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5. 09:41ㆍ 인물열전
승정원일기
영조 2년 병오(1726, 옹정4)
4월 5일(정묘) 맑음
좌목 02-04-05[16]
정택하(鄭宅河)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정택하(鄭宅河)를 집의로, 이의현(李宜顯)을 좌참찬으로, 김취로(金取魯)를 호조 참판으로, 김상원(金相元)을 공조 참판으로, 이집(李潗)을 예조 참의로, 김상석(金相奭)을 부교리로, 황일하(黃一夏)를 공조 판서로, 유복명(柳復明)을 강원 감사로, 김도협(金道浹)을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이만유(李萬維)를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강한주(姜翰周)를 칠곡 부사(漆谷府使)로, 최숙(崔淑)을 성현 찰방(省峴察訪)으로, 이태창(李泰昌)을 경안 찰방(慶安察訪)으로, 윤광천(尹光天)을 평안도 도사로, 김광운(金光運)을 전라도 도사로, 이구(李絿)를 공조 정랑으로, 정재춘(鄭再春)을 직강으로, 조도빈(趙道彬)을 사복시 제조로, 심택현(沈宅賢)을 선공감 제조로, 유명홍(兪命弘)을 봉상시 제조로, 이도원(李度遠)을 설서로, 이현(李絢)을 현릉 직장(顯陵直長)으로, 이성룡(李聖龍)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이의현(李宜顯)과 조관빈(趙觀彬)을 모두 사역원 제조로, 윤봉조(尹鳳朝)를 사포서 제조로, 황귀하(黃龜河)를 전생서 제조로, 김취로(金取魯)를 장원서 제조로, 김흥경(金興慶)을 전설사 제조로, 정형익(鄭亨益)을 내자시 제조로, 조도빈(趙道彬)을 좌빈객으로, 이재(李縡)를 좌부빈객으로, 신사철(申思喆)을 지춘추관사로, 심택현(沈宅賢)과 윤봉조(尹鳳朝)를 모두 동지성균관사로, 송봉원(宋逢源)을 익릉 봉사(翼陵奉事)로, 이현록(李顯祿)을 승지로, 박창후(朴昌厚)를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조명택(趙明澤)을 겸설서로, 이도원(李度遠)과 이규휘(李奎徽)를 모두 병조 좌랑으로, 성유열(成有烈)을 예조 좌랑으로, 권적(權)을 교리로, 이단장(李端章)을 사간으로, 김익룡(金翊龍)을 의빈부 도사로 삼았다. 조명택(趙明澤)을 봉교에, 박필현(朴弼賢)을 대교에, 한현모(韓顯謩)를 검열에, 김서귀(金瑞龜)를 성균관 박사에 단부하였다. 이의현(李宜顯)을 홍문관 제학으로, 김우추(金遇秋)를 좌통례로, 어사주(魚史周)를 전부(典簿)로, 장붕익(張鵬翼)을 좌윤으로, 이기익(李箕翊)을 우윤으로, 조영보(趙榮保)와 홍우기(洪遇箕)를 모두 영릉 참봉(寧陵參奉)으로, 홍계유(洪啓裕)를 태릉 참봉(泰陵參奉)으로, 유묵기(兪默基)를 공릉 참봉(恭陵參奉)으로, 강완(姜梡)을 가인의(假引儀)로, 한혁(韓奕)을 전적으로 삼았다. 김서귀(金瑞龜)를 겸 양현고 직장(兼養賢庫直長)에 단부하였다. 민응수(閔應洙)를 헌납으로, 박필현(朴弼賢)을 설서로, 윤득귀(尹得龜)를 감찰로, 전근사(全近思)를 예조 좌랑으로, 김도흡(金道洽)을 평양 서윤(平壤庶尹)으로, 이안국(李安國)을 전적으로, 이기종(李基宗)을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으로 삼았다. 성유열(成有烈)을 겸춘추에, 박지영(朴枝榮)을 군기시 부봉사에, 엄한구(嚴漢耈)를 군기시 참봉에 단부하였다. 유척기(兪拓基)를 경상 감사로, 정택하(鄭宅河)를 승지로, 박필주(朴弼周)를 집의로 삼았다. 경기전 참봉 조정해(趙正楷)와 장녕전 참봉(長寧殿參奉) 송봉원(宋逢源)을 서로 바꾸었다. 심한제(沈漢濟)를 강화 분교관(江華分敎官)에 단부하였다. 신사철(申思喆)에게 숭록대부(崇祿大夫)를, 심택현(沈宅賢)과 권업(權)에게 모두 정헌대부(正憲大夫)를 가자하였다. 태묘를 개수할 때의 도감 제조 이현록(李顯祿)과 서종섭(徐宗燮)에게 모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가자하였다. 태묘를 개수할 때의 도감 도청인 사도 첨사(蛇渡僉使) 이필홍(李必弘)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하였는데, 그는 재목(材木)을 가지고 온 차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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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2년 병오(1726, 옹정4)
8월 5일(갑자) 맑음
좌목 02-08-05[08]
이비와 병비의 관원 현황과 계 및 관직 제수 내용
정사가 있었다.
이비에, 판서 이병상(李秉常)은 말미를 받고 지방에 있고, 참판 홍석보(洪錫輔), 참의 신방(申昉), 우부승지 정택하(鄭宅河)는 나왔다.
정택하에게 전교하기를,
“옥당의 동벽(東壁)을 신통(新通)할 때 일찍이 참판과 참의가 차출한 예(例)가 있는지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정택하가 아뢰기를,
“옥당의 동벽을 신통할 때 일찍이 참판과 참의가 차출한 예가 있는지 물어서 아뢰도록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조에 물어보니 ‘무릇 청망(淸望)에 대한 신통 및 품계를 올리는 일은 좌이(佐貳)의 관료가 독단적으로 의망할 수 없습니다. 이는 본시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정사(政事)의 격례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이응(李膺)을 예조 좌랑으로, 임주국(林柱國)을 필선(弼善)으로, 김응복(金應福)을 사성(司成)으로, 고만첨(高萬瞻)을 사예(司藝)로, 김시보(金時保)를 전부(典簿)로, 유학기(兪學基)를 종부시 주부로, 조정준(趙廷俊)을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로, 전성신(全聖臣)을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로, 강석태(姜碩泰)를 내섬시 봉사(內贍寺奉事)로, 이덕부(李德孚)를 직산 현감(稷山縣監)으로 삼았다. 성진령(成震齡)을 겸장령(兼掌令)에, 조정리(趙廷履)를 성균관 박사에, 백태운(白泰運)을 학정(學正)에 단부하였다. 가산 군수(嘉山郡守) 이현(李炫)에게 지금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가자하였는데, 군기(軍器)를 별도로 준비하였기에 가자하라는 승전을 받든 것이다. 성진령(成震齡)을 군자감 정(軍資監正)으로, 이기진(李箕鎭)을 부제학으로, 전근사(全近思)를 예조 정랑으로, 노삼방(盧三邦)을 전적으로, 신로(申魯)를 병조 정랑으로 삼았다.
승지의 망단자(望單子)와 관련하여 전교하기를,
“부호군 조명신(趙命臣)을 제수하라.”
하였다.
이비가 아뢰기를,
“부제학과 응교를 다음 정사에서 차출하도록 명을 내리셨습니다. 응교는 예전에 의망된 사람이 단지 한 사람만 있고 그 나머지는 신통(新通)이니, 좌이의 관료가 독단적으로 의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판서가 조정으로 돌아와야 비로소 의망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제학의 망(望)과 관련해서는 응당 의망되어야 할 사람의 해유(解由)가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변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구애받지 말라.”
하였다.
병비에, 행 판서 김흥경(金興慶)은 병이고, 참판 이유민(李裕民)은 나왔고, 참의 조명봉(趙鳴鳳)과 참지 서종섭(徐宗燮)은 병이고, 우부승지 정택하는 나왔다.
병비가 아뢰기를,
“방금 오위장청(五衛將廳)의 보고를 보니 ‘오위장 최동명(崔東溟)이 말미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지금 기한이 지나도록 올라올 기약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숙위하는 데 윤직(輪直)하는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 두어서는 안 되니, 지금 우선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성진령(成震齡)을 부사과에, 이수해(李壽海)를 부사정에 단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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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2년 병오(1726, 옹정4)
10월 16일(갑술) 맑음
좌목 02-10-16[17]
영휘전을 태묘에 부묘(祔廟)할 때의 대축(大祝)인 수찬 김용경(金龍慶) 등에게 아마(兒馬) 등을 사급하라는 등의 비망기
비망기에,
“영휘전을 태묘에 부묘(祔廟)할 때의 대축(大祝)인 수찬 김용경(金龍慶), 사인 윤심형(尹心衡)과 신련 시위(神輦侍衛)인 우부승지 조명신(趙命臣), 동부승지 김조택(金祖澤), 전사령(殿司令) 김가행(金可行), 참봉 홍전보(洪銓輔)와 죽책 차비(竹冊差備)인 직장 조흥빈(趙興彬), 정랑 전근사(全近思)와 교명 차비(敎命差備)인 봉사 김복택(金福澤)과 옥인 차비(玉印差備)인 좌랑 유학기(兪學基), 주부 권감(權瑊)과 시책 차비(諡冊差備)인 직장 조영시(趙榮時), 봉사 임경(任敬)과 시인 차비(諡印差備)인 별제 남윤관(南胤寬)ㆍ김천택(金天澤)과 옥책 차비(玉冊差備)인 봉사 유유(柳愈)ㆍ김시정(金始炡)과 교명 차비인 좌랑 김형(金炯)과 금보 차비(金寶差備)인 봉사 이하(李河)ㆍ박필기(朴弼琦)와 휘호옥책 차비(徽號玉冊差備)인 주부 조장(趙障), 정랑 박성집(朴聖輯)과 옥보 차비(玉寶差備)인 참군 이수겸(李守謙), 직장 김도성(金道成)과 섭통례(攝通禮)인 판관 이보명(李保命)ㆍ윤세현(尹世顯)과 섭사복정(攝司僕正)인 부사과 이명승(李明升), 판관 신치복(辛致復)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라. 향로 차비(香爐差備)인 참봉 김대성(金大成)과 향합 차비(香盒差備)인 봉사 박지혁(朴趾赫)과 상서원 가관(尙瑞院假官)인 무겸 김추(金礈) 등 4원과 신련 시위인 기사관 심태현(沈泰賢), 가주서 임진하(任震夏)와 거안자(擧案者)인 주부 정항빈(鄭恒賓) 등과 이하 여러 집사 및 사약 이시일(李時逸)에게는 각각 한 자급을 더해 주되 자궁인 자는 대가하라. 주시관(奏時官) 박상훈(朴尙熏) 등 2인에게는 각기 부장궁 1장을 사급하고, 수복 이하 하인들에게는 해당 조로 하여금 쌀과 베를 등급을 나누어 마련하여 제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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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2년 병오(1726, 옹정4)
11월 5일(계사) 맑음
좌목 02-11-05[19]
이비와 병비의 관원 현황과 계 및 관직 제수 내용
정사가 있었다.
이비에, 판서 이병상(李秉常)은 나왔고, 참판 이재(李縡)는 지방에 있고, 참의 신방(申昉)은 나왔고, 우부승지 김조택(金祖澤)은 나왔다.
병비에, 행 판서 김흥경(金興慶)은 병이고, 참판 이유민(李裕民)은 문일소(文一所)에 시관으로 나아갔고, 참의 서종섭(徐宗燮)은 나왔고, 참지 권적(權)은 아직 숙배하지 않았고, 승지 조영복(趙榮福)은 나왔다.
이비가 아뢰기를,
“춘방(春坊)의 궐원을 지금 차출해야 하는데 서울에 있는 무고한 사람이 부족합니다. 아직 부임하지 않은 수령까지 아울러 의망(擬望)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이비가 한덕전(韓德全)을 필선으로, 황귀하(黃龜河)를 동지의금부사로, 전근사(全近思)를 병조 좌랑으로, 강일규(姜一珪)를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으로 삼았다. 좌승지 조영복(趙榮福)에게 이번에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加資)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승전(承傳)을 받든 것이다.
병비가 부호군에 신광하(申光夏)ㆍ조명봉(趙鳴鳳)ㆍ정광제(鄭匡濟) 등을 단부(單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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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2년 병오(1726, 옹정4)
12월 16일(계유) 맑음
좌목 02-12-16[24]
희정당에서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한 자리에 좌승지 이현록 등이 입시하여 포폄 등제에 주(註)를 다는 문제, 원로대신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고치는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미시(未時)에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여러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였다. 좌승지 이현록(李顯祿), 동부승지 이정소(李廷熽), 가주서 정익하(鄭益河), 겸춘추 도영하(都永夏)ㆍ전근사(全近思)가 함께 입시하였다. 이현록이 아뢰기를,
“본원에 마침 공사가 없기에 각 관사에 분부하여 몇 가지를 모아서 들어왔습니다.”
하고, 이현록이 이어서 삭녕군(朔寧郡) 보미(保米)의 일에 관한 금위영의 회계를 읽으니, 상이 이르기를,
“윤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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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사(全近思)
[문과] 숙종(肅宗) 41년(1715) 을미(乙未)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2[亞元]위(2/35)[인물요약]
자 이원(而遠)
생년 을묘(乙卯) 1675년(숙종 1)
합격연령 41세
본관 용궁(龍宮)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사전
[이력사항]
선발인원 35명
전력 유학(幼學)
관직 예조좌랑(禮曹佐郞)
[가족사항]
[부]
성명 : 전오륜(全五倫)
[증조부]
성명 : 전이성(全以性)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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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삼(全近三)
[생원시] 숙종(肅宗) 13년(168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32위(62/100)
[인물요약]
자 태수(台叟)
생년 신묘(辛卯) 1651년(효종 2)
합격연령 37세
본관 용궁(龍宮)
거주지 용궁(龍宮)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전력 유학(幼學)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가족사항]
[부]
성명 : 전오륜(全五倫)
과거 : 진사(進士)
[안항:제]
성명 : 전근취(全近取)
성명 : 전근광(全近光)
성명 : 전근열(全近說)
성명 : 전근사(全近思)
[출전]
『정묘식년사마방목(丁卯式年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6024-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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