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 고찰 [전근(全謹)]

2015. 11. 13. 07:02 인물열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9

전라도(全羅道)

담양도호부(潭陽都護府)

동쪽은 순창군(淳昌郡) 경계까지 20, 옥과현(玉果縣) 경계까지 30, 남쪽은 창평현(昌平縣) 경계까지 20, 서쪽은 창평현(昌平縣) 경계까지 14, 북쪽은 장성현(長城縣) 경계까지 20리이며, 서울과의 거리가 713리이다.

건치연혁본래 백제의 추자혜군(秋子兮郡)을 신라 때에 추성군으로 고쳤고, 고려 성종(成宗) 14년에는 담주도단련사(潭州都團練使)를 두었고,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나주(羅州)에 부속시켰다가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공양왕(恭讓王) 3년에 율원(栗原)을 겸하여 다스리게 하고, 본래 태조(太祖) 4년에 국사(國師) 조구(祖丘)의 고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시켰고, 공정왕(恭靖王 정종)이 즉위하던 해에 중궁 김씨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부()로 승격시켰으며 태종(太宗) 13년에 준례에 따라 도호부가 되었다.

관원부사(府使)교수(敎授) 1.

군명추자혜(秋子兮) 추성(秋成)담주(潭州).

성씨본부 이()()(), ()()() 모두 내성(來姓)이다. 원율(原栗) ()()()()(). 정석(貞石) ().

산천추월산(秋月山) 부의 동북쪽 2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석벽(石壁)이 깎아세운 듯 사방으로 둘렀는데 마치 성과 같다. 둘레가 918자요, 서북방으로만 보행자가 통행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시내가 둘러 흐르고 또 13개소의 샘이 있다. 금성산(金城山) 부의 북쪽 15리에 있다. 남산(南山)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원율천(原栗川) 부의 북쪽 1리에 있으니, 용연(龍淵)에서 나와 부()를 싸고 북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창평현(昌平縣)의 죽록천(竹綠川)과 합하여 광산(光山)의 혈포(穴浦)로 들어간다. 용연(龍淵) 추월산(秋月山) 동쪽에 있는데, 사단(祠壇)이 있어 매년 춘추로 용()에게 제사를 드린다. 날이 가물면 기우제를 지낸다. 차면지(遮面池)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토산석류호두, 죽전 점이산(點爾山)광동(廣洞)추라산(推羅山) 등지에서 난다. 매실모시닥종이복령(茯苓).

누정축요루(祝堯樓)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학교향교(鄕校) 부의 북쪽 2리에 있다.

역원덕기역(德奇驛)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서원(西院) 부의 서쪽 2리에 있다. 오례원(五禮院)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연덕원(延德院) 부의 동쪽 15리에 있다.

불우용천사(龍泉寺)연동사(煙洞寺) 모두 추월산(秋月山)에 있다.

사묘사직단(社稷壇)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부의 북쪽 3리에 있다. 금성산신사(金城山神祠)여단(厲壇)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원율폐현(原栗廢縣) 부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본래 백제의 율지현(栗支縣)이다. 신라 때에 율원(栗原)으로 고치고 추성군(秋成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는데,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용연분소(龍淵噴所) 추월산 동쪽에 두 개의 석담(石潭)이 있는데, 아래에 큰 바위가 있고 물이 바위 구멍에서 나와 흘러서 공중에 뿌리듯이 내려와서 큰 못이 되니 이것을 용연분소라고 한다. 전하는 이야기로, 암혈은 용이 뚫은 것으로 용이 지나간 꾸불꾸불한 자취가 지금도 바위 표면에 남아 있다. 옛적에 안렴사가 그 못에 가서 용의 모양 보기를 청했던바, 용이 그 머리를 내밀자 안렴사와 기관(記官)이 용의 눈을 보고 놀라 죽었다고 한다. 그 아래에 안렴사와 기관의 묘가 있다. 소년암(少年巖) 연동사(煙洞寺) 옆에 있다. 고려인 이영간(李靈幹)이 어려서 연동사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하루는 영간이 혼자 나가서 서쪽 산령(山嶺)에 올라 한 동자와 바위 위에 같이 앉아 장기를 두었다. 그런데 큰 호랑이가 바위 가에 엎드려 있는 것이었다. 영간이 조용히 장기를 그만두고 돌아와 그 일을 모두 말하였다. 중이 기이하게 여기고 가서 보니 동자와 호랑이는 간 곳이 없고 다만 바위 위에 장기판이 있고 바위 아래는 호랑이 발자취만이 남겨져 있었다. 이로 인해서 그 바위를 소년암(少年巖)이라 하는데, 지금까지 장마비를 겪으면서도 이끼가 끼지 않고 그 자리는 완연히 어제 일처럼 남아있다. 또 전하는 이야기에, 영간이 그곳에서 공부할 때 중이 술을 빚어 두면 술이 익자 꼭 훔쳐 마시는 자가 있었다. 중이 영간을 의심하여 매질을 여러 번 하였다. 영간이 몰래 살펴보니 늙은 삵쾡이가 와서 마시는 것이었다. 영간이 이를 잡아 죽이려 하니 삵이 사람의 말을 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나를 따라오면 평생 이용할 기묘한 술수를 얻으리라.” 하는 것이었다. 때마침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책 한 권을 던져 주거늘 영간이 삵쾡이를 놓아주고 그 책을 가져와서 마침내 비술(祕術)에 통하게 되었다. 그가 조정에서 한 일 중에는 이상한 일이 많았다. 정석부곡(貞石部曲)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금성산고성(金城山古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184, 안에는 시내가 하나 있고 9개소의 샘이 있다.

명환본조 남계당(南季堂) 정사는 청렴하고 간결하게 하였다. 가물었는데 성의껏 구제하여 한 고을이 전부 살아났다. 일이 왕께 알려지니 교서를 내려 포상하고 훌륭하게 여겼다. 곽은(郭垠) 부역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가볍게 하여 읍인들이 사랑하고 받들었다. 갑자가 관아에서 죽게 되니 사람들이 비통하여 술과 고기를 끊고 서로 조상하였다. 지금껏 그 은혜를 잊지 못해서 기일이면 제사를 올린다.

인물고려 이영간(李靈幹) 문종(文宗) 때 사람. 벼슬은 참지정사(叅知政事)에 이르다. 이성(李晟) 과거에 급제하여 수원 사록(水原司錄)이 되었다. 임기가 찬 뒤에는 일가가 죽계(竹溪)의 촌사(村舍)에 돌아갔고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59세에 좌사보(左司補)를 배수하고 서성(西省)에 입직하면서 시를 짓기를, “약체(藥砌)의 청풍은 이 늙은이를 조롱하고 죽계의 명월은 나의 정을 유인하네. 어제 저녁 이미 전원에 돌아갈 생각을 결정하였으니, 강남에 눈이 다 녹을 제 필마로 돌아가리라.” 하였다. 다음날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니 일시의 명유(名儒)들이 술상을 차려 전별하였다. 뒤에 여러 번 벼슬을 옮겨 민부 전서(民部典書)가 되었다. 사람됨이 학문에 힘써 게으르지 않으매 따라서 배우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당시 사람들이 오경사(五經笥)라 일컬었다. 전록생(田祿生) 자는 맹경(孟耕). 충혜왕(忠惠王)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공민왕(恭愍王) 때에 기거사인(起居舍人)에 배수하고 여러 번 천거되어 정당문학 문하평리(政堂文學門下評理)를 지냈다. 신우(辛禑) 초에 간관(諫官) 이첨(李詹) 등과 같이 이인임(李仁任)을 죽이기를 요청하다가 곤장을 맞고 유배길에 죽었다.

우거고려 강호문(康好文) 자는 자야(子野), 호는 매계(梅溪). 벼슬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이르다.

효자고려

김기(金頎)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어머니가 돌아간 뒤에 애훼(哀毁)하여 거의 본성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3년간 여묘하고, 다시 아버지를 위하여 3년을 더 지냈다. 벼슬은 장흥 부사(長興府使)까지 지냈다.

전근(全謹)

9세에 아버지를 잃고 슬퍼하기를 예의 정도를 벗어났고,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 그 뜻에 조금도 어김이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의 법을 쓰지 않고 하나같이 주문공(朱文公)의 가례에 따랐으며, 아버지 선영 아래에 장사 지내고 3년 간 여묘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를 위하여 다시 3년상을 지냈다. 벼슬은 소윤(小尹)(1)에 이르렀다.

본조 송시흥(宋時興)

3살에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를 효성으로 모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여묘 3년을 마치고, 자신의 나이가 어려 아버지의 상을 입지 못한 일이 한이 되어 아버지 묘에서 다시 3년을 지냈다.

신증채안택(蔡安澤)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자신이 돌을 져서 봉분을 짓고 여막에 3년간 거주하면서 자신이 음식을 만들어 상식과 제사에 정성을 다하였다. 일이 알려져 마을에 정려문을 세웠다.

권복(權福)

효성으로 아버지를 섬겼고 일찍 작고한 어머니를 추모하여 사실(祠室)을 짓고 조석으로 제사를 지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묘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3년 상 마칠 때까지 죽을 먹고 뒤에도 삭망 상식을 그치지 않았다. 금상(今上) 23년에 정려문을 세웠다.

열녀본조 우씨(禹氏) 김유정(金惟貞)의 처. 나이 20세에 김씨에게 시집와서 4년 만에 남편이 죽었는데, 상을 입고 시어머니 전씨(田氏)를 지극한 효도로 섬겼다. 한번은 집에서 밤에 불이 났는데 시어머니 전씨는 병으로 일어나지도 못하니 우씨는 불을 무릅쓰고 시어머니를 업고 나왔다. 남편의 상이 끝나자 부모가 그의 뜻을 꺾고자 하니 우씨가 말하기를, “내 두 자식이 있으니 먹여 살려야 하겠고, 더구나 남편이 죽을 때 노모를 부양토록 부탁하여 내 허락하였으니, 사람이 되어 신의가 없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서리오,” 하고, 죽기로 맹서하니 부모도 강권하지 못하였다. 시어머니가 죽자 애호하고 장사와 제사를 예에 따라 지냈다.

제영격계기저유인가(隔溪機杼有人家) 강호문(康好文)의 시에, “사람을 보내고 맞는 관로(官路)는 시내 옆으로 나있는데, 고을은 피폐하고 인민은 쇠잔하며 부역은 많도다. 싸늘한 비와 거친 연기 속에 몇 가호의 집이 희미한데, 시내 건너 베짜는 북소리 나니 사람 사는 집이 있도다.” 하였다. 전천창록범화류(前川漲綠泛花流) 김길통(金吉通)의 시에, “먼 곳 산 구멍의 푸른 기운이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데, 앞 내에 많아진 푸른 물은 꽃을 띄우고 흐르더라.”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영종(英宗) 4년 현()으로 강등되었다 역적(逆賊) 미귀(美龜)가 태어난 읍이기 때문이다. 14년에 다시 승격되었으며, 38년에 현으로 강등되었고, 47년에 다시 승격되었다.

방면동변(東邊)서변(西邊) 모두 부내(府內)이다. 고지산(古之山) 동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정석(貞石) 동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며, 옛날 정석 부곡(貞石部曲)이 있다. 어이동(魚伊洞) 동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15리이다. 갈마곡(乫亇谷) 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20리이다. 대곡(大谷) 남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두모곡(豆毛谷) 서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우치(牛峙) 서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20리이다. 산막곡(山幕谷) 서북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천인곡(千人谷) 북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목산(木山) 서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40리이다. 답곡(畓谷) 남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15리이다. 천동(泉洞) 북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10리이다. 용천(龍泉) 북쪽으로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성지금성산성(金城山城) 북쪽으로 20리이며, 옛날 돌로 쌓은 성이 있다. 선조(宣祖) 30년 개축하였고, 언덕을 연하여 성을 쌓았다. 효종(孝宗) 4년 중수(重修)하였는데, 내성의 둘레가 610보이고, 외성의 둘레가 494보이며, 미성(尾城)72, 호지(壕池)5, 우물 29개가 동문과 남문 안팎에 있고, 내성 남문은 서북으로 두 문이요, 남의 세 문은 적의 침입을 받을 만한 곳이 된다. 담양(潭陽) 윗쪽으로 길이 산등성으로 났는데, 한 길[一線]1백 번 굽이돌고 돌기를 6, 7리나 해서 비로소 남문에 도달하게 되고, 남문 밖 양쪽 곁은 모두 절벽이다. 동문 밖 670보에 돌이 있는데, 비스듬하게 서서 성문을 엿보니, 서문 양쪽 곁에는 산이 모두 절벽이요, 동북 정남에는 1천 길이나 벽같이 섰고, 성의 모양이 기장(奇壯)하고 멀리 툭 트여 사방이 높고 가운데는 움푹 들어가고 밖에는 준봉(峻峯)이 없어서 성문을 엿보기가 어렵다. 사면으로는 선로(線路)가 줄로 깔렸으니 참으로 형세가 있는 땅이다. 노적봉(露積峯)과 금성사(金城寺)가 있고, 서문 밖에는 귀암사(龜巖寺)가 있다. 속읍(屬邑)에는 담양(潭陽)순창(淳昌)옥과(玉果)창평(昌平)창륙(倉六)이 있다. 수성장(守城將)은 본 부사(本府使)가 겸한다. 별장(別將)1인이요, 승성(僧城)1인 있다. 추월산석벽(秋月山石壁) 석벽이 깎은 듯하게 서있고, 사방 둘레가 성 둘레와 같은데 9천 자이며, 그 서북은 보행자만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이고, 가운데는 개울이 둘러있으며, 또 샘이 13군데나 있다.

창고()이 다섯 모두 읍내에 있다. 외창(外倉) 남쪽으로 30리이며, 답곡(沓谷)에 있다. 산성창(山城倉).

교량금강교(錦江橋)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대천교(大川橋)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대교(大橋)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사원의암서원(義巖書院) 선조(宣祖) 정미년에 세웠으며, 현종(顯宗)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유희춘(柳希春) 자는 인충(仁冲) 호는 미암(眉巖)이며, 선산(善山) 사람이다. 벼슬은 행 대사헌(行大司憲)이고, 좌찬성(左贊成)을 증직하였으며,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1)소윤[ 小尹 ]

신라 시대 외관직. 5소경(小京)에 파견한 지방관으로 사대사(仕大舍)라 함. 소경 책임자인 사신(仕臣) 아래의 벼슬로 각 소경에 1명씩 모두 5명을 두었음. 관등은 사지(舍知)에서 대나마(大奈麻)까지였음.

고려 시대 각 시()에 두었던 관직으로서 문종(文宗) 이래 소감(少監)소경(少卿)으로 불렀던 것을 충선왕(忠宣王) 때 소윤으로 고쳤음. () 아래에 있던 종4품직으로 전중시(殿中寺)위위시(衛尉寺)예빈시(禮賓寺)대부시(大府寺)소부시(小府寺)군자시(軍資寺)사재시(司宰寺) 등에 두었음.

고려 시대 개성부(開城府)와 각 경()에 두었던 관직. 개성부 소윤은 충선왕 때 윤()아래의 벼슬로 설치되었고 서경(西京), 동경(東京), 남경(南京)의 소윤은 예종 11(1116)에 판관(判官)을 고친 이름으로 6품직이었음.

조선 초기 한성부(漢城府)개성부(開城府)상서사(尙瑞司) 등에 있던 정4품직. 각 관청의 부책임자로 태조 원년(1392)에 설치되었다. 한성부 이외의 소윤은 얼마 후 폐지됨. 세조 12(1466) 1월 관제개정 때 원래 한성부에 있던 2명의 소윤 가운데 1명은 종4품 서윤(庶尹)으로 이름을 고치고 1명을 없앴음. 고종 24(1887)에 다시 소윤을 두었다가 동왕 31(1894)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폐지했음. 2년 뒤 다시 설치되어 광무 9(1905)까지 남아 있었음. 봉상시(奉常寺)사복시(司僕寺)종부시(宗簿寺) 등에 있던 소경을 태종 14(1414)에 소윤으로 세조 12(1466)에는 첨정(僉正)으로 바꾸었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소윤 [小尹]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