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백록[ 全百祿 ]

2015. 11. 23. 08:35 인물열전

 




전백록[ 全百祿 ]


요약

조선 후기의 무신이다. 서북인으로서는 드물게 정3품인 수군절도사에 등용되었으며 오위도총부 부총관, 황해도병마절도사(1) 등을 역임하였다.

출생-사망 1645 ~ 1712

본관 황간(黃澗)

천수(天授)

국적 한국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함경도 온성


본관은 황간(黃澗)이고, 자는 천수(天授)이다. 함경도 온성(穩城) 출신이다.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전우량(全友諒)의 아들로 태어났다. 1664(현종 5)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훈련원정 등을 역임한 후에 장연·교동·정평·안동·무산·경원·경흥·광주(廣州) 등의 중군을 지냈다.


1702(숙종 28) 함경도북평사 이동언(李東彦)의 추천을 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제수됨으로써 그동안 소외되어 있던 서북인을 등용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오위도총부 부총관, 황해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어딜 가나 청렴하고 치적을 남겼으므로, 그가 죽자 왕이 조문사(弔問使)를 보내 위로하였다고 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전백록 [全百祿] (두산백과)




(1)병마절도사[ 兵馬節度使 ]

요약

조선시대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은 종2품 무관직.

병사(兵使)라고도 한다. 병마절도사의 전신(前身)은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로서 고려 말 창왕(昌王) 때부터 파견되기 시작하여 1466(세조 12) 병마절도사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방의 군사조직을 도별로 체계화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병마도절제사가 파견되기 시작하였고, 조선 건국 후 중앙정부의 지방 통치력이 강화되면서 그 기능도 확충 정비되었다. 병마절도사로 개칭된 다음 1472(성종 3) 관찰사(觀察使)가 따로 이 병마절도사를 겸하면서 병마절도사 제도가 확립되게 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모두 15명으로 충청도 ·경상좌우도 ·전라도 ·평안도 ·영안남북도에 각각 1명씩 모두 7명의 전임관(專任官)이 임명되었는데, 그들을 단병사(單兵使)라 하였으며, 그 밖에 관찰사가 겸하는 겸병사(兼兵使)8도에 1명씩 있었다. 경기 ·강원도 ·황해도에는 단병사가 파견되지 않았으므로 관찰사가 겸병사로서 그 도의 군대를 통할하였다. 1593(선조 26)부터는 황해도에도 단병사를 두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16명의 병마절도사가 파견되었다.

병마절도사는 병영을 설치하고 그 아래 병마우후(兵馬虞侯)와 군관들, 그리고 많은 아전 ·노비 ·공장(工匠)들을 거느리는 한편 유방군(留防軍)을 통솔하였는데, 이렇게 병마절도사의 병영이 설치된 곳을 진관(鎭關)체제에서 주진(主鎭)이라 하였다. 보통 무신으로 덕망을 갖춘 자가 임명되었고, 임기는 2년이었다. 처음에는 경직(京職)을 가진 채로 임명되다가 1477(성종 8)부터 정식 녹봉을 받는 관직으로 임명되었고, 영안남북도의 병마절도사는 각각 북청부사(北靑府使)와 경성부사(鏡城府使)를 겸하였다.

병마절도사는 평상시에는 지방군의 무예훈련과 습진(習陣), 무기의 제작과 정비, 군사들의 군장(軍裝) 점검, 성보(城堡)등 군사시설의 수축 등을 엄격히 살펴서 국방 태세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여야 했다. 그리고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에는 즉각적으로 대응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하였고, 이에 따라 유사시에는 군사를 동원하여 조치를 취한 뒤 중앙에 보고할 권한이 부여되었다. 국방(國防)뿐만 아니라 도민에게 해를 끼치는 맹수를 잡거나, 도적을 체포하고 내란을 방지 ·진압하는 일도 병마절도사의 중요한 임무였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병마절도사 [兵馬節度使]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