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27. 08:25ㆍ 인물열전
서수록(西繡錄)
순조 22년(1822년)/평안도/박내겸/일기
5월 10일.
일찍 출발하여 태평시(太平市)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비를 무릅쓰고 바로 용강으로 들어갔다. 관아 문전에서 공주 박서방이라 자칭하며 문지기를 불러 본관 수령을 만날 것을 청하니, 그 역시 기미를 알아채고 맞아들였다. 한밤까지 조용히 이야기를 하였는데 아전들이나 기생들이 의심을 두는 자가 통 없었다. 이날 120리를 갔다.
5월 11일.
종일토록 비가 왔다. 비를 무릅쓰고 되돌아 출발하여 태평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평양으로 들어왔다. 이날 120리를 갔다.
5월 12일.
경박과 노유종이 들어왔다. 각자 조사한 기록을 정리하게 하고 잠깐 연광정에 갔다.
강을 건너다보니 안장을 갖춘 말이 구름과 같고 쌍 피리소리가 밝게 울리는데, 급하게 뱃사공을 불러서 사공이 관청 배를 가지고 가서 건네주었다.
평양 외성(주1) 사람으로 새로 급제한 전윤담(全允淡)(주2)의 빛나는 귀향 행차인 것이다. 강을 건너더니 곧바로 내성의 넓게 트인 큰 길로 접어들어 지나갔다.
이때가 마침 음악을 쓰지 못하는 때여서 비록 풍악은 울리지 못하였지만 광대와 기녀들이 종종걸음을 치면서 뒤쫓는 것이며 위엄 있는 의식이 그 또한 하나의 장관이었다.(주3)
저녁에 경란의 집을 찾았다. 경란은 이곳에 소속된 기생이면서 성천에 가서 머무르고 있는 자인데 지금 막 돌아왔으나 마침 집에 없었다. 이름이 빙심(氷心)이라고 하는 그 어머니가 나이는 41 세이고 얼굴 모습은 별로 쇠하지 않았는데, 맞아들이는 품이 꽤나 정성스럽고 정다웠다. 내가 말했다. "나는 구걸하러 다니다가 성천에 가서 경란과 얼굴을 익혔으므로 믿고 찾아왔지만, 행색이 이와 같이 초췌한데 주인네가 이처럼 극진히 대해주니 몹시 고맙네." "제가 화류 마당에서 30년 동안 늙어오면서 겪어본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논다는 사람들이 우리 집에 올 때는 모두들 깨끗한 옷을 입고 화려하게 치장하여, 시골의 못난 선비들은 감히 문도 들여다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손님께서는 해진 도포와 찢어진 신을 신고 뚜벅뚜벅 걸어들어와 행동과 말씀이 마치 옆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당당하시니, 반드시 오래지 않아 아주 귀하게 될 분이십니다. 제가 어찌 감히 만만히 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어서 붉은 이슬같은 술을 유리잔에 가득 부어 권하니 나는 큰 잔을 셋이나 연거푸 비워버렸다.
조금 있으려니 경란이도 돌아와 나를 기쁘게 맞아주었다. 그가 이야기하기를, 성천에 있을 때 부용이 나에게 무릎을 바싹대고 정성스럽게 말하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어째서 구걸하며 다니는 길손과 서로 극진하게 구는가?"라고 물으니 부용이 "여러분이 무얼 알겠소마는 성천 태수가 귀인이라는 것만은 알 것이오. 이 손님이 지금 비록 초췌하지만 야박하게 대하면 성천 태수를 위하는 길이 못될 겁니다."라고 대답하였는데, 그 말을 듣고 행색을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비밀을 알아챈 것을 알고서는 일어나 나왔다.
[출처] 서수록(西繡錄)(주4) 박내겸(주5) 암행일기
(주1) 평양외성
『택리지』는 평양의 외성(外城)이 조선시대의 전국 팔도 중 강가에 살 만한 곳으로서 첫째로 꼽히는 거주지였음을 밝히고 있다. 평양은 주변에 백 리에 달하는 넓은 들이 있고 강물의 폭 또한 대단히 넓어 많은 장삿배가 드나드는 등 생리가 좋은데다 산색(山色)과 지세, 들의 모양 등 지리와 산수가 좋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서북쪽은 기름지고 평평한 밭두렁이 지평선까지 펼쳐져 하나의 별천지를 이루고 있다. 내성(內城)에는 관청과 관속의 집이 있고, 평민들은 모두 외성에 모여 산다. 외성은 위만과 주몽 때에 토성을 쌓아 만든 것이다. 지금은 허물어졌으나 아직까지 성터가 남아 있고 여염집들이 그 안에 널리 발달되어 있다. 남쪽은 큰 강을 임하여, 매년 봄과 여름이면 아낙네들이 말리는 빨래가 십 리나 되는 강변에 반짝거리고, 아낙네들의 빨래방망이 소리에 갈매기와 오리가 놀라서 날아간다. 거리에는 집들이 즐비하고, 시장에는 상가가 번화하여 기자 때부터 지금까지 더 번성하거나 쇠한 적이 없었으니, 이 또한 지리의 아름다움을 생각할 만하다.』
- 『택리지』 「복거총론」
[네이버 지식백과] 나라 안에서 가장 살 만한 강마을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1 : 살고 싶은 곳, 2012. 10. 5., 다음생각)
(주2)전윤담(全允淡)
[문과]
순조(純祖) 22년(18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3위
[인적사항]
-생년 무신(戊申) 1788년 -합격연령 35세 -본관 전주(全州) -거주지 평양(平壤)
[음관] 음관(蔭官)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가족사항]
[부]
성명 : 전익방(全翼邦)
[조부]
성명 : 전오상(全五常)
[증조부]
성명 : 전계식(全桂植)
[외조부]
성명 : 최형대(崔亨大)
[출전]
《국조방목(國朝榜目)》(규장각[奎貴11655])
■■ 전윤담(全允淡)이 회덕현감을 지낸 것은
“현감전후윤담애민선정비(縣監全侯允淡愛民善政碑)” (대전금석문,대전광역시사편찬위원회, 1091쪽)라는 애민선정비를 통해 알 수 있다.
전윤담은 1822년(순조22)에 식년시 갑과 3위에 급제한 인물이다. 생년은 1788년(정조12), 본관 전주, 부친은 전익방(全翼邦)이고, 거주지는 평양이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전윤담이 회덕현감에 재임한 시기는 1822년(순조22)년 전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주3) 원래 문과합격자 발표가 난 후 벌이는 잔치는 호사스러운 것이었지만, 부유한 평안도의 인물들이 문과에 급제한 후 벌이는 잔치는 일찍부터 조정에 까지 알려질 정도로 특히 요란하였다.
(주4) 서수록(西繡錄)
1822년(순조 22)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던 박내겸은 공식보고서 외에 암행일기인 <서수록>를 남겼다. '서(西)'는 평안도를, '수(繡)'는 암행어사를 뜻한다.
(주5) 박내겸[ 朴來謙 ]
1. 생몰 1780(정조 4)-?
2. 급제
- 29세 1809년(순조 9), 별시(別試) 병과23(丙科23)
3. 암행어사 연보
- 35세 1815년(순조 15) 사간원 정언으로 활약하다 - 42세 1822년(순조 22) 평안남도 암행어사를 다녀오다 - 암행어사를 다녀온 일기를 [서수록(西繡祿)]이라는 일기를 남기다. - 53세 1833년(순조 33) 동지부사로 청나라를 다녀오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내겸 [朴來謙]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용어사전), 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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