감정의 소모도 없었다. 식당에서 서빙하는 사람들은 간단한 영어에도 화들짝 놀랐고 팁을 내밀면 손사래를 쳤다.(언제까지 이럴지는 모르겠지만.)

용호산수와 삼청산을 얘기하기 전에 언급하고 싶은 게 있다. 중국에서는 우리말의 여행이나 관광에 해당하는 용어가 ‘여유(旅遊)’다. 중국 현지음으로는 ‘뤼여우’쯤 될 텐데, 어감이 썩 괜찮다.

또 한 가지, 지명 표기에 관한 것이다. 교과서나 언론에서는 현지음 표기가 원칙이다. 일반적으로도 북경이나 상해보다는 베이징과 상하이라는 표기가 우세다. 그런데 황하(黃河)를 ‘황허’라고 하면 조금 이상하고, 장강(長江)을 ‘창장’이라고 하면 많이 이상해진다. 장강이 양쯔강(혹은 양자강)이라고 불리게 된 사연도 뒷맛이 개운치 않다. 중국인들은 양저우(揚州)에서부터 시작되는 장강 하류 지역을 ‘하강’이라 부르지만 13세기에 마르코 폴로를 비롯한 유럽인들이 찾아들면서 당시 교역의 중심지였던 양저우의 지명을 따서 양쯔강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타자화의 산물인 셈이다. 장강은 장강이라야 한다. 따라서 이 글의 지명 표기는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익숙한 대로 쓰기로 한다.


▲ 용호산과 노계하를 아우르는 용호산수. 대나무 뗏목을 타고 흘러 가 보면, 왜 이곳이 도교의 발원지인지를 느낄 수 있다. 몸과 마음을 다 내려놓고 쉴 수 있다.

전통적 중국 산수 문화를 발흥시킨 곳

중국 산수미를 대표하는 곳을 꼽으라면 황산과 계림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가히 ‘물의 땅’ 중국을 대표할 만하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렇게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은 인간들이 좋아하는 위계적 서열 개념에 묶여 있는 게 아니다. 중국 남동 내륙에 위치한 강서성(江西省·장시)이야말로 물의 땅으로서 중국 산수의 고유한 풍광을 보여주는 곳이다. 중국에서도 해안 도시에 비해 개발이 뒤처진 이곳은 한국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었다. 최근 들어 유네스코에서 이곳의 삼청산(三靑山)을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2008년)함으로써 주목을 받고 있다.

이곳의 자연 풍광은 전통적 중국 산수 문화를 발흥시켰다. 도연명, 구양수, 왕안석과 같은 대문장가들과 주자학을 집대성한 주희가 이곳 사람이다. 늘 안개에 싸여 있는 강서성 북부의 여산은 세계문화유산(1996년 지정)으로 이백과 소동파의 절창을 낳기도 했다.

용호산은 도교의 발원지 가운데 하나로 요즘도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강서성을 찾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중국인이다. 이런 점 또한 다른 관광명소보다 더 큰 호감을 가지게 한다.
 
▲ 고공진도를 걷는 탐방객들. 짙은 안개는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을 자아낸다.
7월 25일, 장마전선이 길게 누운 한반도에서 3시간 정도 남하하자 옅은 안개에 덮인 남창(南昌·난창)국제공항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구 4000만이 넘는 강서성의 성도로 500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사는 곳의 국제공항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규모다. 공항 청사도 주변 건물도 하나 같이 단층이다. 마치 대지가 강렬한 자력으로 건물을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것 같다. 황량한 초지 가운데 자리한 건물이 실제 이상으로 낮아 보인다.그만큼 대지의 수평은 확장된다.

버스로 30분쯤 달리자 도심으로 진입했다. 도심은 상당히 번화했다. 후텁지근한 공기와 안개로 인해 회색의 느낌이 더해진 아파트의 획일적인 분위기 말고는 사회주의 국가의 냄새가 거의 없다. 오히려 만개하기 직전의 꽃봉오리처럼 자본주의 문화의 분위기가 농염하다.

도시를 남북으로 가르는 8·1대로 옆 인민광장 입구에 8·1봉기 기념탑이 서 있다. 오늘의 중국을 있게 한 상징이다. 남창은 중국 사회주의혁명의 성지 같은 도시다. 1927년 3월 장개석이 공산당원을 축출하고 공산당 분리정책을 시작하자 주은래와 주덕 등 공산당 출신의 장군이 이끄는 국민당 군대가 남창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8월 1일 무력으로 남창을 점령했다가 5일 만에 국민당군에 쫓겨 광동으로 후퇴했으나 주덕이 이끄는 군대는 강서성의 정강산에서 모택동의 군대와 합류했다. 오늘의 중국을 있게 한 대장정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리하여 8월 1일은 현대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산당군이 결성된 날이 되고 남창은 혁명의 성지가 되었다.

절벽의 구멍에 널을 안치하는 ‘승관(乘棺) 쇼’도 구경

▲ 중국 한나라대에 번성했던 월족의 애묘(崖墓) 장례를 재현하는 모습.
남창의 여름은 늘 안개가 흐르고 수시로 소나기가 내린다. 우리나라의 최남단인 마라도(북위 33˚06′)보다 훨씬 저위도(북위 28˚41′)에 위치해 있다. 아열대성 기후인 데다 도시 북쪽에는 중국 최대의 담수호인 파양호(    陽湖)가 있다 이 호수의 북쪽은 여산을 감싸며 장강으로 이어진다. 전혀 근거 없는 얘기가 되겠지만, 늘 안개가 흐르는 이 도시의 몽환적 분위기가 혁명에 대한 낙관적 열정을 싹틔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 남창에서 동쪽으로 3시간30분 거리에 있는 응담시(鷹潭市·잉탄)의 용호산(龍虎山·룽후산) 유람에 나섰다. 말 그대로 유람이다. 용호산 자락을 흐르는 노계하( 溪河·루시허)를 쪽배로 거슬러 오르며 이른바 중국의 국가풍경 명승구인 ‘용호산수’를 유람한 것이다.

용호산은 유네스코가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한 곳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단하지모(丹霞地貌)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단하지모라는 이 알 듯 말 듯한 말은 붉은색 사암이 오랜 세월 동안의 풍화작용으로 단층화된 지형을 말하는데, 용호산은 유년기·장년기·노년기의 모든 모습을 다 보여준다고 한다.(아쉽게도 안개로 인해 전모를 다 보지는 못했다.)

배를 타고 현관식(縣棺式)을 보는 것으로 유람이 시작됐다. 애묘(崖墓), 즉 절벽의 구멍에 널을 안치하는 장묘 방식으로 중국 진(秦)·한(漢)시대에 번성했던 월족(越族)의 장례 풍습이라고 한다. 현지 가이드는 현관식의 재현을 ‘승관(乘棺) 쇼’라고 불렀다. 실제가 그랬다. 아슬아슬한 벼랑 꼭대기에서 외줄을 타고 내려와 관 위에 올라섰다 줄을 오르내리면서 애크러배틱한 동작을 연출한다. 조상의 장례마저 돈벌이의 수단으로 바꾸는 중국인의 놀라운 상술인가 싶으면서도 조금의 엄숙함도 느낄 수 없는 기묘한 쇼는 나를 상당히 불편하게 한다. 그 불편함에는, 그냥 보여 주는 대로 보면 되지 관광객 주제에 무슨 생각이 그리 많으냐고 타박하는 물화된 풍경의 폭력성도 섞여 있다. 어쨌든 흔히 볼 수 없는 기묘한 모습이긴 하다.

노계하를 거슬러 오르는 쪽배는 앞뒤로 두 명의 사공이 삿대로 저어 나간다. 그들 대부분은 부자나 모녀, 부부, 형제, 자매인 것 같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그 노동이 무거워 보인다. 가족의 생계가 달린 그들의 격랑 같은 땀방울이 나를 숙연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쪽으로는 불편하다. 마침 내가 탄 배를 미는 여성이 입고 있는 바지의 나이키 상표는 과거와 현재의 그로테스크한 동시성을 연출한다.

나와 뗏목과 물결이 하나가 되는 체험

유람선으로 전업하기 전에는 고깃배였을 뗏목에서는 거친 강물을 헤쳐 온 자의 당당함을 읽을 수 없다. 펄떡이지 못하는 생선 신세인 내 모습도 못나 보이기는 매한가지다. 글로벌한 지구촌이 드리우는 또 다른 그림자다. 그 그림자에는 갑돌이 갑순이가 아니라 갑남을녀로 지칭되는 여리고 나약한 인간들이 포개져 있다. 나도 물론 그 일부를 이룰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나는 간신히 그 그림자 위에 ‘행복’이라는 단어를 양각한다. 나이키 바지를 입은 여자 사공도 오늘 저녁은 행복하기를 빌어본다.

▲ 계림의 풍광을 연상시키는 노계하의 가마우지 낚시

뗏목을 타고 가마우지 낚시를 하는 어부 두 명이 삿대로 강물을 첨벙댄다. 고기잡이가 목적이 아니라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행위로 보인다. 그래도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나 본 가마우지 낚시 모습을 직접 보는 일은 상당히 흥미롭다.

날개를 퍼덕이는 가마우지의 눈빛이 또 나를 슬프게 한다. 발목이 줄로 묶인 가마우지의 날갯짓은 반쯤은 공허하고 그만큼 무력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대수인가. 인간의 삶도 그런 것 아니던가. 예기치 못했던 운명과 온갖 당혹스런 우연 앞에서 조금은 무덤덤해질 일이다.(가마우지의 훈수를 이렇게 받아 적었다.)

쪽배에서 내려 30분 정도 강변을 따라 걸어 올라서 이번에는 뗏목을 타고 노계하를 흘러내린다. 불에 그을려 앞부분을 들어 올린 대나무 뗏목이다. 이번에는 마음 편히 흘러내리기로 했다. 이렇게 마음먹자, 이런 신선놀음도 없지 싶다. 나와 뗏목과 물결이 하나가 된다. 산수 간에서 마음을 쉬게 하는 것, 이것이 현대인이 자연을 찾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이유가 아닐까. 용호산은 중국 도교의 발원지 가운데 하나다. 약 1900년 전인 후한 때 장도릉이 이곳에서 수련하면서 도교의 기초를 닦았다고 한다. 용호산의 신비로운 분위기와 노계하의 호방한 기운이 조화를 이룬 특유의 풍광은 가히 부박한 인간 세상으로부터의 초월을 꿈꾸게 했을 법도 하다.  

용호산수 유람은 삼청산(1,819m) 산행을 위한 위밍업으로 적당했다. 용호산에서 삼청산이 있는 상요(上饒·상랴오)에서 일정을 마쳤으므로 삼청산까지의 이동은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비가 올 듯 말 듯 하늘은 잔뜩 찌푸렸다. 연간 안개 일수가 200일이 넘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딱히 실망감은 들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보는 게 현명한 태도다. 지리산, 설악산의 경우도 안개 속을 걷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 고공잔도에서 바라본 삼청산의 계곡과 봉우리. 소나무와 바위와 구름이 어우러지면서 선경을 이룬다.

서하객이 삼청산을 보고 침묵했던 이유는?

2인승 케이블카를 타고 30분 이상 등산로 입구로 이동하는 동안 내려다본 삼청산은 깎아지른 듯한 산봉우리가 숲처럼 모여 있는 형국이다. 최고봉인 옥경봉의 높이가 1,819m 정도인데도 대부분 봉우리들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아 보인다. 가파름이 주는 수직적 상승감이 체감고도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산기슭의 야박함 때문인지 계곡미는 빈약한 듯하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지리산이나 설악산의 계곡은 참으로 아름답다. 하지만 단순비교로 우열을 다툴 일은 아니다. 모든 산은 비교 불가능한 고유의 존재감이 있는 법이고, 그것에 대한 심미적 반응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므로.

명나라 말기의 지리학자이자 중국 최고의 여행가로 일컬어지는 서하객(徐霞客·1586~1641년)은 “황산을 보고 나선 오악(五岳)를 볼 생각이 들지 않고, 오악을 보고 나면 산을 보고픈 마음이 사라진다”라고 극찬하였다 한다. 이런 그가 삼청산을 두 번이나 오르고는 침묵으로 일관했단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그의 침묵에 대해 황산에 대한 자신의 상찬이 성급했음을 인정하고 뒤늦게 삼청산에 오른 것을 후회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의 속마음은 누구도 모를 일이지만 분명한 건 자연의 아름다움을 서열 매기기 식으로 말하는 것은 경솔한 행동이라는 점이다. 북한산과 도봉산은 서울이라는 한국의 수도 가운데에 있다는 입지 조건만으로도 천하제일의 명산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약수터로만 인식되는 동네 앞산이나 뒷산일 수 있다.

삼청산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특징은 하나같이 찌를 듯한 첨봉들이 저마다 독립적인 존재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기묘한 봉우리마다엔 그림처럼 소나무가 솟아 있다. 구름이 그 모든 봉우리를 휘감아돌면 비로소 산 전체가 선경을 이룬다. 이때 봉우리들은 모두가 주인이면서 동시에 배경이 되는 유기적 통일체가 된다. 삼청산이 지닌 이러한 아름다움의 비밀은 14억 년 전 대규모의 화강암 밀집 지역이 지각운동을 한 후 오랜 세월 동안 풍화와 침식을 거친 데 있는 게 아닐까 싶다.

▲ 수직에 가까운 삼청산의 봉우리들은 저마다 독립적인 존재감을 보여준다. 이 봉우리들의 유기적 조화로 삼청산은 자신만의 독특한 풍관을 형성한다.

길이 3,000m나 되는 고공잔도

삼청산 산행은 우리나라에서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능선을 이어나가는 것도, 능선을 따라 정상을 오르는 것도 아니다. 30분 정도 계단(돌계단처럼 보이는 시멘트 계단)으로 해발 1,600m 지점까지 오른 다음 산허리를 따라 봉우리를 휘감아간다. 그 길이 바로 고공잔도(高空棧道)다. 잔도(棧道)란 벼랑에 구조물을 설치해 선반처럼 만든 길을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수직이나 오버행으로 이루어진 사면에 낸 길이다. 암벽 등반으로나 붙어 설 수 있는 벼랑에 인위적으로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말 그대로 허공을 걷는 셈이다.

그런데 삼청산의 고공잔도는 길이가 3,000m나 된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상상조차 힘든 발상이다. 감탄과 함께 과연 이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사람이 해도 될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질리기까지 한다. 사람이 많아서 가능한 일일 수도 있고, 사람이 흔하다 보니 이런 노역에도 시달리는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이런 나의 생각은 중국인과 한국인의 자연관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인이 산을 신성시하는 태도가 강하다면 중국인은 감상의 대상으로 산을 바라보는 태도가 더 강한 데서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산수의 아름다움을 문장과 그림을 통해서라도 인지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를 좋아하지 않았던가. 거기에 더해 중국인의 실용 정신도 한몫했을 것이다. 어쨌든 삼청산 산행은 특별한 체험이었다. 육안으로는 절대로 가까이서 볼 수 없는 풍광 속에 두 발로 설 수 있으니까.

등산로의 특징으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2~3시간 소요되는 산행에서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 중산리에서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는 데 들이는 힘의 20~30% 정도라고 보면 된다.(남산케이블카에서 내려 금산케이블카를 타기 전까지)

다음 날 중국 도자기의 본향인 경덕진에서 중국 도자 문화를 체험한 다음 안개 자욱한 여산 자락의 온천에서 여장을 풀고 일정을 마쳤다. 얼핏 물의 땅 중국의 속살을 본 시간이었다.   



/ 글·사진 윤제학
  협찬 서진항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