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7. 12:08ㆍ 인물열전
승정원일기
영조 1년 을사(1725, 옹정3)
4월 10일(정축) 맑음
좌목 01-04-10[25] 상
중일 시사(賞中日試射) 때 가자된 금위영 파총 전순좌(全舜佐)가 자궁(資窮)이 되었지만 준직(準職)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대책을 묻는 병비의 계
병비가 아뢰기를,
“금위영 파총 전순좌(全舜佐)는 상중일 시사(賞中日試射)(주1) 때 편전(片箭)(주2)을 몰기(沒技)(주3)하여 가자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자궁(資窮)이 되었지만 준직(準職)을 거치지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특별히 가자하라고 전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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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년 을사(1725, 옹정3)
6월 9일(을해) 맑음
좌목 01-06-09[16]
이비와 병비의 관원 현황과 관직 제수 내용
정사가 있었다.
이비에, 판서 이의현(李宜顯)은 나왔고, 참판 이재(李縡)는 지방에 있고, 참의 유척기(兪拓基)는 병이고, 우부승지 신방(申昉)은 나왔다.
병비에, 행 판서 홍치중(洪致中)은 나왔고, 참판 윤석래(尹錫來)는 나왔고, 참의 김고(金橰)는 병이고, 참지 남세진(南世珍)은 복제(服制) 중이고, 좌부승지 박치원(朴致遠)은 나왔다.
이비가 이직(李溭)을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김담(金墰)을 영광 군수(靈光郡守)로, 이굉(李浤)을 순창 군수(淳昌郡守)로, 김취로(金取魯)를 종부시 제조로, 박필정(朴弼正)을 봉상시 정으로, 윤재중(尹在重)을 의금부 도사로, 홍우석(洪禹錫)을 사옹원 첨정으로, 박수기(朴守坖)를 선공감 가감역으로, 권정성(權定性)을 내시교관(內侍敎官)으로 삼았다. 선공감 가감역 이정진(李靜鎭)과 동몽교관 심여경(沈餘慶)을 서로 바꾸었다. 최희도(崔熙道)를 양현고 직장에 단부(單付)하였다. 이대원(李大源)을 제원 찰방(濟原察訪)으로 삼았다. 호조 판서 신사철(申思喆)에게 이번에 정헌대부(正憲大夫)를 가자하고, 행 도승지 홍석보(洪錫輔)에게 이번에 가의대부(嘉義大夫)를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승전을 받든 것이다. 이병상(李秉常)을 대제학으로 삼았다. 의관 이엽(李燁)에게 이번에 자헌대부(資憲大夫)를 가자하고, 권성징(權聖徵)과 방진기(方震夔)에게 이번에 숭록대부(崇祿大夫)를 가자하고, 오중설(吳重卨)에게 이번에 숭정대부(崇政大夫)를 가자하고, 김덕삼(金德三)과 최태령(崔泰齡)에게 이번에 가의대부를 가자하고, 현제강(玄悌綱)에게 이번에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하고, 영평 현령(永平縣令) 정사공(鄭思恭)과 의관 정지현(鄭趾顯)에게 이번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가자하고, 내관 신석조(辛錫祚)에게 이번에 숭록대부를 가자하고, 정중명(鄭重明)에게 이번에 정헌대부를 가자하고, 이세태(李世泰)와 박희채(朴熙采)에게 이번에 통정대부를 가자하였는데, 이상은 가자하라는 승전을 받든 것이다. 이세춘(李世瑃)을 교서관 박사에 단부하였다. 호조 정랑 안상원(安相元)을 잉임시키라는 승전을 받들었다. 이병상(李秉常)을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로, 조영세(趙榮世)를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삼았다.
병비가 허윤(許玧)을 지사(知事)로, 신사철(申思喆)을 도총관으로, 동창군(東昌君) 이정(李炡)을 부총관으로, 정도징(鄭道徵)을 내금위장으로, 이중익(李重翊)을 선전관으로, 홍수렴(洪受濂)을 조사위장(曹司衛將)으로, 허량(許樑)ㆍ전순좌(全舜佐)를 오위장으로, 김우화(金遇華)를 첨지로, 김협(金浹)을 훈련원 정으로, 박정환(朴廷煥)을 경덕궁 가위장(慶德宮假衛將)으로, 송수량(宋秀良)을 위솔(衛率)로, 이언상(李彦祥)을 황해 병사로, 최제백(崔齊白)을 함경북도 병마우후(咸鏡北道兵馬虞候)로, 권업(權)을 동지로, 길혜적(吉惠迪)과 이문우(李文佑)를 동지로, 구억(具億)을 무겸(武兼)으로 삼았다. 정항녕(鄭恒寧)을 함경 중군(咸鏡中軍)에 단부하고, 상유주(尙維周)를 동지에 단부하고, 정복주(鄭復周)ㆍ민석(閔襫)ㆍ이덕우(李德雨)를 첨지에 단부하였다. 안종국(安宗國)ㆍ홍만우(洪萬遇)ㆍ이명승(李明升)을 부사과로 삼았다. 임철(任轍)을 부사정(副司正)에 단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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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년 을사(1725, 옹정3)
9월 26일(경신) 맑음
좌목 01-09-26[12]
이비와 병비의 관원 현황과 계 및 관직 제수 내용
정사가 있었다.
이비(吏批)에, 행 판서 이의현(李宜顯)은 시소(試所)에 나아갔고, 참판 김유경(金有慶)은 나왔고, 참의는 아직 차임되지 않았고, 동부승지 홍현보(洪鉉輔)는 나왔다.
병비(兵批)에, 판서 조도빈(趙道彬)은 나왔고, 참판 이유민(李裕民)은 문소(文所)의 시관으로 나아갔고, 참의 홍호인(洪好人)은 지방에 있어 아직 숙배하지 않았고, 참지는 아직 차임되지 않았고, 좌부승지 박성로(朴聖輅)는 나왔다.
병비가 아뢰기를,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를 지금 차출해야 하는데 의망(擬望)할 사람이 매우 부족합니다. 다른 도의 수령도 아울러 의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이비가 아뢰기를,
“판서 이의현은 감시(監試) 복시(覆試)의 시관으로 현재 시원(試院)에 있고, 참의는 아직 차임되지 않았습니다. 소신이 혼자 정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그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이비가 이휘진(李彙晉)을 병조 참지로, 이정주(李挺周)를 형조 참의로, 임주국(林柱國)을 정언으로, 윤심형(尹心衡)을 부교리로, 박사성(朴師聖)을 교리로, 한덕후(韓德厚)를 병조 정랑으로, 홍우해(洪禹諧)를 고산 현감(高山縣監)으로, 김주(金胄)를 용안 현감(龍安縣監)으로, 이징도(李徵道)를 도원 찰방(桃源察訪)으로, 윤창래(尹昌來)를 공조 정랑으로, 박필진(朴弼震)을 사도시 첨정(司䆃寺僉正)으로 삼았다. 겸지평 한덕후(韓德厚), 겸감찰 성진령(成震齡)ㆍ민치룡(閔致龍), 겸장령 정광제(鄭匡濟) 이상을 감하(減下)하였다. 유척기(兪拓基)를 실록겸춘추관 수찬관(實錄兼春秋館修撰官)에 단부(單付)하고, 민치룡(閔致龍)ㆍ박종윤(朴宗潤) 두 사람도 단부하였다.
병비가 아뢰기를,
“도목 정사(都目政事)에서 경복궁 가위장(景福宮假衛將)에 나상규(羅祥奎)를 제수하였는데 전라도에 감군(監軍)으로 내려갔다고 들었으므로 즉시 올려 보내도록 관문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세 달이 지나도록 올라온다는 기별이 없습니다. 그동안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직(輪直)하는 자리를 오래도록 비워 두게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선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병비가 아뢰기를,
“전(前) 우후(虞候) 이형귀(李亨龜), 감관(監官) 민치문(閔致聞), 사과(司果) 박만재(朴萬載), 한량 김정선(金鼎善), 전 사과 윤지은(尹之殷), 한량 곽신장(郭信章), 겸사복 박태규(朴泰奎), 한량 박민구(朴敏求)ㆍ이시휘(李時輝), 부사과 김만희(金萬熙), 한량 최치흥(崔致興)ㆍ이시걸(李時傑)ㆍ안복대(安福大)ㆍ최환(崔煥), 전 현감 조진(趙畛), 한량 양진원(梁進元)ㆍ정만희(鄭萬熙), 전 사과 김효겸(金孝兼), 한량 이기남(李箕南)ㆍ정일장(丁一章), 양인(良人) 신익명(申益明), 한량 이교년(李喬年), 수군(水軍) 정륜(鄭崙), 한량 홍원보(洪元輔)ㆍ이산(李藖)ㆍ김봉장(金鳳章)ㆍ강치해(姜致海)ㆍ권두경(權斗瓊)ㆍ엄석재(嚴碩載)ㆍ이필욱(李弼郁)ㆍ이만휘(李萬輝)ㆍ조삼립(趙三立)ㆍ정유혁(鄭維赫)ㆍ정재규(鄭載奎), 급제(及第) 조의석(趙義碩), 감관 정지원(鄭趾遠), 전 현감 이희령(李熙齡), 한량 함홍적(咸弘績)ㆍ조필수(趙必壽)ㆍ신집(辛楫)ㆍ최천경(崔天擎)ㆍ이기(李基)ㆍ윤익주(尹益柱)ㆍ조성(趙晟), 사과 정성도(丁成道), 통덕랑(通德郞) 김주욱(金周郁) 등에게 도적을 체포하거나 호랑이를 잡은 것으로 별비(別備)하거나 감조(監造)한 공로로 가자(加資)하도록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이형귀, 조진, 이희령은 이미 계궁(階窮)되었지만 아직 준직(準職)을 거치지 않았고, 박만재, 윤지은, 박태규, 김만희, 김효겸, 조의석, 김주욱, 정성도는 아직 자궁되지도 않았고 준직을 거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민치문, 김정선, 곽신장, 박민구, 이시휘, 최치흥, 이시걸, 안복대, 최환, 양진원, 정만희, 이기남, 정일장, 신익명, 이교년, 정륜, 홍원보, 이산, 김봉장, 강치해, 권두경, 엄석재, 이필욱, 이만휘, 조삼립, 정유혁, 정재규, 정지원, 함홍적, 조필수, 신집, 최천경, 이기, 윤익주, 조성은 한량입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모두 특별히 가자하라.”
하였다.
병비가 이순곤(李順坤)을 부총관으로, 박세극(朴世極)을 첨지로, 전순좌(全舜佐)를 겸내금위장(兼內禁衛將)(주4)으로, 허린(許繗)을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이광조(李光朝)를 오위장(五衛將)으로, 이경화(李景華)를 오위장으로, 박봉채(朴鳳彩)를 선전관으로, 신광악(申光岳)을 선전관으로, 백상정(白尙靖)을 선전관으로, 이보신(李寶臣)을 익찬(翊贊)으로, 유성추(柳星樞)를 전라 병사(全羅兵使)로, 이숙(李潚)을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로, 신여검(愼汝儉)을 대구 영장(大丘營將)으로, 윤필주(尹弼周)를 가덕 첨사(加德僉使)로, 이명룡(李命龍)을 법성포 첨사(法聖浦僉使)로, 유정태(柳挺泰)를 태성 첨사(兌城僉使)로, 이구(李絿)를 익찬으로, 백세걸(白世傑)을 청성 첨사(淸城僉使)로, 김만령(金萬齡)을 목포 만호(木浦萬戶)로, 현태창(玄泰昌)을 호타 만호(豪打萬戶)로, 민흥귀(閔興龜)를 산양회 만호(山羊會萬戶)로, 이유경(李有慶)을 격포 별장(格浦別將)으로, 이귀만(李貴萬)을 신문 별장(新門別將)으로, 유겸명(柳謙明)을 문겸(文兼)으로, 이수익(李壽益)을 충장위장(忠壯衛將)으로 삼았다. 안중정(安重鼎)을 상주포 권관(尙州浦權管)에, 이성진(李成震)을 운두리 권관(雲頭里權管)에, 우덕보(禹德普)를 광평 권관(廣坪權管)에, 정후주(鄭後周)를 부호군에, 이정주(李挺周)를 부사과에 단부하였다.
[주D-001]참판 …… 나아갔고 : 원문은 ‘參判李裕民文所試官’인데, 《승정원일기》 영조 1년 9월 24일 기사에 근거하여 ‘官’ 뒤에 ‘進’ 1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02]박만재(朴萬載) : 원문은 ‘柳萬載’인데, 동일 기사와 인물종합정보시스템 《조선시대 잡과 합격자 총람》에 근거하여 ‘柳’를 ‘朴’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3]이경화(李景華)를 오위장으로 : 원문은 ‘李景華爲五衛’인데, 《승정원일기》의 다수 용례에 의거하여 ‘衛’ 뒤에 ‘將’ 1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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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2년 병오(1726, 옹정4)
2월 15일(무인) 맑음
좌목 02-02-15[21]
병조가 전순좌(全舜佐)를 부산 첨사(주5)로 삼았다
병조가 구전 정사를 하여 전순좌(全舜佐)를 부산 첨사(釜山僉使)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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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2년 병오(1726, 옹정4)
3월 3일(을미) 맑음
좌목 02-03-03[07]
부산 첨사(釜山僉使) 전순좌(全舜佐)에게 궁시(弓矢)를 주어 보내라는 비망기
이집에게 비망기로 하교하기를,
“지금 내린 궁시(弓矢)를 부산 첨사 전순좌(全舜佐)에게 주어 보내라.”
하였다.
(주1)시사[ 試射 ]
조선 시대에 대신•고관•군사 등에게 활이나 총 쏘는 것을 시험하던 일.
용례
㉠모두가 의논하여 아뢰기를, “대신과 직질이 높은 고관이 일로 인하여 내려갈 때에 시사하도록 하여, 그 중에 탁이한 자는 계문하게 하여 겸사복을 차하하고 그 다음인 자는 복호하며, 그 다음인 자는 면포 5필을 주되, 성명과 재품을 모두 기록하여 아뢰게 하소서. 만호와 첨사가 관할하는 수군 중에서 잘 쏘는 사람이 10인 이상이 있는 자는 체임할 때에, 그 인기를 따라서 동반은 5, 6품으로 하고 서반은 준직하되, 5인 이상인 자는 우등으로 서용하고, 5인 미만인 자는 품등을 낮추어 제수하며, 전혀 없는 자는 파출하게 하소서. 그리고 그 시재하는 포후(화살을 쏘기 위하여 포목을 세우고 그 안에 짐승의 머리를 그려서 만든 표적)는 1백 50보로 정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 僉議啓曰 大臣及秩高朝官因事下去時 令試射 其中卓異者啓聞 兼司僕差下 其次者復其戶 又其次者 給綿布五匹 具錄姓名才品以啓 萬戶僉使所管水軍 有善射十人以上者 遞任時 隨其人器 東班則五六品 西班則准職 五人以上者 優等敍用 未滿五人者降授 全無者罷黜 其試才布侯 以一百五十步爲定何如 從之 [성종실록 권제257, 5장 앞쪽~뒤쪽, 성종 22년 9월 7일(경진)]
㉡관무재복시.<임금이 친임하여 시사할 때에는 2품 이상의 문관 1원, 무관 2원의 참시관을 파견하여 4기로서 시취하고 또 지방에서는 의정 1원으로서 명관을 삼고 조총•편추를 시험하되 참시관의 파견은 친임 때와 같다. 또 임금의 어좌 좌우에 각각 2품 시관 2인을 파견하여 검•창 등의 살수기술을 시험한다.…> ; 觀武才覆試<親臨試射 差參試官二品以上 文一員 武二員 以四技試取 又於外處以議政一員爲命官 試鳥銃鞭芻 參試官與親臨同 又於御座左右 各差二品試官二員 以劒槍等技試殺手…> [속대전 병전 시취]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시사 [試射]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주2)편전[ 片箭 ]
<정의>
편전(片箭)은 속칭 애기살 등으로 불리는,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화살
<발달과정/역사>
『지봉유설』에 의하면 편전이란 가는 화살로 짧고 작은 화살이며, 천 보 이상의 거리에서도 능히 갑옷과 투구를 뚫을 만큼 날쌔고 촉이 날카롭다. 이 편전을 우리나라 사람이 잘 쏘기에 중국에서는 고려전(高麗箭)이라고 불렀으며, 왜는 말하기를 중국은 창 쓰는 법, 조선은 편전 쏘는 기술, 일본은 조총을 천하의 으뜸가는 재주라 하였다고 하였다.
『국조오례의 서례(國朝五禮儀 序例)』 병기도설(兵器圖說)에 나타난 편전은 1척2촌이고, 『속대전(續大典)』에는 포백척(布帛尺)으로 촉을 제외한 길이가 8촌이라 고 하였다.
현재 유물로 남아있는 편전은 36~44cm에 이르는 등 다소 차이가 있으며, 창덕궁 유물고에 2종, 광산 김씨 예안파 종손 김순식씨가 1종, 서울 인사동 김연묵씨가 1종 등을 각각 소장하고 있는데, 그 유물에 따르면 깃간은 주칠을 하고, 오늬에는 녹칠을 한 뒤 상사부위를 깎아 상사자리(테이퍼 지게 깎음)를 내어 소심을 감고 주칠을 한 뒤 촉을 끼운 구운 살대의 편전(창덕궁)과 생칠을 전체에 칠하고 상사부에 소심을 감고 화피로 감은 편전(김준식씨 소장), 깃간과 오늬 상사부위(소심감음)을 흑칠하고 살대는 굽지 않은 것 등이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이 유물은 조선시대의 편전을 고증에 의해 재현한 것이다.
<제원>
길이 : 36cm
제공처
[네이버 지식백과] 편전 [片箭] (e뮤지엄, 국립중앙박물관)
(주3)몰기[ 沒技 ]
조선 시대 각종 무예 시험의 전과목에서 모두 우등 합격하는 일. 특히 무과(武科)의 시취(試取)에 있어서 유엽전(柳葉箭)•편전(片箭)•기추(騎篘) 등 정한 화살의 수를 다 맞히는 것을 말함. 이를 달성한 자를 몰기자(沒技者)라 하여 총점의 수석 합격자와 동격으로 대우하였음. 이 말이 전화(轉化)되어 한 기술에 대해서 만점(滿點)을 얻는 것을 의미하기도 함.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몰기 [沒技]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주4)내금위장[ 內禁衛將 ]
조선시대 내금위(內禁衛)에 둔 으뜸 벼슬로 서반 무관직이며, 금군장(禁軍將: 內禁衛將·兼司僕將·羽林衛將)의 하나이다. 처음에 종이품(從二品)이었다가 1652년(효종 3)에 내금위가 금군청(禁軍廳)에 합쳐지면서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으로 내려졌다. 모두 타관이 겸했다.
1457년(세조 3) 내금위절제사(內禁衛節制使) 6원을 두어 내금위장(內禁衛將)이라 하고 매번 2명씩 궁궐에서 직숙(直宿)하게 하였다. 대우는 오위장(五衛將)과 같았다. 1459년(세조 5)에 3원으로 축소하고, 매번 1명씩 직숙하게 하였다.
1775년(영조 31) 금군청이 용호영(龍虎營)으로 개칭되고, 정원도 처음에 3원이었다가, 1790년(정조 14)에 2원으로 줄었다. 내금위에는 내금위장 밑에 금군(禁軍) 200명이 있었다.
참고문헌
대전회통(大典會通)
동의어 내금장(內禁將)
[네이버 지식백과] 내금위장 [內禁衛將] (관직명사전, 2011. 1. 7., 한국학중앙연구원)
(주5)첨사[ 僉使 ]
조선 시대 각 진영(鎭營)에 속한 종3품의 무관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의 약칭.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첨사 [僉使]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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