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8. 22:51ㆍ 인물열전
승정원일기
인조 26년 무자(1648, 순치5)
1월 3일(기해) 맑음
26-01-03[03] 정사가 있었다
정사(政事)가 있었다. 이비(吏批)에, 판서 조경(趙絅)은 나왔고, 참판은 정사(呈辭)하였고, 참의 이행우(李行遇), 도승지 김광욱(金光煜)은 나왔다. 병비(兵批)에, 판서 구인후(具仁垕)는 병이고, 참판 최혜길(崔惠吉)은 병이고, 참의 홍득일(洪得一)은 병이고, 참지 황호(黃㦿)는 나왔고, 우부승지 남노성(南老星)은 나왔다.
염우혁(廉友赫)을 장령으로, 김식(金鉽)을 정언으로, 홍헌(洪憲)을 강원 감사로, 김□□(金□□)를 형조 참의로, 권오(權悟)를 강원 도사(江原都事)로, 오희윤(吳熙胤)을 평안 도사(平安都事)로 삼았다. 은계군(殷溪君) 이형륜(李炯倫), 봉산수(蓬山守) 이형신(李炯信), 봉주수(蓬洲守) 이형길(李炯佶), 달성령(達城令) 이형중(李炯仲), 달풍령(達豐令) 이형임(李炯任), 봉흥령(蓬興令) 이형좌(李炯佐), 달천령(達川令) 이형우(李炯佑), 봉계령(蓬溪令) 이형급(李炯伋), 봉강령(蓬江令) 이형건(李炯健) 이상의 사람은 탈상(脫喪)하였다. 전흡(全洽)과 주목(朱楘)을 교서관 부정자(校書館副正字)로 삼았다. 안산 군수(安山郡守) 박태원(朴泰元)과 고양 군수(高陽郡守) 송희업(宋熙業)을 서로 바꿨다. 한흥일(韓興一)을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로, 정광후(鄭光後)를 남부 주부로, 심지치(沈之治)를 금부 도사로, 이희년(李喜年)을 금부 도사로, 서필원(徐必遠)을 사옹원 봉사로, 이경식(李慶植)을 병조 좌랑으로, 이규로(李奎老)를 예조 정랑으로, 임성익(林聖翊)을 직강(直講)으로, 목겸선(睦兼善)을 전적으로, 장중인(張仲仁)을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여경(呂儆)과 최천주(崔天柱)를 학유(學諭)로, 강백년(姜栢年)을 부호군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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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26년 무자(1648, 순치5)
4월 22일(병진) 맑음
26-04-22[05] 정사가 있었다
정사가 있었다. 이비에, 판서는 아직 차임되지 않았고, 참판 한흥일(韓興一), 참의 남노성(南老星), 도승지 남선(南銑)은 나왔다.
이시백(李時白)을 병조 판서로, 양만용(梁曼容)을 사간으로, 박서(朴遾)를 우윤(右尹)으로, 조흡(趙潝)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유온(柳蘊)을 지평 현감(砥平縣監)으로, 이상진(李尙眞)을 대교로, 강여재(姜與載)를 사성으로, 이구원(李久源)을 우통례(右通禮)로, 이동언(李東彥)을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로, 김진원(金震遠)을 예조 정랑으로, 심선(沈譔)을 전적으로, 이돈림(李惇臨)을 왕자사부(王子師傅)로, 이해창(李海昌)을 교서관 교리로, 정태화(鄭太和)를 대사헌으로, 이이존(李以存)을 사도시 정(司䆃寺正)으로, 전흡(全洽)을 교서관 저작(주1)으로, 곽희진(郭希震)을 중부 주부(中部主簿)로, 이진철(李晉哲)을 상례(相禮)로, 오준(吳竣)을 형조 판서로, 윤이지(尹履之)를 판윤(判尹)으로, 김중일(金重鎰)을 부교리로, 밀산군(密山君) 이찬(李澯)을 사옹원 제조로, 이시백(李時白)을 군기시 제조로 삼았다.
병비에, 판서 이시백(李時白)은 아직 숙배하지 않았고, 참판 김광욱(金光煜)은 병이고, 참의 홍득일(洪得一)은 나왔고, 참판 이시만(李時萬)은 병이고, 승지는 이비에 나왔던 도승지가 겸하여 나왔다.
김경여(金慶餘), 나위소(羅緯素), 강주(姜籒)를 부호군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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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7년 6월 3일 (경진) 원본140책/탈초본7책 (9/11) 1656년 順治(淸/世祖) 13년
全洽을 遞差하고 該曹로 하여금 후임자를 差出하도록 할 것을 청하는 刑曹의 계
○ 李晳, 以刑曹言啓曰, 本曹佐郞(주2)全洽呈狀內, 落馬重傷, 委頓旅舍, 左脅傷處, 晝夜刺痛, 受由調治, 一向危重, 旬月之內, 萬無供職之望, 斯速入啓處置云。全洽, 果爲落馬重傷, 不能察任已久。本曹, 以詞訟重地, 職事煩劇, 郞官六員, 常患不足, 而全洽之病, 差復未易, 全洽遞差, 其代, 令該曹以在京無故人, 後政差出,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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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교서관[ 校書館 ]
조선 시대의 관청. 경적(經籍)의 인쇄(印刷)•반포(頒布) 및 향축(香祝)•인전(印篆)의 일을 관장하였음. 태조 원년(1392) 7월에 설치한 교서감(校書監)을 태종 원년(1401) 7월에 교서관(校書館)으로 개칭하였으나, 세조 12년(1466) 1월에 관제 경정(官制更定) 때 교서관이 전교서(典校署)로 개칭되면서 직제도 고쳐졌음. 그러나 성종 15년(1484) 1월에 다시 교서관(校書館)으로 복구(復舊)되면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나타난 직제와 비슷하게 개편되었는데, 그 직제를 보면, 제조(提調) 2인을 비롯하여, 판교(判校, 정3품)•교리(校理, 종5품) 각 1인, 별좌(別坐, 종5품)•별제(別提, 정•종6품) 합해서 4인, 박사(博士, 정7품)•저작(著作, 정8품)•정자(正字, 정9품)•부정자(副正字) 각 2인을 두고 있었음. 정조 6년(1782)에 규장각(奎章閣)에 편입시킴. 운각(芸閣). 운관(芸館).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교서관 [校書館]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주2)형조좌랑[ 刑曹佐郞 ]
조선시대 형조(刑曹)에 둔 정육품(正六品) 관직으로 정원은 3원이다. 그 중 1인은 문관(文官)으로 임명(任命)하였다. 위로 형조판서(刑曹判書: 正二品), 형조참판(刑曹參判: 從二品), 형조참의(刑曹參議: 正三品 堂上) 각 1원과 형조정랑(刑曹正郞: 正五品) 3원이 있다.
정랑으로 지낸 사람은 좌랑을 제수(除授) 받을 수 없었다. 정랑과 좌랑의 관장(管掌) 하에 상복사(詳覆司)·고율사(考律司)·장금사(掌禁司)·장예사(掌隷司) 등 사사(四司)와 일방(一房)·이방(二房)·형방(刑房) 등의 분장(分掌)이 있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형조좌랑 [刑曹佐郞] (관직명사전, 2011. 1. 7.,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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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흡(全洽)
[문과] 인조(仁祖) 24년(1646) 병술(丙戌)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9위(19/34)
[인물요약]
자 사윤(士潤)
생년 경술(庚戌) 1610년(광해군 2)
합격연령 37세
본관 경주(慶州)
거주지 미상(未詳)
[이력사항]
선발인원 34명
전력 유학(幼學)
관직 찰방(察訪)
[가족사항]
[부]
성명 : 전일성(全一誠)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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