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15. 09:13ㆍ 인물열전
전효순(全孝順)
생년 ?(미상)
졸년 ?(미상)
시대 조선 전기
본관 옥천(沃川)
활동분야 무신 > 무신
부 전오례(全五禮)
출생지 충청북도 옥천(沃川)
[상세내용]
전효순(全孝順)에 대하여
생졸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무인. 본관은 옥천(沃川). 충청북도 옥천(沃川)에서 전오례(全五禮)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들은 전응경(全應卿)이며, 손자는 전팽수(全彭壽)‧전팽령(全彭齡)이다.
전팽수는 1519년(중종 14) 기묘식년문과(己卯式年文科)에 병과 5등으로 급제하여 부정(副正)(주1)을, 전팽령은 1524년(중종 19) 갑신별시문과(甲申別試文科)에 병과 23등으로 급제하여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그는 무과에 합격한 뒤 석성현감(石城縣監)(주2)을 역임하였다. 후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참고문헌]
忠淸北道人物志
[집필자]
이관성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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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부정[ 副正 ]
유형 제도
시대 조선
성격 관직
시행일시 조선시대
정의
조선시대 종친부(宗親府)·돈녕부(敦寧府)·훈련원(訓鍊院) 등에 소속된 종3품 관직.
내용
이 외 봉상시(奉常寺)·사복시(司僕寺)·군기시(軍器寺)·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사도시(司䆃寺)·예빈시(禮賓寺)·사섬시(司贍寺)·군자감(軍資監)·제용감(濟用監)·선공감(繕工監)·사재감(司宰監)·관상감(觀象監)·전의감(典醫監)·사역원(司譯院) 등에도 종3품으로 소속되었다.
종친부의 부정은 1443년(세종 25) 12월에 정한 종친봉작법 중, 1457년(세조 3) 7월에 다시 정(正)·영(令)·감(監)을 도정(都正)·정·부정·영·부령·감·부감으로 세분할 때 나타난다. 돈녕부의 부정은 1470년(성종 1) 4월의 관제 개혁으로 1414년(태종 14) 정월 돈녕부를 설치할 때 제정한 첨지(僉知)를 도정, 동첨지(同僉知)를 부정으로 고쳤다.
훈련원의 부정은 1466년 정월에 훈련관(訓鍊觀)을 훈련원으로 개정하고 지사(知事)를 부정으로 고쳤다. 봉상시·사복시·내자시·내섬시·예빈시·사섬시의 부정은 1466년 정월에 윤(尹)을 고친 이름이다.
군기시의 부정은 1414년에 감을 고친 이름이며, 사도시의 부정은 사도시가 본래 국초에 요물고(料物庫)의 후신으로서 여러 번 변화를 거쳐 1483년(성종 14) 12월사도서(司䆃署)가 사도시로 바뀌면서 종3품으로 승격, 『경국대전』에 실리게 된 듯하다.
군자감·제용감·선공감·사제감·전의감의 부정은 1414년 정월 감을 정으로 소감을 부정으로 고쳤다가, 1466년 정월 격을 올려 판사(判事)를 정으로, 정을 부정으로, 부정을 첨정으로 고치는 일련의 개혁이 이루어질 적에 종4품에서 종3품으로 승격하였다.
관상감의 부정은 태조신반관제(太祖新頒官制)에서는 종4품이었다가, 1414년 정월에 소윤(少尹)으로 고치고, 1466년 정월 판사를 정으로, 정을 부정으로, 부정을 첨정으로 고칠 적에 종3품으로 승격하였다. 사역원의 부정은 1466년 정월 지사를 고친 이름이다.
참고문헌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부정 [副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주2)석성[ 石城 ]
이칭별칭 진악산현(珍惡山縣), 석산(石山)
유형 지명
성격 고지명
소재지 충청남도 부여군
정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의 옛 지명.
내용
본래 백제의 진악산현(珍惡山縣)이었는데, 686년(신문왕 6)석산(石山)이라 고치고, 757년(경덕왕 16)부여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940년(태조 23)석성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공주에 예속시켰으며, 1172년(명종 2) 감무를 두었다가 뒤에 혁파했다.
1371년(공민왕 20) 부여감무로 겸임하게 하였다가 1390년(공양왕 2) 다시 감무를 두었으며, 1414년(태종 14)이산(尼山)과 합하여 이성(尼城)이 되었다. 다음해에 이곳이 고다진(古多津)으로 통하는 요충지라 하여 다시 나누고 현감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 승격하여 군(郡)이 된 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원북면ㆍ정지면ㆍ삼산면ㆍ병촌면ㆍ우곤면은 논산시 성동면으로, 현내면ㆍ북면ㆍ증산면ㆍ비당면은 부여군 석성면으로 병합하였다.
석성의 지명 유래는 백제 때 이곳이 부여의 외곽지대를 이루어 군사상ㆍ교통상 요지여서 돌로 쌓은 석성이 즐비하다는 데서 나왔다고 한다. 백제 의자왕 때는 백제군과 나당연합군간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으며, 고려 우왕 때는 두 차례에 걸쳐 왜구가 침입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금강의 지류인 수탕천(水湯川)변 저포(猪浦)에서 이곳의 물자를 모아 금강을 통해 경강(京江)으로 운반하였다. 육로상으로는 노성ㆍ부여ㆍ홍산ㆍ임천ㆍ용안 등과 연결되는 도로가 있어 교통상의 요지였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대동지지(大東地志)』
『충청남도지(忠淸南道誌)』(충청남도지편찬위원회, 1979)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석성 [石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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