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23. 07:19ㆍ 인물열전
승정원일기
고종 37년 경자(1900, 광무4)
1월 20일(계해, 양력 2월 19일) 맑음
좌목 37-01-20[53]
진하를 받을 때의 각 차비 이하의 별단에 대해, 선조관인 6품 조성재 등에게 시상하라는 조령
○ 진하를 받을 때의 각 차비 이하의 별단과 관련하여 조령을 내리기를,
“선조관(宣詔官)인 6품 조성재(趙性載)는 가자하라. 전조관(展詔官)인 비서원 낭 이오응(李五應)ㆍ서만순(徐晩淳), 선표관(宣表官)인 홍문관 시독 한흥교(韓興敎), 전표관(展表官)인 비서원 낭 이의국(李義國)ㆍ이병소(李秉韶), 좌장례 홍승두(洪承斗), 우장례 이순범(李舜範), 찬홀인 찬의 신규선(申奎善), 동서창인 주사 황의철ㆍ김용규, 대치사관인 주사 유석, 선전목관인 주사 권종국, 인접(引接)인 주사 최규원ㆍ이태두, 장례원 장례 이희상, 주사 이선태ㆍ엄주원, 치사정서(致詞正書)인 궁내부 주사 전광묵(全光默), 태복사 주사 심흥택(沈興澤)ㆍ이호집(李鎬潗)ㆍ윤상욱(尹相郁), 주시인 주사 한응석ㆍ팽흥주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라. 그 나머지 반감(飯監), 수복, 원역 등에게는 판하한 대로 시상하라.”하였다.
-------------------------------------------------------------------------------------
고종 38년 신축(1901, 광무5)
5월 22일(병술, 양력 7월 7일) 맑음
좌목 38-05-22[13]
진찬소 당상 등의 별단에 대해, 당상인 궁내부 특진관 민영휘 등에게 시상하라는 조령
○ 진찬소 당상과 낭청 이하, 궁내부 대신, 장례원 경, 상의사 장 이하의 별단과 관련하여 조령을 내리기를,
“당상인 궁내부 특진관 민영휘(閔泳徽), 판돈녕원사 홍순형(洪淳馨), 의정부 찬정 윤정구(尹定求)에게 각각 숙마(熟馬) 1필을 면급(面給)하라. 낭청인 전선사 주사 이응직(李膺稙), 태복사 주사 이호집(李鎬潗), 농상공부 주사 박희양(朴煕陽), 탁지부 주사 신유선(申有善)은 모두 승서(陞敍)하라. 별간역인 검사과장(檢査課長) 오현기(吳顯耆), 전 사장(司長) 최학규(崔鶴圭), 전 의관(議官) 박대용(朴大鏞)은 모두 수령에 조용(調用)하고, 장원과장(莊園課長) 박창선(朴昌善)은 가자(加資)하라. 규장각 주사 오인선(吳仁善)은 수령에 조용하고, 내부 판적국장(內部版籍局長) 이해정(李海晶)은 가자하라. 궁내부대신임시서리 윤정구(尹定求)에게 숙마 1필을 사급(賜給)하라. 감조관(監造官) 임건상(林健相)ㆍ이응직(李膺稙), 낭청 박희양(朴煕陽)은 모두 승서하라. 장례원 경 민영휘(閔泳徽)에게 숙마 1필을 사급하고, 협률과 주사(協律課主事) 정광표(鄭光杓)에게 아마(兒馬) 1필을 사급하라. 상의사 장 김유제(金有濟), 주사 박경하(朴璟夏)ㆍ신태준(申泰俊)ㆍ이승주(李承周)ㆍ나재민(羅在珉), 겸임 주사 내장원주사 김격(金格), 내장원 장원과 주사 정준동(鄭俊東)에게 각각 아마 1필을,
홀기정서(笏記正書)인 예식원 주사(禮式院主事) 이희규(李煕圭)ㆍ전광묵(全光默), 군부 주사 김한조(金漢朝)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라.
그 나머지 사자관(寫字官), 화원(畫員), 패장(牌長), 원역(員役), 여령(女伶), 공장 등에 대해서는 모두 판하한 대로 시상(施賞)하라.”
하였다.
-------------------------------------------------------------------------------------
고종 41년 갑진(1904, 광무8)
9월 9일(갑신, 양력 10월 17일)
좌목 41-09-09[13]
은진 군수에 의정부 참서관 장홍식을 임용하였다
○ 의정부 참서관 장홍식(張鴻植)을 은진 군수(恩津郡守)에 임용하고, 종3품 장익후(張益厚)를 곽산 군수에 임용하고, 평리원 검사(平理院檢事) 김종응(金鍾應)을 옥구 군수(沃溝郡守)에 임용하고, 풍천 군수(豐川郡守) 정희섭(丁憙燮)을 함안 군수(咸安郡守)에 임용하고,
예식원 주사(禮式院主事) 전광묵(全光默)을 함열 군수(咸悅郡守)(주1)에 임용하고, 6품 백남준(白南峻)을 이원 군수에 임용하고, 6품 김종중(金鍾重)을 용강 군수(龍岡郡守)에 임용하고, 6품 유병률(劉秉律)을 고원 군수(高原郡守)에 임용하였다.
-------------------------------------------------------------------------------------
고종 42년 을사(1905, 광무9)
1월 23일(병신, 양력 2월 26일) 잠깐 눈 옴
좌목 42-01-23[07]
동래 군수에 종2품 원유상을 임용하였다
○ 종2품 원유상(元有常)을 동래 군수(東萊郡守)에 임용하고, 정3품 이순영(李錞榮)을 남해 군수(南海郡守)에 임용하고, 춘천 군수(春川郡守) 김영규(金泳圭)를 원주 군수(原州郡守)에 임용하고, 고성 군수(高城郡守) 이명래(李明來)를 춘천 군수에 임용하고, 탁지부 재무관 민형기(閔亨基)를 고성 군수에 임용하고, 6품 서상규(徐相奎)를 인동 군수(仁同郡守)에 임용하고, 6품 장복규(張復圭)를 창평 군수(昌平郡守)에 임용하고, 6품 이우영(李宇榮)을 강서 군수(江西郡守)에 임용하고, 정3품 민병길(閔丙吉)을 창녕 군수(昌寧郡守)에 임용하고, 시강원 시종관 김황진(金璜鎭)을 지례 군수(知禮郡守)에 임용하고, 6품 김병길(金秉吉)을 단성 군수(丹城郡守)에 임용하고, 6품 장윤원(張允遠)을 영산 군수(靈山郡守)에 임용하고, 곡성 군수(谷城郡守) 심택진(沈宅鎭)을 고령 군수(高靈郡守)에 임용하고,
6품 전광묵(全光默)을 함창 군수(咸昌郡守)(주2)에 임용하고, 이천 군수(伊川郡守) 노병직(盧炳稷)을 적성 군수(積城郡守)에 임용하고, 종2품 박승언(朴承彦)을 이천 군수에 임용하고, 정3품 심선택(沈選澤)을 곡성 군수에 임용하고, 시종원 좌시어(侍從院左侍御) 유석주(柳錫疇)를 한산 군수(韓山郡守)에 임용하고, 전 군수 장홍식(張鴻植)을 평창 군수에 임용하고, 육군 참령(陸軍參領) 김한정(金漢鼎)을 대구 군수에 임용하고, 흥덕 군수(興德郡守) 김상기(金商基)를 은진 군수에 임용하고, 인동 군수 민명식(閔明植)을 흥덕 군수에 임용하고, 영동 군수(永同郡守) 천세현(千世顯)을 김화 군수(金化郡守)에 임용하고, 6품 최영근(崔永根)을 영동 군수에 임용하고, 정3품 김병욱(金炳旭)을 금산 군수(金山郡守)에 임용하고, 6품 박승원(朴承源)을 창성 군수(昌城郡守)에 임용하고, 6품 정재학(鄭在學)을 순흥 군수(順興郡守)에 임용하고, 군부 주사 박초양(朴初陽)을 단양 군수(丹陽郡守)에 임용하고, 종묘서 영 김교헌(金敎憲)을 군위 군수(軍威郡守)에 임용하고, 개령 군수(開寧郡守) 조동용(趙東瑢)을 함열 군수에 임용하고, 6품 이재택(李載宅)을 개령 군수에 임용하고, 통진 군수(通津郡守) 안중식(安中植)을 양천 군수(陽川郡守)에 임용하고, 전 의관(議官) 이보현(李普鉉)을 통진 군수에 임용하고, 전 군수 정해팔(鄭海八)을 진해 군수(鎭海郡守)에 임용하고, 6품 이범직(李範溭)을 안의 군수에 임용하고, 농상공부 참서관 윤규섭(尹奎燮)을 음죽 군수(陰竹郡守)에 임용하고, 정3품 이병화(李秉化)를 청풍 군수(淸風郡守)에 임용하였다.
(주1)함열[ 咸悅 ]
이칭별칭 감물아현(甘物阿縣), 노산(魯山)
유형 지명
시대 고대/남북국/통일신라
성격 고지명
소재지 전라북도 익산시
정의
전라북도 익산지역의 옛 지명.
내용
본래 백제의 감물아현(甘物阿縣)이었는데 당나라가 백제를 멸한 뒤에 노산(魯山)으로 고쳐 노산주(魯山州)의 영현으로 하였다. 신라 경덕왕 때 함열로 고쳐 임피군(臨陂郡)의 영현으로 하였다가, 고려 현종 때전주에 예속시켰고 명종 때에 감무를 두었다.
조선 태종 때용안(龍安)과 합쳐 안열(安悅)로 하였다가, 뒤에 이를 나누어 각각 현감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군을 폐하고 일부는 옥구군에, 나머지는 익산군에 병합되었고 1979년에 함열면이 읍으로 승격, 1995년 익산군과 이리시가 통합되어 익산시로 되었다.
금강 남쪽 호남평야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임천(林川)ㆍ한산(韓山)ㆍ홍산(鴻山) 등지와, 남쪽으로는 임피ㆍ김제ㆍ만경 등지와 연결되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금강연안에 성당(聖堂) 조운창(漕運倉)이 있어 이곳의 곡식을 경창(京倉)으로 날랐다.
부근의 용산(龍山)에는 백제 때 산성의 유물이 있었고, 소방산(所防山) 봉수는 서쪽으로 임피현 오성산(五聖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용안현의 광두원산(廣頭院山)에 응하였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동지지(大東地志)』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함열 [咸悅]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주2)함창[ 咸昌 ]
이칭별칭 고동람군(古冬攬郡), 고릉군(古陵郡), 고령군(古寧郡), 함녕군(咸寧郡)
유형 지명
시대 고려
성격 고지명
소재지 경상북도 상주시
정의
경상북도 상주지역의 옛 지명.
내용
본래 고령가야국(古寧伽耶國)이었는데 신라가 이를 취하여 고동람군(古冬攬郡, 또는 古陵郡)을 설치하였다. 경덕왕 때고령군(古寧郡)으로 고쳤고 관산(冠山)ㆍ가선(嘉善)ㆍ호계(虎溪) 등을 임내(任內)로 하였다.
961년(광종 12) 함녕군(咸寧郡)으로 고쳤고, 현종 때 상주에 귀속시키고 함창으로 바꾸었으며, 명종 때에 감무를 설치하였고 1413년(태종 13)에 현감을 두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상주군에 병합되어 함창면이 되었다.
1980년 읍으로 승격되었고 1995년에는 상주군과 상주시가 통합되어 새로운 상주시가 되었다. 함창의 옛 이름인 고동람은 대읍(大邑) 또는 장읍(長邑)의 뜻을 가지므로 부족국시대의 족장이 살았던 지역으로 추측된다. 이 지역은 소백산맥 남쪽사면의 낙동강상류를 차지하는 분지의 지형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경상도 북부의 교통요지로 문경과 상주를 잇는 남북의 도로와 보은과 용궁(龍宮)을 잇는 동서의 도로가 발달하였고, 부근에 덕통역(德通驛)이 있었다. 남산(南山) 봉수는 남쪽의 소산(所山)과 북쪽의 선암산(禪巖山) 봉수를 이어주었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대동지지(大東地志)』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함창 [咸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인물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승정원일기 고찰[전흥윤(全興潤)] (0) | 2015.09.27 |
---|---|
[스크랩] 승정원일기 고찰[전위섭(全威燮)] (0) | 2015.09.25 |
육영공원(育英公院)[전양묵] (0) | 2015.09.21 |
제중원의 조선인 관리들[전양묵] (0) | 2015.09.21 |
근대식 기계 및 서적 구입[전양묵] (0) | 2015.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