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역사 기록에 의한 전씨(全氏)의 연원(淵源) 연구

2015. 11. 10. 21:57 인물열전

 

 

역사 기록에 의한 전씨(全氏)의 연원(淵源) 연구

 

평상시 연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누구나 수긍하는 객관적인 역사기록(正史)에 의지한 연원은 어떻게 되는지 매우 궁금하였습니다.

이런 고증적 방법에 의한 연원은 자녀교육에 유익하고 전통을 이어갈 수 있는 기본이 될 것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전체기록을 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에 관련된 부분을 읽어보려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혹시 제가 미처 알지 못하는 역사기록이 발견되면 언제든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바로 반영하겠습니다.

우선 성씨 [姓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관한 다음 기록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역사상 우리나라 성씨의 수용 및 보급과정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첫째 왕실과 중앙귀족층에게 수용된 시기는 삼국 말기부터 신라 하대까지이며, 둘째 지배층 일반에게 성씨가 보급되어 성과 본관체계가 확립된 시기는 고려 초기이며, 셋째 양민층에게 확대된 시기는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다.

성씨가 보급된 뒤에도 무성층으로 남아 있던 공사노비, 화척(禾尺), ··부곡민, ·진민 등 천민층은 10세기 이래 조선시대까지 개별적인 신분해방과 신분상승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성씨를 획득해 갔지만, 그들에게 성씨가 획기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조선 후기였다.

조선 전기(1516세기)까지만 해도 노비를 비롯한 천민층이 전체 국민 가운데 대략 절반을 차지하였으니 무성층은 그만큼 많았다. 16세기 말부터 시대적·사회적 변동에 따라 신분해방과 함께 새로이 성을 갖게 된 계층이 격증해 갔다.

당시 사회계층을 크게 양반·중인·상민·천민으로 나눌 때, 양반층은 일찍이 군현토성에서 귀족과 관인을 배출한 사족(士族) 가문이며, 중인층은 군현과 임내의 이족(吏族)에서 서리·기술직을 맡은 계층으로 양반의 서얼 출신이 여기에 해당된다. 상민층은 고려 이래 관인을 내지 못한 일반 농민층으로서 성종상 백성성·촌성···부곡성 출신이 많았다.

천민은 대체로 무성층이었다. 최하층인 이들은 조선 후기 300년간에 걸쳐 점차적인 신분해방과 함께 새로이 성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1894년 갑오경장을 계기로 종래의 신분·계급이 타파되며 성의 대중화가 촉진되었고, 1909년 새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부터는 누구나가 다 성과 본을 갖게끔 법제화되었다.

상당수였던 무성인이 이때를 기하여 새 성을 갖게 되자 갖가지 희화극이 벌어졌다고 한다. 어떤 지방에서는 성이 없는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담당 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주기도 하였는가 하면, 노비의 경우는 상전의 성을 따르기도 하였다.

또 주위에 많은 김··박 등 대성을 모방하여 성을 정함으로써 종전의 대성 명문들은 그 수가 더욱 늘어갔다. 가령, 전주에서 출생한 사람은 이씨, 경주지방 출신은 김씨나 최씨 하는 식으로 출신지의 대성이나 문벌을 본떠서 자기 성으로 정한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의 희성·벽관 가운데는 당시 경찰이 호구조사를 하고 호적담당 서기가 호적을 기재하면서 한자의 획()을 잘못 적은 데서 비롯된 것도 적지 않다.

국민 모두가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된 시기는 신분과 계급제도가 타파된 한말에 와서 단행된 것이며, 그것이 일제의 식민통치과정에서 시행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성씨 [姓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 전씨(全氏)의 연원은 백제시대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위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기록 중에서

첫째 왕실과 중앙귀족층에게 수용된 시기는 삼국 말기부터 신라 하대까지이며,라는 사실에 접근 가능하다고 이해했습니다.

이의 근거는 국보106계유명전씨 아미타불비상 (癸酉銘全氏 阿彌陀佛碑像)”에 명문(銘文) (1)입니다. 이 금석문에 의하여 백제시대에 전씨성이 존재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금석문을 해석한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전씨는 백제의 고관(高官)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2)

 

2. 전씨(全氏)의 역사적 기록은 고려초기에서 출발합니다.

위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기록 중에서

조선 전기(1516세기)까지만 해도 노비를 비롯한 천민층이 전체 국민 가운데 대략 절반을 차지하였으니 무성층은 그만큼 많았다.

라는 문장을 상고해 볼 때 전씨(全氏)는 고려초기(3)인 서기 989년에 고려사기록에 뚜렷이 나와 있으므로 연원이 오래된 성씨(姓氏)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사에 최초로 나온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주목(羅州牧)의 경학박사(經學博士) 전보인(全輔仁)이 근실히 가르침은 공자가 학문을 널리 닦은 뜻에 합하고, 가르칠 때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과인이 학문을 권면하는 마음에 맞으니, 마땅히 권장하고 탁용하는 은전을 더하여 특별한 은총을 보여야 하겠다.”

또 위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기록 중에서

역사상 우리나라 성씨의 수용 및 보급과정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첫째 왕실과 중앙귀족층에게 수용된 시기는 삼국 말기부터 신라 하대까지이며, 둘째 지배층 일반에게 성씨가 보급되어 성과 본관체계가 확립된 시기는 고려 초기이며, 셋째 양민층에게 확대된 시기는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다.

라는 문장에 근거하면 전씨(全氏)는 둘째에 해당한다고 이해하였습니다.

 

3. 전씨(全氏)의 오랜 역사가 기록에 의거하여 확인되었습니다.

금석문과 고려사의 기록으로 보면 백제시대부터 고려 초기에 존재한 성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성씨의 보급과정으로 볼 때 첫째둘째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1)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

[판독문]

(向左側面)

▨▨癸酉年四月十五日兮乃未首▨▨發願敬供爲弥次乃▨▨正乃末全氏三▨▨

五十人知識共國王大臣

及七世父母含靈發願敬造寺知識名記

達率身次願

眞武

▨▨」  

(後 面)

上次乃末

三久知乃末

兎願(이상 상단)

夫信

▨」 (이상 제2)

乃末願

久願

惠信師(이상 제3)

夫乃末願

林乃末願

惠明法師

道師(이상 하단)

 (向右側面)

▨▨▨年四月十五

日爲諸敬造此石

諸佛▨▨」

道作公願

使眞公▨」

▨▨

 (正 面)

全氏▨▨」

述況▨▨」

二兮

同心敬造

阿彌陀佛

觀音大

世至▨」

▨▨」

上爲▨▨」

願敬造▨」

▨▨」

此石佛

內外十方

十六▨▨」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1992)]

<해석문>

판독이 매우 어렵지만, 기왕의 판독문을 종합해 보면, 전면(前面) 52, 양측면(兩側面) 102, 후면(後面) 12, 도합 166자 가량이 확인되고 있다.

우선 판독에 앞서 글의 순서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기왕의 판독에서는 대체로 전면(前面)을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보고 전면(前面)에서부터 읽어 나갔다. 그러나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이 명문의 시작부분을 측면(側面)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당대(當代)의 비슷한 유형의 불비상(佛碑像)을 보면, 불상(佛像)과 명문(銘文)이 따로 취급되었다. 기축명아미타불상(己丑銘阿彌陀佛像)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보통 불상이 앞에 있으면 명문은 후면에 새겨졌던 것이다. 또 계유명천불비상(癸酉銘千佛碑像)과 무인명사면석상(戊寅銘四面石像)도 이 석상과 같은 사면석상(四面石像)인데, 명문은 측면에만 새겨져 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보아, 석상의 명문은 불상을 새기는 면과 공간을 달리하여 썼고, 특히 사면석상일 경우에는 측면에다 글을 쓰는 것이 당대의 양식이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계유명아미타삼존사면석상도 측면에서부터 명문이 시작되고, 남은 글은 인접해 있는 전면 혹은 후면으로 돌려진 것으로 보인다. ‘癸酉年이라는 간지가 나오는 곳이 측면(側面) 상단(上端)이라는 점 또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 석상에는 양측 면에 다 간지가 나오고 있어 어느 측면부터 명문이 시작되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두 측면의 명문 내용이 각기 다르므로, 두 가지 사실이 독립적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무방할 듯하다. 관례상 향좌측(向左側)에서부터 시작하여 후면(後面)으로 하나의 내용이 이어졌고, 다시 향우측(向右側)으로부터 정면까지 또 하나의 내용이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토대로 이 석상의 명문을 제시하면 다음 페이지와 같다.

현재까지 이 석상의 명문에 대해서는 5종의 판독문이 제시되어 있는데, 한두자 외에는 거의 차이가 없어 판독대비표는 따로 제시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대체로 황수영이 판독한 글자를 그대로 취하였다.

-해석

석상 명문은 내용상 크게 둘로 나눠진다. 즉 향좌측(向左側)과 후면(後面), 향우측(向右側)과 전면(前面)으로 구분되는데, 이것들은 각각 造寺記造像記로 파악된다. 그런데 향좌측과 후면은 별무리 없이 연결되지만, 향우측과 전면은 명문의 양식이 약간 달라 혹시 다른 내용이 기록된 것이 아닌가 의심되기도 한다. 즉 이 석상의 명문이 내용상 세 개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면의 명문만 따로 독립시킨다 하더라도 첫 자인 앞에는 다른 글자가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향좌측도 發願敬造寺刹造成이라는 두 가지 내용을 함께 담고 있으므로, 향우측과 전면은 이어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向左側面>

▨▨계유년 415일에 혜() 내말(乃末)발원하여 삼가 지어 바치니, 미차내(彌次乃), () 내말(乃末), 전씨(全氏)()▨▨ 50인 지식(知識)과 함께 국왕 대신 및 칠세부모(七世父母)와 모든 영혼을 위하여 발원하여 삼가 절을 지었다. 지식 이름을 기록하면, 달솔(達率)신차(身次)가 원했고, 진무(眞武) 대사(大舍)▨▨ 대사(大舍)가 원했다.

<: 後面>

상차(上次) 내말(乃末)과 삼구지(三久知) 내말(乃末), () 대사(大舍)가 원했고, 대사(大舍)가 원했고, 부신(夫信) 대사(大舍)(원했고), 내말(乃末)이 원했고, () 대사(大舍)가 원했고, 혜신사(惠信師)(원했고), () 내말(乃末)이 원했고, () 내말(乃末)이 원했고, 혜명법사(惠明法師)(원했고), 도사(道師)(원했다).

<: 向右側面>

(계유년)415일에 여러 를 위하여 삼가 이 돌로 된 제불보살(諸佛菩薩)을 만들었다. 도작공(道作公)이 원했고, 사진공(使眞公)(원했고), ▨▨가 원했다.

<: 正面>

전씨(全氏) ▨▨ … 술황(述況) 이혜(二兮)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과 관음대세지상(觀音大世至像)을 삼가 만들었다. 원컨대 삼가 만든 이 석불상(石佛像)이 내외(內外) 시방(十方)과 내외십육(內外十六)[을 비추소서].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1992)]

 

(2)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다방리에 비암사(碑巖寺)라는 절이 있다. 이 절에서 1960910일에 황수영은 4방에 불보살이 새겨진 불비상(佛碑像) 3개를 확인하고 이를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에 보고해 국보로 지정케 한 다음 학계에 소개했다. 그런데 이 중에 2개의 불비상에는 연대가 기록된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그 조성년대와 조성 발원자 및 불보살상의 이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전면에 아미타삼존상이 새겨진 계유명(癸酉銘) 전씨(全氏) 아미타불삼존비상(阿彌陀佛三尊碑像)(도판 179)이다. 현재 국보 106호로 지정돼 있는데 마멸이 심해 명문의 전문 판독은 불가능한 상태다. 그러나 2단으로 이루어진 앞면 아래테부터 새기기 시작해 양쪽 측면의 화면 여백에 가득 써서 새겨놓은 명문 내용을 읽을 수 있는 글자만 가지고 파악해보면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된다.

()씨들이 마음을 합쳐 아미타불상과 관세음, 대세지보살상을 석불로 삼가 조성한다. 계유년 415일에 내말(乃末) 전씨, 달솔(達率) 진차원(眞次願), 진무(眞武) 대사(大舍), ()아무개 대사 등 50여 선지식이 함께 국왕 대신과 7세 부모의 영혼을 위해 절을 짓고 이 석상을 만들었다.

이 명문의 내용을 분석하면 우선 불비상의 주체가 아미타삼존상이라는 것이다.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하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협시로 하는 삼존상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조성 발원의 중심 인물은 내말(내마奈麻라고도 씀) 벼슬에 있는 전씨였고 동심(同心) 발원자는 달솔 진차원, 대사 진무, 대사 목씨 등이라 했다.

전씨는 읽을 수 있는 글자 중에서 3자나 발견돼 이 불비상 조성의 주도자가 전씨였던 것이 확실한데 그 벼슬이 내말이라는 신라 벼슬이다. 대사 역시 신라 벼슬이라 이것만 가지고는 신라의 벼슬아치들이 이 불비상을 조성했다고 단정 지을 수밖에 없겠는데, 그중에 달솔이라는 백제 벼슬 이름이 나와 잠시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나 이런 혼란은 삼국사기40 잡지(雜志) 9의 백제인 직위조의 내용으로 명쾌하게 해결된다. 그 내용을 옮겨보겠다.

문무왕 13(673)에 백제에서 온 사람에게 내외 관직을 주었는데 그 위차(位次: 지위의 차례)는 본국에 있을 때의 벼슬에 견주었다. 서울 벼슬 대내마(大奈麻: 신라 17관등 중 제10)는 본래 달솔(達率: 백제 16관등 중 제2), 내마(奈麻: 신라 17관등 중 제11)는 본래 은솔(恩率: 백제 16관등 중 제3), 대사(大舍: 신라 17관등 중 제12)는 본래 덕솔(德率: 백제 16관등 중 제4)이다.

이로 보면 내마 전씨는 본래 백제의 제3위에 해당하는 은솔 벼슬에 있던 백제 고관이었음을 알 수 있고, 진차원은 백제 제2위의 벼슬인 달솔의 지위에 있었고, 진무와 목씨는 백제 제4위 관등인 덕솔의 지위에 있어 모두 백제 상층 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가 포용정책을 펴면서 이들의 지위를 인정할 때 위와 같이 그 지위를 전체에서 반 이하로 강등했던 것이니 이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76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당나라 점령군의 주둔과 간섭을 청산하지 못했던 큰 원인이 이렇게 속 좁은 승자의 우월주의로 백제와 고구려 유민 위에 군림하려 한 데 있지 않았나 한다. 그 이후 삼국 지역의 지방색이 서로 대립적인 양상을 띠며 계승되는 것도 원인을 따지자면 신라의 이런 옹색한 통일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당나라 주둔군과 신라군 양쪽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아야 했던 백제 유민들은 문무왕의 서찰을 받고 설인귀의 대군이 회군해가자 이제는 복국(復國: 나라를 되찾음)의 희망을 버리고 차츰 신라에 항복해 불만스럽지만 그 회유책에 순응해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문무왕 13(673) 계유년에 백제 지배층들에게 강등된 지위로 신라 벼슬을 내릴 때 이들은 그 벼슬을 그대로 수용했던 듯, 바로 그 계유년(673) 415일에 이 불비상을 조성해 세우면서 강등된 신라 벼슬을 그대로 써 놓고 있다. 다만 달솔 진차원만은 백제 벼슬을 고집하고 신라 벼슬을 받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기에 동참 발원한 인물들의 성씨도 전씨를 비롯해서 진(), ()씨 등 백제 최상층 지배 씨족의 성씨가 중심이 돼 있는데 진씨는 태안반도와 삽교천 유역인 내포 일대를 장악하고 해상활동을 주도하던 씨족이었고 전씨는 전의(全義)를 중심으로 온양과 천안 일대의 곡교천 유역을 세력 기반으로 삼던 지배 씨족이었다. 그리고 목()씨는 목천(木川)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지배 씨족이었다.

이로 보면 이들은 내포를 중심으로 한 태안반도 일대에서 부여복신과 함께 치열한 백제 부흥운동을 벌이다가 끝내 실패하자 이곳으로 밀려온 백제 유민들인 듯하다. 이들이 이곳 전의로 몰려든 것은 이곳이 전씨들이 차지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온양과 천안, 목천에서 공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는 데다 증산(甑山)산성, 운주산(雲住山) 남북산성, 고산(高山)산성 등이 이 지역을 에워싸 외적의 침입이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전의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길목이 비암치(碑岩峙). 그래서 그 길목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비암사를 세우고 그 비암사에다 아미타삼존상을 새겨놓은 불비상을 조성해 봉안했던 것이다. 백제 부흥운동 기간 중에 전사한 무수한 생명들이 극락국토에 왕생할 것을 기원하고 그동안에 돌아간 의자왕과 풍왕, 복신 등 국왕 대신들의 영가도 극락에 왕생할 것을 빌며 자신들의 일가친척과 돌아간 선조들의 극락왕생도 아울러 기원했으리라.

비상의 조상 내용을 살펴보면 명문에서 밝힌 대로 전면에는 아미타삼존상이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사방에 2중의 테를 둘러 네모난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아미타삼존상을 봉안한 구도인데 권속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좌우에 협시해 서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뒤로는 4인의 불제자들이 승려의 모습으로 시립하고 있어 7존불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 양쪽 끝으로는 범왕과 제석으로 보아야 하는 호위 신장이 좌우에서 위세를 과시하며 옹위하고 있다.

아미타좌상은 통견(通肩) 형식으로 불의(佛衣)를 입고 네모난 수미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는데 가사 자락이 대좌를 3중으로 덮어 내리는 포수좌(袍垂座, 裳懸座) 형식을 보여준다. 수인(手印: 손짓)은 설법인(說法印: 설법할 때 짓는 손짓)을 지어 가슴 앞에서 오른손의 가운데 세 손가락을 꼬부려 보이고 왼손으로 하여금 명치 근처에서 무엇을 받쳐 드는 듯한 손짓을 하게 했다.

얼굴은 마멸이 심해 알아보기 힘든데 어깨가 넓고 커서 당당한 체구를 자랑한다. 이렇게 어깨가 넓고 큰 것은 초당 시대 당나라 불상 양식의 특징이니 660년대에 당에서 만들어진 용문석굴 잠계사동(潛溪寺洞) 오존불좌상(도판 180)의 주불 모습에서도 그 공통성을 찾아볼 수 있다.

좌우에 시립한 관세음보살입상과 대세지보살입상은 경주 배리 미륵불삼존상(도판 167)의 오른쪽 보살입상과 비슷한 양식을 보여 긴 구슬걸이를 어깨에서 무릎 아래까지 걸어 내리고 천의를 비슷한 길이로 늘어뜨려 서로 교차시키는 몸치장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각기 바깥쪽 손을 늘어뜨려 정병(淨甁)을 잡고 안쪽 손은 가슴으로 들어 올려 구슬 모양의 지물을 받쳐 들고 있는 것은 배리 미륵불삼존상의 왼쪽 보살 자세 그대로다.

두 보살상 역시 얼굴이 뭉개져서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데 두원광은 그 안에 든 연꽃잎 표현이 국화꽃처럼 꽃잎 수가 많고 끝이 뾰족하다. 둥글고 꽃잎 수가 적은 불상의 두원광 형식과는 대조적인 표현이다. 두원광 뒤로는 보통 주형(舟形) 광배라고 부르는 촛불꽃 모양의 거신광(擧身光: 온몸에서 나오는 빛)2중으로 표현되고 있다. 안쪽 거신광은 5구의 화불좌상이 연화좌 위에 합장하고 앉은 모습으로 높게 돋을새김 돼 있고 그 아래로는 파서 새긴 불꽃무늬가 장식돼 있다.

두 가닥 둥근 띠 사이로 구슬띠를 둘러 안쪽 거신광을 구별 짓고 나면 그와 같은 모양의 바깥 거신광이 펼쳐지는데 천의 자락을 휘날리고 하늘을 날며 무엇인가를 가지고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는 모습의 천인이 좌우에 각 4구씩 새겨져서 공간을 가득 메워놓는다. 양쪽 공간이 만나는 정상에는 가부좌를 틀고 연화좌 위에 앉은 인물이 전각을 두 손으로 머리 위에 받쳐 든 형상이 새겨져 있다.

전각 안으로부터 2좌의 불상이 기둥 사이로 보이고 있으니 아마 이 인물은 제석천일 듯하다. 불꽃 형태의 거신광 상부와 불비상의 위쪽 네모틀 사이에 생겨난 양 모퉁이 삼각형 공간은 인동(忍冬)무늬로 불꽃 주변을 장식한 다음 불상을 모신 전각 한 채씩을 한 손으로 떠받들고 날으는 비천 1구씩을 각각 새겨서 장식해놓았다.

3층의 옷주름이 덮어 내린 네모진 수미좌대 아래로 뒤집어진 연꽃잎이 표현되고 그 좌우로는 사자가 각각 1마리씩 엎드려 있어서 연화좌와 사자좌를 모두 상징하고 있다. 불타의 좌대를 수미좌라고도 하고 연화좌라고도 하며 사자좌라고도 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함축 표현해 놓은 것이다. 놀랄 만한 종합의장이다.

협시보살상을 비롯한 모든 협시 권속들은 연꽃 줄기로 연결된 둥근 연화좌를 각각 딛고 서 있는데 이런 모든 좌대를 큰 연꽃잎으로 이루어진 우람한 연화좌대가 모두 받치고 있다. 정녕 화면을 빈틈없이 채운 화면충전법(畵面充塡法: 화면을 가득 채우는 기법)의 인도적 전통을 충실하게 지켜낸 보기 드문 불비상 조각이라 할 만하다.

양쪽 측면은 각기 한 면에 4구씩의 주악천(奏樂天: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을 돋을새김해서 전면의 아미타삼존상을 찬탄하게 하고 있다. 연꽃 줄기가 벋어가면서 4송이의 연꽃들을 각각 피워내고 그 위에 각종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주악천 1구씩을 표현해놓은 것이다. 악기는 요고(腰鼓), (), 젓대(), (), (), 비파(琵琶) 등이다. 그리고 명문은 이 주악천들 사이 빈 공간에 새겨 넣고 있다.

뒷면 역시 긴 네모꼴 평면인데 4단으로 나누어 각 단에 5구씩 화불좌상을 돋을새김해 놓았다. 모두 연화좌 위에 앉아 팔짱 낀 모습이니 북위 시대 이래로 천불을 표현하던 방식이다. 20불 모두 가슴에 만() 자가 새겨져 있으니 앞면 아미타불상과 동일한 불격(佛格)임을 나타낸 것이다. 명문은 각단 화불좌상 사이사이에 새겨져 있다.

본래 이 불비상은 지붕과 받침이 딴 돌로 만들어져서 끼워 맞추도록 돼 있었는데 이것들은 모두 흩어져 없어졌다.

[출처]: KR pia KOREAN DATABASE 한국의 지식컨텐츠

 

(3)高麗史登載先祖(全氏)


성 명

활 동 년 도

관 직

전보인(全輔仁)

989 (성 종)

상서좌복야

전 언(全 彦)

1023(현 종)

태상재랑

전석조(全錫祚)

1068(문 종)

지병마사

전함정(全咸正)

1075(문 종)

전중내급사

전 총(全 寵)

1101(숙 종)

주부(主簿)

전 용(全 鎔)

1135(인 종)

합문지후

전 량(全 諒)

1178(명 종)

낭중(郎中)

전존걸(全存傑)

1193(명 종)

대장군

전수룡(全守龍)

1200(신 종)

사록 (司錄)

전 의(全 懿)

1230(고 종)

안찰사

전 한(全 僴)

1231(고 종)

부사

전공열(全公烈)

1236(고 종)

거인(擧人)

전광재(全光宰)

1258(고 종)

진주목부사

전 승(全 昇)

1298(충선왕)

병조상서

전 언(全 彦)

1326(충숙왕)

찬성사

전세정(全世貞)

1327(충숙왕)

호군(護軍)

전영보(全英甫)

1330(충숙왕)

삼사사

전 신(全 信)

1330(충숙왕)

감찰대부

전윤장(全允臧)

1339(충숙왕)

첨의찬성사

전사의(全思義)

1339(충숙왕)

찬성사

전원발(全元發)

1342(충혜왕)

전교부령

전 경(全 卿)

1342(충혜왕)

성균좨주

전 충(全 忠)

1344(충목왕)

전교승

전성안(全成安)

1347(충목왕)

수원부사

전 익(全 翊)

1353(공민왕)

문과급제

전우상(全遇祥)

1356(공민왕)

지평(持平)

전이도(全以道)

1359(공민왕)

예부시랑

전승원(全承遠)

1364(공민왕)

병마판관

전보문(全普門)

1366(공민왕)

판삼사사

전 보(全 甫)

1375(우 왕)

판전의사사

전백영(全伯英)

1390(공양왕)

우사의대부

전 빈(全 賓)

1390(공양왕)

좌정언

전 순(全 順)

1392(공양왕)

우헌납

전오륜(全五倫)

1392(공양왕)

우상시

전경선(全敬先)

               1328(충숙왕)

판사

  

출처 : 전씨(全氏) 광장
글쓴이 : 한강의 언덕(전과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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