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 좌익원종공신 어의(御醫), 동지중추원사 전순의(全循義)

2009. 9. 30. 14:42 인물열전

 



1등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어의(御醫), 동지중추원사

전순의(全循義)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의관(醫官).


세종·문종·세조의 3조(朝)에 걸쳐 전의감(典醫監)의 의관을 지냈는데,


1445년(세종 27)

왕명에 따라 《의방유취 醫方類聚》(365권)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세종이 죽자 그의 직첩이 회수되어 전의감 서원(書員)으로 강직되었다가 곧 해제되었으며,


1452년(문종 2)

내의로서 밀성군(密城君)의 병을 고쳐 안마(鞍馬)의 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해 5월 문종의 종양을 절개 수술하였으나 곧 문종이 죽음으로써 의금부에 하옥되어 전의감 청직(廳直)으로 강등되었다가 단종이 즉위하자 석방되었다.


1462년(세조 8)에

 행첨지중추원사를 거쳐 동지중추원사로 승진되고,


1463년에

 내의로서 입시, 의약(議藥)하고, 비현각(丕顯閣)에서 의학을 시강하였다.


이듬해(1464년)

 시약(侍藥)의 공로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가자되고


1467년 

내의로 상호군에 이어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1등에 녹선되었다.


저서로는 《식료찬요 食寮纂要》(1권)와 김의손(金義孫)과의 공저인 《침구택일편집 鍼灸擇日編集》(1책)이 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世祖實錄 


▷전의감(典醫監)

 조선시대 정삼품아문(正三品衙門)으로 의약(醫藥)의 궁내 공급(供給)과 하사(下賜)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1392년(태조 1)에 설치하여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태의원(太醫院)으로 개칭되었다.  

 전의감(典醫監) 관원으로는 제조(提調: 從二品∼從一品) 2원, 정(正: 正三品) 1원, 부정(副正: 從三品)[경국대전에서는 1원이었으나 속대전에서 폐지], 첨정(僉正: 從四品) 1원, 판관(判官: 從五品) 1원, 주부(主簿: 從六品) 1원, 의학교수(醫學敎授: 從六品) 1원[경국대전에서는 2원이었으나 속대전에서 1원으로 감원], 직장(直長: 從七品) 2원, 봉사(奉事: 從八品) 1원[경국대전에서는 2원이었으나 속대전에서 1원으로 감원], 부봉사(副奉事: 正九品) 2원[경국대전에서는 4원이었으나 속대전에서 2원으로 감원], 의학훈도(醫學訓導: 正九品) 1원, 참봉(參奉: 從九品) 3원[경국대전에서는 5원이었으나 속대전에서 3원으로 감원]으로 되어 있다. 이속(吏屬)으로 서원(書員) 1인[경국대전에서는 서리 6인이었으나 대전통편에서 서원으로 내리고 1인으로 감원], 고직(庫直) 1명이 있었다. 

 종기(腫氣)의 치료를 위하여 부속관청(附屬官廳)으로 치종청(治腫廳)이 있었다. 중간에 없앴다가 1603년(선조 36)에 다시 두었으며 뒤에 또 전의감(典醫監)에 병합(倂合)하였다. 치종청에는 교수(敎授) 1원, 침의(鍼醫) 3원, 전위(前衛) 10원, 생도(生徒) 10인이 있었다.  

 [별칭] 

 태의감(太醫監), 사의서(司醫署) 

▷자헌대부(資憲大夫)

 조선시대 정이품(正二品) 동서반(東西班) 문무관(文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정이품의 하계(下階)로서 정헌대부(正憲大夫)보다 아래 자리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후로 문무관에게만 주다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종친(宗親: 임금의 4대손까지의 친족)과 의빈(儀賓: 임금의 사위)에게도 이 품계를 주었다. 

 해당 관직으로는 종친부(宗親府)의 군(君)·지종정경(知宗正卿), 의정부(議政府)의 좌참찬(左參贊)·우참찬(右參贊), 충훈부(忠勳府)의 군(君), 의빈부(儀賓府)의 위(尉), 돈령부(敦寧府)·중추부(中樞府)·의금부(義禁府)·경연청(經筵廳)·성균관(成均館)·춘추관(春秋館)·훈련원(訓練院)의 지사(知事),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 규장각(奎章閣)의 제학(提學),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한성부(漢城府)의 판윤(判尹),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좌빈객(左賓客)·우빈객(右賓客), 수원부(水原府)·광주부(廣州府)의 유수(留守),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도총관(都摠官), 제언사(堤堰司)·비변사(備邊司)·선혜청(宣惠廳)·준천사(濬川司)·교서관(校書館)·승문원(承文院)·봉상시(奉常寺)·종부시(宗簿寺)·사옹원(司饔院)·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사복시(司僕寺)·군기시(軍器寺)·사섬시(司贍寺)·군자감(軍資監)·장악원(掌樂院)·관상감(觀象監)·전의감(典醫監)·사역원(司譯院)·훈련원(訓練院)·선공감(繕工監)·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사도시(司䆃寺)·사재감(司宰監)·전함사(典艦司)·전연사(典涓司)·소격서(昭格署)·종묘서(宗廟署)·사직서(社稷署)·경모궁(景慕宮)·제용감(濟用監)·평시서(平市署)·전생서(典牲署)·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예빈시(禮賓寺)·전설사(典設司)·장흥고(長興庫)·빙고(氷庫)·장원서(掌苑署)·사포서(司圃署)·사축서(司畜署)·조지서(造紙署)·혜민서(惠民署)·도화서(圖畵署)·활인서(活人署)·와서(瓦署)·귀후서(歸厚署)·문소전(文昭殿)·연은전(延恩殿)·영희전(永禧殿)·화령전(華寧殿)·장생전(長生殿)·훈련도감(訓鍊都監)·양향청(糧餉廳)·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제조(提調), 용호영(龍虎營)의 별장(別將), 총리영(總理營)·수어청(守禦廳)의 사(使) 등이 있었다. 

 돈령부·중추부지사를 제외한 지사, 양관대제학, 도총관, 좌우빈객, 제학, 제조, 총리영·수어청사는 모두 예겸(例兼)하였다. 처(妻)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상호군(上護軍) 


 조선시대 오위(五衛)에 두었던 정삼품(正三品) 서반 무관직으로 정원은 8원이다. 위로 오위장(五衛將: 從二品)이 있고, 아래로 대호군(大護軍: 從三品), 호군(護軍: 正四品), 부호군(副護軍: 從四品), 사직(司直: 正五品), 부사직(副司直: 從五品), 사과(司果: 正六品), 부장(部將: 從六品), 부사과(副司果: 從六品), 아래로 사정(司正: 正七品), 부사정(副司正: 從七品), 사맹(司猛: 正八品), 부사맹(副司猛: 從八品), 사용(司勇: 正九品), 부사용(副司勇: 從九品)이 있었다. 관계(官階)는 정삼품 당하관인 어모장군(禦侮將軍)이다.  

 고려시대 2군6위(二軍六衛)의 상장군(上將軍)이 고려 후기에 상호군으로 개칭된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도위사(都尉使)로 고쳤다가 1403년(태종 3) 상호군을 절제사(節制使)로 바꾸었으나, 곧 다시 부활하였다. 1451년(문종 1) 군사제도가 오사(五司)로 개편됨에 따라 오사의 지휘관이 되었다가, 1467년(세조 13) 오위가 성립되자 오위의 고급지휘관이 되었다.  

 현직을 떠난 문(文)·무(武)·음관(蔭官)·잡직(雜職)에 있었던 사람에게 계속해서 녹봉(祿俸)을 주기 위하여 만든 체아직(遞兒職)으로 원록체아(原祿遞兒)가 2원, 선전관(宣傳官)·사자관(寫字官)·제술관(製述官)이 각 1명씩으로 3원, 금군(禁軍)이 3원이었다. 

 

▷의방유취 [醫方類聚]   

266권 264책. 세종은 조선의 자주적 의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1433년(세종 15)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완성한 후, 다시 한방 의서들의 유취(類聚)를 편집하기 위하여 집현전(集賢殿) 부교리(副校理) 김예몽(金禮蒙)과 저작(著作) 유성원(柳誠源) 등에게 명하여 의방(醫方)을 수집 편찬케 하였으며, 뒤에 다시 집현전 직제학(直提學) 김문(金汶) ·신석조(辛碩祖)와 부교리 이예(李芮), 승문원(承文院) 교리 김수온(金守溫), 의관(醫官) 전순의(全循義) ·최윤(崔閏) ·김유지(金有智) 등에게 편찬케 하고, 안평대군 용(瑢)과 도승지(都承旨) 김사철(金思哲) 등에게 감수케 하여 1445년(세종 27)에 완성하였다.

처음 365권으로 편성하였으나, 그 후 다시 산삭교정(刪削校正)하여 총 266권 264책으로 정리 축소되었다. 그러나 곧 인쇄되지 못하고, 문종 및 세조 때까지 정리 ·축소를 계속하다가, 1477년(성종 8) 5월 한계희(韓繼禧) ·임원준(任元濬) 등이 30질을 인쇄 출판하여, 내의원(內醫院)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 ·활인서(活人署) 등 관계 관아에 반포하였다. 내용을 보면 모든 병증(病症)들을 91종의 대강문(大綱門)으로 나누고, 각 문에는 먼저 그 문에 해당되는 병론(病論)을 들고, 모든 약방(藥方)들을 그 출전(出典) 연대순에 따라 열기하였다.


그 방문(方文)의 인용도 방서(方書)의 연대 전후와 문자의 중출(重出) 및 이동(異同)에 따라 그 아래에 자세히 주해(注解)를 가하였다. 더욱 각 방서들의 원문을 그대로 질서정연하게 유취편입(類聚編入)하였으므로 각 병문(病門)에 대한 고금의 약방들을 원문 그대로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 분류된 병문들은 분류 방법에 있어 병증을 중심으로 한 것과 신체(身體)의 부위를 본위로 한 것이 섞여 있어, 각 분과별로 계통적인 지식을 밝히기는 어려운 점도 있으나, 한편 근세 임상의학의 각 분과(分科)들이 거의 포괄되어 있다.

인용된 서적은 한(漢) ·당(唐) 이래로 명조(明朝)에 이르기까지 164종의 고전 의방서가 수록되어 있어, 이 중에는 오늘날 그 원산지인 중국에서도 이미 망실된 것 40여 부나 들어 있다. 처음 30질이 나온 후 재간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 때 대부분이 없어지고,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약탈해 간 12책이 없는 252책 1질(帙)이 일본 센다이[仙臺] 의사 구토가[工藤家]에 오랫동안 보관되었다가, 그 후 다시 다끼 모토후미[多紀元簡]가 주재하는 사이슈우칸[齋修館]을 거쳐 현재 일본 궁내성도서료(宮內省團書寮)에 남아 있다.

다키는 이 책을 살펴보고 보기 드문 비질(秘帙)이며 크게 유용될 수 있는 저서라고 칭찬하였고, 1852년(철종 3), 에도[江戶]시대 의관(醫官) 기타무라 나오히로[喜多村直寬]가 10년을 들여 목활자(木活字)로 재간(再刊)하였다. 그 후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이 성립될 때 일본으로부터 예물의 하나로 일본 재간본 2질이 한국에 헌납되었다.

처음 약탈해 갔을 때 12책이 결본되었던 것을 기타무라는 원서의 형식에 따라 다시 보충하여 원간본의 권수와 일치되는 완본(完本)을 인쇄 출판하였으며, 2질 중 한 질은 장서각도서에 보관되었으나 낙질(落帙)이 되었고, 또 한 질은 전의감(典醫監) 홍철보(洪哲普)에게 하사되었는데 현재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었다. 1965년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전11책으로 간행되었다.


▷식료찬요


조선시대 편찬된 한국 최고(最古)의 식이요법서(食餌療法書)이다. 1460년(세조 6년) 세조의 명에 따라 어의(御醫) 전순의(全循義)가 편찬하였다. 이름만 기록으로 전할 뿐 실전된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2003년 11월 8일 한국서지학회 정기 세미나에서 책과 함께 성균관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 신승운(辛承云)의 연구논문이 발표되면서 일반에 알려졌다. 2005년 1월 25일에는 농촌진흥청 연구진이 번역한 한글본이 출간되었다.

《식료찬요》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음식을 통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기록한 책으로 식료는 음식으로 질병을 다스린다는 뜻이며 식치(食治)라고도 한다. 내용은 중풍을 치료하는 방법을 설명한 제풍(諸風)부터 가슴과 배의 통증을 다스리는 심복통(心腹痛), 급경풍(急驚風)의 발작을 다스리는 경간(驚癎) 등 모두 45가지 질병에 대한 식이요법으로 구성되었다.

서문에는 세조가 책이름을 하사(下賜)한 뒤 전순의에게 서문을 쓰라고 명령하였다는 내용이 있으며 《식의심감》 《식료본초 食療本草》 《대전본초 大全本草》 《보궐식료 補闕食療》 등의 참고문헌도 밝히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성종 18년 4월조에 "의원 전순의가 지은 것으로 경상감사 손순효(孫舜孝)가 상주에서 간행하였다"는 내용을 비롯하여 《훈몽자회》 《해동문헌총록》 등에 이 책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저자 전순의는 세종부터 세조 때까지 전의감(典醫監) 의관(醫官)으로 활동한 조선시대 초기의 명의로서 《의방유취》 편찬에 참가하였다. 또 온실을 이용하여 겨울에도 채소를 재배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한 《산가요록 山家要錄》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산가요록


산가요록(山家要錄)은 조선왕조 전기인 1459년 경에 어의 전순이 지은 요리책이자 농업책으로, 현존하는 요리책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농촌에 필요한 기록" 이라는 뜻을 지니며, 한문의 필사본이다. 이 책은 탁청공 김유의 수운잡방보다 약 80년이 앞서며, 술, 밥, 죽, 국, 떡, 과자, 두부 요리 등 229가지의 조리법을 수록하고 있다. 전순은 세종, 문종, 세조의 세 임금의 어의로 지냈으며, 의식동원을 중요시 여겨, 한국 최초의 식이요법책인 식료찬요(食療纂要)도 편찬하였다.

산가요록은 38가지의 김치와 술빚기만 해도 63가지에 이르며, 또한 생선, 양, 돼지껍질, 도라지, 죽순, 꿩, 원미를 재료로 한 식해도 7가지 종류가 수록하였다. 이 책은 15세기의 식생활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될 뿐만 아니라, 수록된 온실 설계법은 서양의 온실보다 170년이 앞선 것으로 보인다


산가요록(山家要錄)은 조선왕조 전기인 1459년 경에 어의 전순이 지은 요리책이자 농업책으로, 현존하는 요리책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농촌에 필요한 기록" 이라는 뜻을 지니며, 한문의 필사본이다. 이 책은 탁청공 김유의 수운잡방보다 약 80년이 앞서며, 술, 밥, 죽, 국, 떡, 과자, 두부 요리 등 229가지의 조리법을 수록하고 있다. 전순은 세종, 문종, 세조의 세 임금의 어의로 지냈으며, 의식동원을 중요시 여겨, 한국 최초의 식이요법책인 식료찬요(食療纂要)도 편찬하였다.

산가요록은 38가지의 김치와 술빚기만 해도 63가지에 이르며, 또한 생선, 양, 돼지껍질, 도라지, 죽순, 꿩, 원미를 재료로 한 식해도 7가지 종류가 수록하였다. 이 책은 15세기의 식생활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될 뿐만 아니라, 수록된 온실 설계법은 서양의 온실보다 170년이 앞선 것으로 보인다



▷침구택일편집 [鍼灸擇日編集] 


조선 초기의 의관(醫官) 전순의(全循義) ·김의손(金義孫)이 엮은 침구서.

활자본이며, 1권 1책이다. 1445년(세종 27)에 간행되었으나 한국에서는 분실되었고, 고사본(古寫本)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다시 중국으로 전해져 강녕(江寧:南京의 옛 이름으로 난징을 말한다) 번서(藩署)에서 1890년에 복간되었다. 내용은 여러 가지 책을 참고하여 침구시일의 길흉을 택하는 선택법을 기재하고 있다. 김예몽(金禮蒙)의 서(序)와 인용서목(引用書目)이 열거되었는데 그 서목들은 《손진인비급천금방(孫眞人秘急千金方)》 《황제명당구경(黃帝明堂灸經)》 《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補註銅人腧穴鍼灸圖經)》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 등 16종의 침구술에 관하여 기록하였다.

▷밀성군 [密城君, 1430~1479]  


이름은 침(琛). 자 문지(文之). 처음 시호 장효(章孝), 개시(改諡) 효희(孝僖). 어머니는 신빈(愼嬪) 김씨. 총명과 지혜가 뛰어나 세종으로부터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 7세에 밀성군에 봉해지고 13세 연상의 수양대군(세조)과 우애가 깊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힘이 되어주고 세조 즉위 뒤 중요한 자문역을 하였다.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部都摠官) ·의금부도위관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