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13. 09:18ㆍ 인물열전
조선왕조실록
중종 20년 을유(1525,가정 4)
10월11일 (병신)
20-10-11[05] 병조 판서 김극핍이 북도의 평사로 의망할 만한 사람들을 아뢰다
병조 판서 김극핍(金克愊)이 전적(典籍) 권겸(權㻩)·사평(司評)(주1) 전팽수(全彭壽)·예조 좌랑 강전(姜銓)을 북도(北道)의 평사(評事)로 의망(擬望)(주2)하여 아뢰니, 전교하기를,
“평사는 곧 문서 기록을 맡는 것이어서 소임이 지극히 중하므로 반드시 가려서 차임(差任)한 다음, 체직되어 올 때에는 조정이 또한 함께 변방 일을 의논해야 하니, 다시 의망하여 아뢰라.”
하매, 김극핍이 아뢰기를,
“5∼6품 중에는 의망할 만한 사람이 없고,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 유충관(柳忠寬)과 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 임붕(林鵬)이 가당하지만, 함부로 의망할 수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준품(准品)인 사람이 없으면 또한 승진시켜 제수해야 한다.”
하였다.
【원전】 16 집 459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주1)사평[ 司評 ]
시대 조선(朝鮮)
분류 관직>동반>문관
조선시대 장예원(掌隷院)의 정육품(正六品) 관직으로 정원은 2원이다. 사의(司議: 正五品)의 다음으로 노예(奴隷)의 문서(文書)와 소송(訴訟)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1401년(태종 1) 형조도관(刑曹都官)을 설치하였다. 1466년(세조 12) 형조도관이 변정원(辨定院)으로 개칭되면서 좌랑을 사평으로 고쳤다. 뒤에 장예원의 업무가 축소됨에 따라 4원에서 2원으로 감원되었으며 소속관리들의 수탈이 심해지자 그 임무가 점차 형조로 이관되었다.
참고문헌
대전회통(大典會通)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사평 [司評] (관직명사전, 2011. 1. 7., 한국학중앙연구원)
(주2)의망[ 擬望 ]
후보자를 천거함. 관원을 임명할 때 세 사람의 후보자를 추천하던 일. 임금은 추천자 명단을 참조하여 결정하였음. [유사어]비의(備擬). 의차(擬差). 의천(擬薦). 주의(注擬).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의망 [擬望]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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