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만의정 이야기

2015. 10. 30. 13:51 인물열전

 

 

 

 

 

 

 

 

 

 

 

 

 

 

 

명 칭 :  만의정(晩義亭)
소 재 지 :  지보면 만화리 402-1
(원소재지 :  예천군 지보면 만화리 402-1)
건 축 주 :  전세삼(全世三)
건축시기 :  1789년
중건시기 :  1880년

건축 이야기
만의정은 1789년에 건립하여 용궁인(龍宮人) 전세삼(全世三)이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다.
개화 초기에는 ‘창동의숙’이라 하여 신학문을 가르쳐 지보초등학교의 전신이 되었고, 1950년대까지 야학(夜學)으로 문맹퇴치(文盲退治)를 하던 곳이다.

건축 구성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 담장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일각문을 내어 출입하게 하였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둔 중당협실형으로,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가구는 오량가의 홑처마집이다.

관련인물
- 전세삼
전세삼(全世三, 1716~1789)의 자는 의숙(義叔), 호는 학고(學古)로 전진광(全震光, 1685~1756)의 아들이다. 만년에 세속을 등지고 몇 칸의 초가집을 지어 ‘학위당(學爲堂)’이라 하고,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학위당이 발전하여 창동의숙(彰東義塾)이 되었는데, 전홍교(全洪敎), 전홍우(全洪佑), 전동진(全東震), 전병표(全炳豹) 등을 배출하였다.

전홍교(全洪敎)는 지보면 만화리 만촌(晩村) 출신으로, 본관은 용궁이다. 자는 인오(仁吾), 호는 남파(南坡)이고, 전지련(全智鍊)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기질이 남다르더니, 1870년(고종 7)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71년 승문원 정자에 임명되어 문장의 기록과 해석에 깊고 민첩하여 오래도록 머물더니, 탄실 주서로 옮겼다가 1872년 다시 승문원박사가 되었다. 이후 봉상시직장에 임명되었고, 성균관전적으로 승진되고, 금오랑이 되었으며, 또 대시에 참여하였다.

1874년 사헌부지평에 오르고 1879년 사간원정언을 거쳐 이조정랑으로 옮겼는데, 내직 24개월이면 외직으로 나가야 하는 규정이 있어서 고종 임금은 양산군수로 보내려 하였으나 반대하는 이가 있어 1880년 대동도 찰방으로 나갔다. 이때 관찰사 민영위가 시험으로 차출하니, 바르게 처신하고 굴하지 않아 많은 선비가 우러러 보았다. 1881년 사헌부감찰로 옮겼고, 1882년 다시 성균관전적, 감찰이 되었다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 큰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만촌으로 돌아와 자연을 벗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문장과 서예에 뛰어나고 마음이 너그럽고 동정심이 많아 기꺼이 이웃을 도왔으며, 지금도 지보면 일대에서는 ‘전(全) 대동네 집은 인심이 넉넉한 집’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대동네 집이란 말은 전홍교가 대동도 찰방 벼슬을 했기 때문이다. 만촌 마을 뒤 별묘에 제향되었다. 전홍교는 주로 대간 벼슬을 하면서 공직 사회의 부정부패와 싸우다 일제의 침투로 인한 혼란에 환멸을 느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와서 여생을 보낸 곧고 깨끗한 선비였다. 전동진은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군관학교(新興軍官學校)에서 활동하였으며, 전병표는 경상도 일대의 의용단(義勇團) 군무국장으로 활동하였다.
- 배출 인물
전홍교(全洪敎), 전홍우(全洪佑), 전동진(全東震), 전병표(全炳豹), 현석호(玄錫虎), 권병로(權炳魯)

주변경관
- 만의정
만의정(晩義亭)은 지보면 만화리에 있다. 지보면은 예천군의 1읍 11면 중 하나로 군의 남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본래 용궁군 내하면으로, 조선시대 말까지 용궁군의 내상면, 내하면, 신상면 등 3개의 지역에 해당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용궁군이 없어지면서, ‘지보역’의 이름을 따서 ‘지보면’이라 하여 예천군에 편입되었다. 지보면의 사방 경계는 동쪽은 안동시 풍천면, 서쪽은 용궁면, 남쪽은 풍양면과 의성군 신평면, 북쪽은 개포면과 호명면에 접한다. 만화리는 지보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2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원래 용궁군 내상면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만촌’과 ‘방화’의 이름을 따서 ‘만화리’라 하고 예천군 지보면에 편입되었다.

만화리는 ‘방화’, ‘만촌(晩村)’, ‘구태’, ‘신촌’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만의정이 위치한 곳은 ‘만촌마을’이다. 만촌은 ‘마내동’ 또는 ‘만의동(晩義洞)’이라고도 한다. 50여 가구의 축산전씨 집성촌으로, 근방에서 가장 늦게 생긴 마을이다. 임진왜란을 피하기 위해 ‘구태마을’에서 전씨들이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고 한다. 당초 이 마을의 북서쪽에 있는 가짠네집골이란 골짜기에 가짠네라는 산지기 천돌이의 집이 있었고, 그 산지기가 개척한 곳이며 마을 앞들이 ‘마느실’이므로 거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 오래도록 의리를 잘 지키는 곳이라고 하여 ‘만의동(晩義洞)’이라 한다고 하였다.

예천 > 내성천남부권 > 만화리
- 만화리.
만화리는 지보면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2㎞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원래 용궁군 내상면(內上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만촌’과 ‘방화’의 이름을 따서 ‘만화리’라 하고 예천군 지보면에 편입되었다. 만화리는 ‘방화’, ‘만촌’, ‘구태’, ‘신촌’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만의정이 위치한 곳은 ‘만촌’마을이다.

만촌(晩村)은 ‘마내동’ 또는 ‘만의동(晩義洞)’이라고도 불린다. 50여 가구의 축산전씨(竺山全氏) 집성촌으로, 근방에서 가장 늦게 생긴 마을이다. 임진왜란을 피하기 위해 ‘구태’마을에서 전씨들이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았다고 한다. 당초 이마을의 북서쪽에 있는 가짠네집골이란 골짜기에 가짠네라는 산지기 천돌이의 집이 잇었고, 그 산지기가 개척한 곳이며 마을 앞 들이 ‘마느실’이므로 거기서 유래된 이름라고도 한다. 또 오래도록 의리를 잘 지키는 곳이라고 하여 ‘만의동(晩義洞)’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방화(芳華)는 ‘한골’ 또는 ‘대동(大洞)’이라고도 불린다. 50여 가구의 공주이씨 세거지로, 조선 세조 때 이말손(李末孫)이 개척했다고 하는데, 근방에서 가장 일찍 개척된 마을이다. 마을 뒤의 위봉산(委峯山)은 천하 대명당으로 일컫는 옥토망월형(玉兎望月形)의 정묘(鄭墓)가 있고, 골골마다 전설을 지니고 있다. 그 중 이 마을이 가장 큰 골에 생긴 마을이라 하여 ‘한골’ 또는 ‘대동(大洞)’으로 불렀으며, 또마을 터가 큰 꽃처럼 생겼다고 하여 ‘방화(芳華)’라고도 불렀다.

구태(九台)는 ‘구티미’ 또는 ‘구태미’라고도 불린다. ‘만촌’의 북서쪽 내성천가에 있는 마을이며,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한 전대●(全大●)이라는 분이 난리가 끝난 뒤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이분의 묘터가 구룡쟁주혈(九龍爭珠穴)이고, 마을 앞에 구태봉(九胎峯)은 곧 왕실에서 아홉 번째로 태실을 모실 산으로 정했다는 봉우리가 있어서 ‘구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촌(新村)은 ‘새동네’라고도 불린다. ‘방화’마을에 살던 공주이씨가 살림을 나서 서낭댕이 동쪽에 새로 터잡은 마을이므로, ‘새동네’라고 하였다.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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