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직전에도 금리 올린 故 전철환 총재의 X파일

2009. 10. 2. 12:52 인물열전

총선 직전에도 금리 올린 故 전철환 총재의 X파일

 

 

데일리서프

 

2004년 6월 17일, 대한민국이 ‘대통령 탄핵’이라는 한바탕 코미디가 말 그대로 코미디로 끝나고 국민들이 모처럼 평온한 세상을 맞고 있을 때다.

돌연 전철환 전 한국은행 총재가 심장 수술 후유증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작고했다는 소식은 그를 알던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 그 자체였다.

요즘의 잘나가는 정치인이나 연예인처럼 ‘어린애들’한테까지 알려진 그런 인사는 아니었다.

그래도 알만한 사람들에게는 ‘대한민국에 유전 10개만큼의 부를 남겨 준 분’ ‘총선을 코앞에 두고도 금리를 올릴 수 있는 소신의 한국은행 총재’ 등으로 잊혀질 수 없는 기억을 남긴 인물이다.

연초 이헌재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불명예 퇴진한 후 수 없는 사람이 후임 하마평에 올랐다가 상처받고 내려가던 때는 정말로 ‘떠나신 빈 자리’가 너무나도 아쉬었던 고 전철환 총재였다.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가 주도한 중경학파의 멤버로 80년대 살벌한 시기도 거쳤던 전철환 충남대 교수는 그러나 97년 외환위기 직후 한국은행 총재로 부임하면서 한국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시장경제론자가 나타났다’는 찬사를 받는 당국자로 변신했다.

무엇보다도 국채 시장을 개척한 공로는 유전 10개를 개발한 것과 마찬가지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가 공직에 있는 동안 남긴 ‘결벽증’에 가까운 몸가짐은 두고두고 공직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지난 16일 아버지 1주기 모임을 준비하고 있던 전종익 헌법재판소 연구관을 만났다. 그는 전 총재의 차남이다.

헌법재판소에서 1년간 기자들에게 헌재 판결을 설명하는 일을 해 온 그에게 헌법 아닌 주제를 들고 온 기자는 처음이었던 모양이다.

“1년동안 공보 업무를 담당했다가 최근 벗어났습니다.” 네이버 검색을 해보니 과연 지난 한해 대통령 탄핵과 행정수도 등 헌재의 주요한 판결 기사마다 그의 설명이 등장한다.

기사에 두번 등장했던 둘째 아들

전철환 총재는 한국은행 기자들에게 둘째 아들 ‘흉’을 본 적이 있다. 전 총재는 언젠가 밥먹는 자리에서 “한국은행 총재로 임명되자 마자 두 아들을 불러 오늘부터 내가 물러나는 날까지 주식은 단 한주도 사지도 팔지도 마라 했다”며 “큰 아들은 흔쾌히 알아들었는데 둘째 녀석이 조금 난감한 표정이더라”고 ‘씹은’ 적이 있다.

과연 아버지 방침에 저항했는지 부터 전종익 연구관에게 물었다.

“그때가 헌법재판소에 취직해서 월급을 받은 직후였는데요, 사회에 나와 처음 받은 월급으로 뭘 할까 하면서 주식을 샀었습니다.”

그는 ‘첫 월급=주식투자’가 누구나 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지만 은행원 첫 월급을 ‘유흥비’로 탕진했던 기자는 조금 꺼림칙한 대목이었다.

전종익 연구관은 “하지 마라 하시니 유상증자 때나 한번 주식을 샀습니다”고 말했다. 그는 “오래 갖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돈을 벌게는 됐다”고 밝히다가 “그래도 아버지 몰래 한번은 아주 조금 판 적이 있다”고 실토했다.

전종익 연구관이 ‘전철환 총재의 차남’으로 신문기사에 또다시 오른 것은 바로 결혼식 때 일이다.

구설에 대해서는 원천봉쇄하면서 살아온 전철환 총재는 아들의 결혼식을 한국은행에 절대 비밀로 붙였다. 간부들이 업무를 전폐하고 기관장 아들 잔치에 달려오는 ‘한국적 병폐’는 커녕 결혼식 며칠이 지나서야 이 사실이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정이 소개된 기사를 통해 큰 아들도 한국은행 몰래 결혼식을 치렀다는 것까지 함께 알려졌다. 전 총재의 두 아들은 모두 총재 재임 중 장가들었다.

“아버지 4촌 형제들이 아주 가깝게 지내시고 집안 모임을 많이 가졌습니다”고 말하는 전종익 연구관은 “완전한 가족 행사로 치렀는데도 사람이 무지 많았다”고 회고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최측근 역할까지

고 전철환 총재는 재야 학자 시절 신협 활동을 벌이면서 서민 경제운동에 깊게 간여했다. 고시에 합격해 경제기획원에서도 근무했지만 역시 변형윤 교수 문하의 진보경제학자로서 면모를 감추지는 못했다.

공직을 그만두고 1976년부터 충남대 교수로 재직하다 80년 신군부 출범기를 맞았다. 군사정권은 전철환 교수까지 불온 성향으로 분류해 적지 않은 고초를 치렀다는 얘기도 전해지지만 그는 이 때 일에 대해서는 생전에 언급한 적이 거의 없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전종익 연구관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하신 적이 없다”며 “다만 그 무렵 손님이 찾아오면 어머니가 ‘너희들은 들어가 있어라’하면서 단속하던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기억의 단편을 전한다.

전 연구관은 “박현채 변형윤 교수께서 신군부에 의해 교직에서 해직당한 후 아버지와 등산을 자주 다니셨다”고 소개했다.

둘째 아들인 전 연구관은 집에서는 아버지의 각종 원고를 받아 적고 메모를 정리해주는 조교 역할도 수행했다. 큰 아들이 의학을 전공하다 보니 그나마 둘째 아들의 전공인 법학이 아버지와 가까운 때문이기도 했다.

전 연구관은 전철환 총재가 작고한 후 서재의 수많은 책들에서 밑줄 친 부분과 주석, 작은 메모들을 일일이 찾아내 충남대에 기증했다.

“짧은 문장을 하나 쓰실 때도 엄청나게 많은 다른 글들을 먼저 읽으셨습니다.”

서재에서 타자보조도 했던 전 연구관은 전철환 총재가 A4용지 1장을 조금 넘는 신문 기고를 할 때도 참고 문헌을 책상 옆에 수북이 쌓아놓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전 총재가 한은 총재에서 물러날 때 남긴 퇴임사를 읽고 당시 출입기자단 간사였던 진병태 연합뉴스 기자가 “독서를 하고 글을 남긴다는 게 어떤 건지를 확실히 배웠다”고 평가한 일이 새삼 떠올랐다.

준비 안 된 영면의 문턱에서 마지막 한마디

전철환 총재 작고 당시 보도에 따르면 허리가 좋지 않았던 전 총재는 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다가 심장이 너무 약해서 허리 수술을 감당할 수 없다는 진단 결과를 받았다.

진단 결과에 따라 심장 수술을 먼저 받았다가 그만 회복되지 못하고 그는 운명했다.

그러나 전 연구관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전철환 총재의 심장 상태는 수술을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심각한 문제를 이미 갖고 있었다.

가족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전 연구관은 밝혔다.

“의사들로 부터 심장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얘기를 나와 형님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께는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드리기 위해 ‘허리 수술 위한 전단계’라고만 알렸습니다”고 그는 말했다.

돌아가시고 나자 그는 “차라리 말씀이라도 드렸으면 아버지께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한편으로는 마지막까지 마음은 편하게 해드렸다는 생각도 든다”고 밝혔다. 다만 마지막 이별의 시간을 나누지 못한 어머니의 허전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것이 가족들과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던 듯하다.

전철환 총재는 침대에 누워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 입구에서 전 연구관에게 ‘몇 가지 문서는 어디다 뒀다’는 한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전철환 총재의 가족들이 들은 마지막 말씀이기도 했다.

서재에 그대로 남겨둔 한 길 인생

처음 수술 경과는 제법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갑작스런 상황을 맞게 됐다.

“수술 전 의사들이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는 있다고 얘기했었습니다. 수술 마치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의사들이 얘기했던 문제들이 모두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철환 총재는 수술 이후 의식을 찾지 못했다. 수술실 입구에서 “문서는 어디다 뒀다”는 가장으로서의 한마디 말고는 실천 지식인으로 걸어온 한 길 인생에서 이 나라 민중들에게 마지막 육성은 전혀 남기지 못했다.

솔뫼 선생은 그렇게 돌아가셨다.

장례를 마치고 나니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는 일이 남았다.

서재로 들어서자 ‘죽음을 전혀 준비하지 못한’ 아버지 모습이 곳곳에서 전종익 연구관의 눈에 들어왔다.

책상에는 쓰다 만 원고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수첩에는 수술 후에 식사약속을 한 일정이 적혀 있었다.

글을 쓰기 위해 열어 놓은 책과 함께 조그마한 메모지에는 투박한 사투리의 생전 말투 그대로 적어 놓은 것들도 그대로 들어왔다.

“지금도 생전의 아버지 말투가 그대로 담긴 메모를 볼 때 아버지 생각이 제일 많이 납니다.”

개중에는 전 연구관에게 직접 읽어준 글귀도 많았다고 한다.

돌아가신 후 자식들 심정과는 전혀 딴판인 말씀을 생전에 기자들 앞에서 한 적도 있다.

“요즘은 친구들 모이면 ‘우리 아버지 그만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 안 들을 때까지만 살다가는 게 소원이라고 얘기합니다.” 콜금리 결정하는 회의를 마치고 기자들하고 곰탕 한 그릇 먹을 때 전철환 총재가 툭 꺼내놓은 ‘세상사는 이야기’였다.

메모 속에 담겨진 커다란 구상의 DNA조각들

전철환 총재는 그 연배의 어른들 가운데서 기골이 장대한 편에 속한다.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전북 익산에 있는 본가에서는 몇 가지 힘든 일들을 “방학때 환이(전철환 총재의 고향에서 애칭) 오거든 하자”며 미뤄둘 정도 였다고 한다.

건강에 관한한 동년배들보다 더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철환 총재는 자신의 연구를 정리하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전종익 연구관은 “아버지가 몇 년만 더 사셨더라면 우선 곳곳의 메모에 담긴 생각들이 좀더 국민들에게 의미있는 구상으로 정리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한은 총재에서 퇴임하신 후 공적자금관리위원장을 맡기는 하셨지만 연구를 많이 하시고 구상도 저에게 자주 들려주셨습니다”고 소개했다.

초기 형태의 메모라든지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적은 것, 그때그때 읽은 기사를 옮겨 놓은 것 등 전철환 총재가 가진 생각의 편린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비록 타자보조 업무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법관인 전종익 연구관이 금융원로의 연구 방향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돌아가시기 직전 연구에 대해 전 연구관은 “국가 기관의 운영방향에 대한 것도 있었고, 보험이라든지 화폐, 금융 문제도 들어 있었다”고 소개했다.

전 연구관보다도 더 식견이 부족한 기자이긴 하지만 전철환 총재가 살아온 길에 비춰 추론하건데, 서민금융으로부터 시작해 국가기관 운영에 관한 내용을 하나의 줄기로 묶는 작업을 해 온듯 하다.

전철환 총재가 남긴 자료는 서두에서 밝혔듯 현재 충남대학교에 기증됐다. 이곳에서 전철환 총재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연구를 계승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18일 전철환 총재 1주기를 즈음해 제자들은 유고집도 발간했다.

10년만에 함께 살게된 아버지의 잔소리

전종익 연구관은 고등학교 때부터 부모 슬하를 떠나 객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충남대 교수인데 자신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주로 형과 함께 살다가 형이 현역 입대하고는 그야말로 혼자 숙식하며 살아왔다. ‘자유’가 몸에 밴 인생으로 적응해 갈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전 연구관의 자유인생은 직장에 입사하면서 끝장나고 말았다. 헌법재판소에 임용되고 난 직후에 아버지가 한국은행 총재가 돼서 서울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남들은 직장에 입사하면서부터 부모로 부터 독립된 생활을 하지만 전 연구관은 그만 거꾸로 직장인이 되면서 부모와 다시 만나게 됐다.

고등학교 때부터 10여년간 ‘군기가 빠져 온’ 전 연구관은 아버지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아무리 전날 과로를 하고 술을 마시고 들어와도 아버지는 아침 6시부터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 “공무원이 출근부터 자세를 확립해야 한다”고 호통을 치면서 잠을 깨웠다.

아버지가 한국은행 총재가 됐다면 축하를 받을 일에 속하겠지만 전 연구관은 10년만에 아버지한테 ‘얹혀 살게 된’ 점에 있어서는 적잖은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전철환 총재의 가족들과 제자들, 그리고 전 총재를 모셨던 한은 사람들은 18일 전북 익산에서 1주기 추모행사를 가졌다.

외환위기 직후 한국은행 총재로 구원등판한 그는 2001년 국제통화기금(IMF) 차입금을 모두 상환하면서 몽블랑이 아닌 국산 만년필로 서명해야 한다는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모처럼 사진기자들을 잔뜩 모아놓고 털털한 된장빛 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던 솔뫼 선생의 체취가 너무나도 그리운 1주기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