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고려사에 등재된 선조(全氏)

2015. 11. 10. 21:50 인물열전

 

 



 

高麗史登載先祖(全氏)

 

   

성 명

활 동 년 도

관 직

전보인(全輔仁)

989 (성 종)

상서좌복야(2)

전 언(全 彦)

1023(현 종)

태상재랑(3)

전석조(全錫祚)

1068(문 종)

지병마사(30)

전함정(全咸正)

1075(문 종)

전중내급사(4)

전 총(全 寵)

1101(숙 종)

주부(主簿)(5)

전 용(全 鎔)

1135(인 종)

합문지후(6)

전 량(全 諒)

1178(명 종)

낭중(郎中)(7)

전존걸(全存傑)

1193(명 종)

대장군(8)

전수룡(全守龍)

1200(신 종)

사록 (司錄) (9)

전 의(全 懿)

1230(고 종)

안찰사(10)

전 한(全 僴)

1231(고 종)

부사(11)

전공열(全公烈)

1236(고 종)

거인(擧人)(12)

전광재(全光宰)

1258(고 종)

진주목부사(11)

전 승(全 昇)

1298(충선왕)

병조상서(13)

전 언(全 彦)

1326(충숙왕)

찬성사(14)

전세정(全世貞)

1327(충숙왕)

호군(護軍)(15)

전영보(全英甫)

1330(충숙왕)

삼사사(16)

전 신(全 信)

1330(충숙왕)

감찰대부(17)

전윤장(全允臧)

1339(충숙왕)

첨의찬성사(14)

전사의(全思義)

1339(충숙왕)

찬성사(14)

전원발(全元發)(1)

1342(충혜왕)

전교부령(18)

전 경(全 卿)

1342(충혜왕)

성균좨주(19)

전 충(全 忠)

1344(충목왕)

전교승(20)

전성안(全成安)

1347(충목왕)

수원부사(11)

전 익(全 翊)

1353(공민왕)

문과급제

전우상(全遇祥)

1356(공민왕)

지평(持平)(21)

전이도(全以道)

1359(공민왕)

예부시랑(22)

전승원(全承遠)

1364(공민왕)

병마판관(23)

전보문(全普門)

1366(공민왕)

판삼사사(24)

전 보(全 甫)

1375(우 왕)

판전의사사(25)

전백영(全伯英)

1390(공양왕)

우사의대부(26)

전 빈(全 賓)

1390(공양왕)

좌정언(27)

전 순(全 順)

1392(공양왕)

우헌납(28)

전오륜(全五倫)

1392(공양왕)

우상시(29)

전경선(全敬先)(30)

1328(충숙왕)~1396(태조)

(31)

판사(32)

 

관직은 고려사에 등재된 관직을 기록하였습니다.

혹시 누락된 선조가 계시면 댓글에 기록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로 기록에 반영하겠습니다.

 

(1) 법주사 자정국존비 금석문 기록에 의거함

人事篇 / 治道類

科擧

[0412]東人參中國榜眼辨證說

全元發、【號菊坡登文科又登制科第三人官翰林學士壽城人在于光下。】

출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 / 治道類 > 科擧

 

(2)상서좌복야[ 尙書左僕射 ]

고려 시대 상서도성(尙書都省)에 딸린 정2품 벼슬. 장관인 상서령(尙書令)의 다음 가는 직위였음. 상서성(尙書省)의 기본조직은 상서도성과 6부 및 2속사(屬司)로서, 인원은 상서령(尙書令), 좌복야(左僕射)우복야(右僕射), 지성사(知省事) 2품 이상의 재상 4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상서좌복야 [尙書左僕射]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3)태상부(太常府) :

고려 문종 때 국가에서 행하는 제례(祭禮)를 주관하고 왕의 시호와 묘호 등의 제정을 담당하던 관부. 관원으로 태상 경(소경(少卿박사(博士사의(司儀재랑(齋郞)이 있었다.

 

(4)전중성[殿中省]

고려 초에 설치된 전중성은 이들을 토대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곳에서는 왕이 사용하는 선수(膳羞 : 음식의약(醫藥복어(服御)와 왕이 참여하는 국가행사에 쓰이는 장막·휘장·수레 및 좌석 등을 마련하는 제관사(諸官司)를 총괄하였다. 또한 목종 때에 이르러 전중감(殿中監소감(少監(내급사(內給事) 등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주부[ 主簿 ]

정의

조선시대 관서의 문서와 부적(符籍)을 주관하던 종6품 관직.

내용

1392(태조 1) 7월 신반관제(新頒官制)에서는 고려말의 관제를 승습하였다. 이 때 종6품의 주부(注簿(부사(副使)와 종8품의 주부(注簿)가 있었는데, 이들이 차차 개변되어 1466(세조 12)에 종6품의 주부(主簿)로 개칭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주부 [主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6)합문지후[ 閤門祗候 ]

고려 시대 조회(朝會)의례(儀禮) 등 국가 의식을 맡아보던 합문 소속의 관직. 합문이 처음 설치된 목종 때 두었으며 문종 때 정원 4, 7품으로 하였음. 충렬왕 24(1298)에는 정원을 8인으로 하였고, 동왕 34(1308)14인으로 늘리면서 4인은 낭장(郎將)이 겸임하게 하고, 6품으로 하였음. [참고어]합문(閤門).

[네이버 지식백과] 합문지후 [閤門祗候]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7)낭중[ 郎中 ]

고려시대의 상서성(尙書省)과 상서6·고공사(考功司도관(都官)의 정5품 관직.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낭중 [郎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8)대장군[ 大將軍 ]

신라 무관직의 으뜸. 고려 시대 이군(二軍)육위(六衛), 곧 팔위(八衛)에 딸린 상장군(上將軍) 다음 가는 직위. 3. 특히 이군인 응양군(應揚軍)과 용호군(龍虎軍)의 대장군은 근장대장군(近仗大將軍)이라 칭하였음. 대장군은 상장군과 함께 무반(武班)들의 의사를 대표하는 회의 기관인 중방(重房)에 참여하였음. 공민왕 때 대호군(大護軍)으로 개칭됨. 조선 초 의흥친군(義興親軍)의 십위에 딸린 상장군 다음 가는 직위.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대장군 [大將軍]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9)사록[ 司錄 ]

정의

고려시대의 관직.

내용

1042(정종 8) 2월에 동경부(東京府) 사록(司錄) 윤렴(尹廉) 등이 제령(制令)을 받들어 전한서(前漢書)·후한서(後漢書)당서(唐書)를 신간하여 진상하자 관작을 주었다.

1177(명종 7) 4월에 조위총(趙位寵)의 무리 500여 인이 작란(作亂)하여 유수판관(留守判官) 박녕(박녕) 및 그 처음에 항복을 청한 자를 죽였다. 이때 부유수(副留守) 박정의 사록(司錄) 김득려(김득려), 서기(書記) 이순정(이순정) 등은 몰래 숨어서 모면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사록 [司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0)안찰사[ 按察使 ]

고려 최고 지방행정구획인 5도의 장관.

고려사(高麗史)백관지 외직 안렴사조에는 현종 3(1012) 절도사(節度使)가 혁파된 후 안찰사가 설치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실제로 안찰사가 처음 기록에 나타난 것은 정종(靖宗) 3(1037)이었다. 이후 충렬왕 2(1276)에 안렴사(按廉使)로 개칭되고, 충선왕 즉위 후 제찰사(提察使)로 바뀌었다가 다시 충숙왕 후년에 안렴사로 환원되는 과정을 밟았지만 제도로서는 고려말까지 계속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안찰사 [按察使] (두산백과)

 

(11)부사[ 副使 ]

정의

고려시대의 관직.

개설

(使)의 부직(副職)이다. 경직(京職)과 외직(外職) 등 여러 관서에 설치되어 있었다. 품계와 정원, 연혁 등은 일정하지 않고 관서에 따라 다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부사 [副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2)거인[ 擧人 ]

과거보는 사람. 과거 시험에는 뽑혔으나 아직 보직(補職)되지 않고 있는 사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거인 [擧人]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3)병조[ 兵曹 ]

고려 시대 무선(武選)군무(軍務)의위(儀衛)우역(郵驛) 등의 일을 관장하던 곳으로서 중앙 관아인 육조(六曹)의 하나. 태조 원년(918)에 병부(兵部)라 하다가 뒤에 병관(兵官)이라 칭하였음. 성종 14(995)에 상서병부(尙書兵部)라 고침. 문종이 정하여 병부(兵部)에 판사(判事)1인으로 하되 재신(宰臣)이 이를 겸하도록 하고, 상서(尙書) 1인 정3품 지부사(知部事) 1인 타관(他官) 겸직, 시랑(侍郞) 2인 정4, 낭중(郎中) 2인 정5, 원외랑(員外郞) 2인 정6품으로 함.

[네이버 지식백과] 병조 [兵曹]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4)찬성사[ 贊成事 ]

고려 시대 문하부(門下府)의 정2(正二品) 관직. 충렬왕 원년(1275)에 문종(文宗) 때의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고치고, 동왕 34(1308)에는 중호(中護)로 고쳐 3인을 두었다가 다시 찬성사로 바꾸었음. 공민왕 5(1356)에는 문종 때의 제도로 돌아갔다가 9(1360)에는 평장정사(平章政事), 동왕 11(1362)에는 다시 첨의찬성사, 동왕 18(1369)에는 문하찬성사로 고쳤음.

[네이버 지식백과] 찬성사 [贊成事]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5)호군[ 護軍 ]

고려·조선 시대 정사품의 무관직.

고려 공민왕 때 장군(將軍)을 고친 것이다. 오위(五衛)에 속하였던 정사품의 무관으로, 1392년 건국 초에는 12명의 정원을 두었으나 명종 때 8명을 감원하였다. 호군은 후에 문관·무관·음관(蔭官)에서 임명하고 봉록(俸祿)만을 지급, 실제 직무는 맡지 않았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호군 [護軍] (두산백과)

 

(16)삼사사[ 三司使 ]

고려 시대 삼사(三司)의 정3품 벼슬. 판삼사사(判三司事)의 다음에 해당되었으며, 정원은 2인을 두었는데, 충렬왕 때에 좌우사(左右使) 1인으로 나누고, 공민왕 11(1362)에 정2품으로 개정.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삼사사 [三司使]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7)감찰대부[ 監察大夫 ]

고려 시대 감찰사(監察司)의 으뜸 벼슬로 정3품의 대간(臺諫) 벼슬. 충렬왕 원년(1275)에 원나라의 압력으로 관제를 개편하면서 어사대(御史臺)를 감찰사로 바꿈에 따라 어사대부(御史大夫)를 감찰제헌(監察提憲)으로 고쳤고, 동왕 24(1298)에 사헌대부(司憲大夫)로 고쳤다가 뒤에 감찰대부로 고쳤으며 동왕 34(1308)에는 대사헌(大司憲)으로 고쳐 정2품으로 올렸고, 충선왕 3(1311)에 다시 정3품으로 내린 이후 감찰대부로 고쳤다가, 공민왕 5(1356)에는 어사대부로, 동왕 11(1362)에 다시 감찰대부로, 동왕 18(1369)에 대사헌으로 고쳤음. [유사어] 감찰제헌(監察提憲). 대사헌(大司憲). 어사대부(御史大夫). [참고어] 감찰사(監察司). 사헌부(司憲府). 어사대(御史臺).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감찰대부 [監察大夫]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8)부령(副令)

고려시대 내부사(內府司) 등에 속한 정·4품 관직.

하위어 :

내부부령(內府副令) 사수부령(司水副令)

사재부령(司宰副令) 선공부령(繕工副令)

전객부령(典客副令) 전교부령(典校副令)

전의부령(典儀副令) 종부부령(宗簿副令)

 

(19)성균좨주[ 成均祭酒 ]

조선 시대 성균관(成均館)의 정3품 벼슬. 주로 석전(釋奠)의 제향(祭享)을 맡아 봄. 학덕이 높은 사람이었으며, 태종 때에 사성(司成)으로 바뀜.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성균좨주 [成均祭酒]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전교시[ 典校寺 ]

고려 후기에 유교 경전을 비롯한 여러 도서를 보관인쇄하는 일을 맡고, 또 종묘 및 초제의 축문을 작성하던 관청. 관속도 관명의 변경에 따라 바뀌었는데 문종 때의 관원으로는 정3품의 판사로부터 종3품인 감 1, 4품인 소감 1, 5품인 승 2(典校丞), 6품인 랑 1, 9품인 교서랑 2, 9품인 정자 2, 교감 2인을 두었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전교시 [典校寺]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1)지평[ 持平 ]

고려와 조선 시대에 시정(時政)을 논집(論執)하고 백관(百官)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원억(冤抑)을 풀어주는 일 등을 맡았던 사헌부(司憲府)에 소속된 관직 가운데 하나. 고려 충렬왕(忠烈王) 34(1308)에 감찰사(監察司)를 사헌부로 고쳤을 때 감찰사의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지평으로 개칭되었음. 그리고 공민왕(恭愍王) 5(1356)에 감찰사가 어사대(御史臺)로 개편되면서 폐지되었다가 동왕 11(1362)에 감찰사의 복구와 함께 다시 설치되었으며, 18(1369)에는 감찰사가 사헌부로 개편될 때 잡단(雜端)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21(1372)에 지평으로 고쳤음. 이러한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때로는 종5품관이 되기도 했던 지평은 이후부터 사헌부 소속의 정5품관이 되었음. 그리고 조선 시대에는 백관의 비위사실에 대한 탄핵권과 인사 및 법률 개편의 동의 혹은 거부에 관한 서경권(署經權)을 가진 지평이 이조전랑(吏曹銓郞)과 함께 대표적인 청요직(淸要職)으로 인식되었음.

출처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2)예부시랑[ 禮部侍郎 ]

예부는 육부[六部]의 하나로 나라의 전장제도나 전례·제사·학교·과거·빈객접대 등을 담당한 기관. 장관은 예부상서[禮部尙書]. 예부시랑은 예부상서의 부관으로 예부의 차관.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예부시랑 [禮部侍郎]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용어사전), 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23)병마판관[ 兵馬判官 ]

고려 시대의 관직관제인 병마사의 구성 형태의 하나. 병마사에는 중앙군의 전투 동원을 위한 조직인 5군 지휘관과 행영(行營)병마사 그리고 가발(加發) 병마사 등이 있었음. 그 구성은 병마사 1, 지병마사 1, 병마부사 2, 병마판관 3인 그리고 병마녹사 4인 등으로 되어 있었음. [참고어] 병마사(兵馬使).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병마판관 [兵馬判官]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4)판삼사사[ 判三司事 ]

고려 시대 삼사의 으뜸 벼슬. 정원은 1인이었고 재신이 겸하였음. [참고어]삼사(三司). 조선 시대 초기 삼사(三司)의 종1품 벼슬. 태종 원년(1400)에 삼사를 사평부로 고치고 판사평부사라 하였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판삼사사 [判三司事]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5)판전의시사 [判典儀寺事]

[역사] 고려 시대, 전의시(典儀寺)의 으뜸 벼슬. 정삼품(正三品)이다.

출전: Daum 사전

 

(26)우사의대부[ 右司議大夫 ]

고려 시대 문하성(門下省)에 소속된 정4(正四品) 관직(官職). 낭사(郎舍)의 하나로 간쟁(諫諍), 봉박(封駁), 서경(署經) 등의 일에 관여했음. 예종 11(1116) 이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고친 이름. 충렬왕 24(1298) 충선왕이 우간의대부로 환원시키고 종4품으로 낮추었으나 얼마 뒤에 다시 우사의대부로 했음. 공민왕 5(1356) 간의대부(諫議大夫)로 고치고 품계를 종3품으로 올렸다가 동왕 11(1362) 사의대부(司議大夫), 동왕 18(1369) 간의대부, 동왕 21(1372) 사의대부로 고쳤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우사의대부 [右司議大夫]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7)정언[ 正言 ]

고려와 조선시대 봉박(封駁)과 간쟁(諫諍)을 담당한 관직.

고려시대에는 국가 행정을 총관하는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서 조칙(詔勅)을 심의하고 왕에게 간하여 잘못을 바로잡게 하는 간쟁을 맡아보던 낭사(郞舍)로서, 1116(예종 11) 6품의 좌습유(左拾遺) ·우습유(右拾遺)를 좌정언(左正言) ·우정언(右正言)으로 개칭, 1명씩을 두었다. 1308(충렬왕 34) 사보(思補)로 개칭하고 정6품으로 승격시켜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에 속하게 하였다가 1356(공민왕 5) 도첨의사사를 중서문하성으로 고치면서 정언으로 다시 개칭, 1369년 개편된 문하부(門下府)에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401(태종 1) 문하부(門下府)의 낭사(郞舍)를 사간원(司諫院)으로 독립시키면서 문하부에 속했던 습유(拾遺)를 정언으로 고쳐 사간원에 2명을 두었다. 사간원의 정언도 고려와 같이 정6품으로서 봉박과 간쟁을 맡았으며, 다른 관원과 함께 간관(諫官) ·언관(言官) 또는 대관(臺官)으로 불리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정언 [正言] (두산백과)

 

(28)우헌납[ 右獻納 ]

고려 시대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도첨의부(都僉議府)문하부(門下府)에 소속된 관직. 품계는 5품이고, 정원은 1인인 낭사 벼슬임. 충렬왕 34(1308) 당시까지 정6품관이었던 우사간(右司諫)을 우헌납으로 개칭하고, 그 품계를 정5품으로 올리면서 비롯되었음. 그 뒤 공민왕대에는 원나라의 간섭과 이러한 간섭을 배제하려는 움직임과 관련하여 공민왕 5(1356)에 다시 우사간으로 환원되고 품계도 종5품으로 내렸다가, 몇 차례 우여곡절을 겪은 후 다시 우헌납으로 환원되어 고려 말까지 이어졌음. 조선 시대 사간원(司諫院)에 딸린 정5품 벼슬. 고려 시대의 우헌납을 그대로 계승하여 존재하다가 문종 때 우보궐(右補闕)로 개칭되면서 폐지되었음. 우헌납은 간관의 일원으로서 다른 간관 및 대관(臺官)과 함께 각종 언론활동을 하였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우헌납 [右獻納]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9)우상시[ 右常侍 ]

고려 시대 문하성(門下省)의 정3품 관직(官職). 문종 때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개칭한 것임. 충렬왕 원년(1275) 첨의부(僉議府)가 설치되면서 폐지되었으나, 동왕 24(1298)에 우산기상시로 부활했으며, 곧 바로 다시 바뀌었음. 공민왕 5(1356)에 다시 우산기상시로 변경되었다가, 동왕 11(1362) 좌상시로, 동왕 18(1369)에 우산기상시로, 동왕 21(1372) 우상시로 바뀌었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우상시 [右常侍]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30)지병마사[ 知兵馬事 ]

고려 시대 동북면과 서북면의 병마사 아래에 두었던 3품 무관직. [참고어]병마사(兵馬使).

용례

병마사. 성종 8(989)에 동북면과 서북면에 병마사 1인씩을 두었는데 그 품계는 3품으로 하고 옥대를 띠고 보라빛 옷깃을 단 관복을 입게 하였으며 임금이 친히 부월을 주고 진으로 부임시켜 곤외를 도맡아서 통제하게 하였다. 지병마사 1인을 두었는데 역시 3품이다. ; 兵馬使 成宗 八年 置於東西北面兵馬使一人 三品 玉帶紫襟 親授斧鉞 赴鎭專制閫外 知兵馬事一人亦三品 [고려사 권제77, 33장 뒤쪽, 31 백관 2 병마사]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지병마사 [知兵馬事]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주30)목은시고 제6, 목은시고 제25권에 의거함

 

 

[全判書敬先挽詞

久矣吾多病惠然誰一來金蘭將再講玉樹忽先摧雲薄秋容淡山遙曉色開分離竟如此天地亦悠哉]


 

 

(31) 목은 이색의 생존년도로 추정하였음


 

 

(32)판사[ 判事 ]

정의

고려시대 각 관부의 최고 관직.

개설

중추원·삼사를 비롯해 시(감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관부에 설치되어 있었다.

내용 및 변천

품계는 관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해당 관부의 최고관직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정원은 몇몇 도감(都監)을 제외하고는 모두 1인이었다.

문종 관제에서는 중추원에 종21, 삼사·상서육부(尙書六部어사대·한림원·국자감에 재신(宰臣)의 겸직으로 1, 비서성·합문(閤門전중성(殿中省예빈성(禮賓省위위시(尉衛寺대복시(大僕寺대부시(大府寺사재시(司宰寺사천대(司天臺태사국(太史局)에 정31, 소부감(小府監장작감(將作監군기감(軍器監태의감(太醫監) 등에 종31인을 두었다.

이 밖에 도병마사에는 시중 이하 모든 재신들의 겸직으로, 영송도감(迎送都監)에는 정원 3인의 관직으로, 전목사(典牧司)에는 재신의 겸직으로 각각 설치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재신이 예겸(例兼)하는 경우는 정치 운영에 있어 재신들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평가되며, 이 점이 고려 귀족사회의 정치제도가 가지는 특징이었다.

, 3품이나 종3품의 실직(實職)인 경우에도 바로 아래에 경·감 등 실질적인 행수관(行首官)이 따로 설치되어 있었는데, 양자 사이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그 뒤 1116(예종 11)에 국자감의 판사가 대사성으로 개칭되었고, 1275(충렬왕 1)에는 한림원이 문한서(文翰署)로 개편되면서 판사직은 폐지되었다.

한편, 앞서 1264(원종 5)에 행종도감(行從都監)이 신설되면서 판사가 설치되었으며, 1295년경에는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에서 도첨의령(都僉議令)이 판사로 개칭되었다. 1298년에는 충선왕에 의해 관제개혁이 실시되면서 대부분의 관부에서 판사가 폐지되고, 도첨의사사·삼사·합문·사천대·태사국에만 판사가 존속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충선왕이 퇴위함과 동시에 밀직사(密直司 : 중추원사사(四司 : 상서육부, 典理司·軍簿司·版圖司·典法司를 말함.)·감찰사(監察司 : 어사대) 등에서 판사가 부활되었다.

그러나 1308(충렬왕 34) 충선왕에 의한 또 한 차례의 관제개혁으로 도첨의사사·밀직사·삼사를 제외한 나머지 관부의 판사는 모두 혁파되었다. 그 뒤로는 각 관부의 판사가 다시 설치되는 추세에 있었다. 1310(충선왕 2)에 종부시(宗簿寺, 전중성)의 판사가 부활되었다.

그 뒤 사사·전교시(典校寺, 비서성통례문(通禮門, 합문사복시(司僕寺, 대복시전객시(典客寺, 예빈성내부시(內府寺, 대부시선공시(繕工寺, 장작감사재시·전의시(典醫寺, 태의감) 등에 다시 설치되고, 전의시(典儀寺)에는 신설되었다.

또한, 1331(충혜왕 1)에는 위위시·소부시(小府寺, 소부감)에 다시 설치되었으며, 이 무렵 도첨의사사에서는 영도첨의(領都僉議)로 개칭되면서 폐지되었다. 1347(충목왕 3)에는 정치도감(整治都監)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이상이 겸하는 정원 4인의 관직으로, 이듬해에는 이학도감(吏學都監)에도 정원 7인의 관직으로 설치되었다.

그 뒤 1356(공민왕 5)의 관제개혁에서 삼사의 판사가 혁파되고 사천대·태사국 및 사농시(司農寺)에서는 복치 또는 신설됨으로써 문종 관제의 원형이 대부분 복구되었다. 1362년 삼사에 종1품 관직으로, 개성부에 종2품 관직으로 두어졌으며, 1369년에는 사평순위부(司平巡衛府)에 정원 3인으로 설치되었다.

또한, 우왕 때에는 상서사(尙瑞司)에 재신의 겸직으로 4인이, 1390(공양왕 2)에는 군자시(軍資寺사수시(司水寺)에 정3품 관직으로 설치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판사 [判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 전씨(全氏) 광장
글쓴이 : 한강의 언덕(전과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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