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승정원일기 고찰 [ 전세록(全世祿) ]

2016. 5. 10. 07:57 인물열전

 

승정원일기

숙종 822(경진) 원본288/탈초본15(9/27) 1682康熙(/聖祖) 21

李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以李選爲大司憲, 李箕相爲典籍, 崔碩英爲淮陽府使, 李麟徵爲鏡城判官, 崔援·韓洸·金晳·韓瑄爲兼春秋, 全世祿爲洪原(1)敎養官(2), 黃玧爲副修撰, 沈濡爲濟用正, 洪受寬爲繕工假監役, 尹尙績爲童蒙敎官, 申啓華爲奉常直長, 金晳爲兼監察, 兪櫶爲大司諫, 鄭載岱爲江華經歷, 金萬重爲吏曹參判, 李箕相爲兵曹佐郞

 

(1)홍원덕[ 洪原- ]

양강도 풍서군 무하리 소재지의 동쪽에 있는 마을. 지난날 함경남도 홍원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모여 살던 덕 위에 위치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원덕 [洪原-] (조선향토대백과, 2008., ()평화문제연구소)

 

(2)교양관[ 敎養官 ]

정의

조선 후기 향교교육이 유명무실해지고 교수·훈도 등의 교관이 폐지된 뒤 지방의 유학교육(儒學敎育) 진흥을 위해 비정규적으로 설치되었던 교관직.

내용

1629(인조 7)부터 논의가 시작되어 1649년까지 각 도에 설치되었다.

초기에는 보통 도사(都事)가 겸직하도록 하였으나 때로 도내의 유능한 문관 가운데서 선임하기도 하고, 특별히 학식과 덕망이 있는 자를 추천하여 임명하도록 하였다가 실효가 없어, 1659(효종 10)에는 성균관과 승문원의 참하관 가운데에서 가려 보내 30개월씩 근무하게 하기도 하였다.

교양관은 수시로 파견된 임시방편에 불과하였고, 정식 관제로 확립되지 못하여 그 운영에 일관성이 없었다. 함경도의 회령·경원 지역과 평안도의 청천강 이북지역에 특별히 교양관을 파견한 기록이 있어, 변경지방의 학문진흥책을 엿볼 수 있으나 그 효과는 알려져 있지 않다.

참고문헌

효종실록(孝宗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교양관 [敎養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세록(全世祿)

 

[문과]

숙종(肅宗) 5(1679) 기미(己未)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6

[인물요약]

자 영수(永受) -생년 경진(庚辰) 1640-합격연령 40-본관 강릉(江陵) -거주지 미상(未詳)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관직 전적(典籍)(3)

[가족사항]

[]

성명 : 전문도(全文道)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106])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3)[전적(典籍)]

조선시대 성균관(成均館)에 둔 정육품(正六品) 관직으로 정원은 13원이다.

위로 지사(知事: 正二品)1원으로 대제학(大提學)이 정례대로 겸직하며, 동지사(同知事: 從二品) 2, 대사성(大司成: 正三品), 좨주(祭酒: 正三品), 사성(司成: 從三品) 1, 사예(司藝: 正四品) 2, 사업(司業: 正四品) 1, 직강(直講: 正五品) 4원이 있고, 아래로 박사(博士: 正七品), 학정(學正: 正八品), 학록(學錄: 正九品), 학유(學諭: 從九品) 3원씩 있다. 대사성 이하 성균관에 소속된 관원을 총칭하여 관직(館職)이라고 하였다.

조선건국 직후 성균관의 직제는 고려시대의 직제가 그대로 이어졌으며, 전부(典簿: 正六品) 1원을 두었다. 1401(태종 1) 7월 직제의 일부가 개정되어 전부를 주부(主簿: 正六品)로 개칭하였다. 1466(세조 12) 1월 관제개혁 때 주부를 전적(典籍)으로 바꾸면서 정원이 13원으로 증원되었고, 전적은 도적(圖籍)의 수장(收藏)과 출납·관리의 일을 맡았다. 전적의 관장 하에 성균관의 분장(分掌)인 추쇄색(推刷色)과 공방(工房)이 있었다.

종학(宗學)의 전훈(典訓: 正五品) 이하를 사예(司藝: 正四品직강(直講: 正五品전적이, 경국대전에는 양현고(養賢庫)의 주부를 전적이, 사학(四學)에서는 전적 이하 20명이 사학훈도(四學訓導)를 겸하고 있는 것 등으로 보아 겸직이 많았다. 대전회통에서는 정원의 4원이 승문원의 참외관(參外官: 從八品)이 겸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대전회통(大典會通)

출처 : 전씨(全氏) 광장
글쓴이 : 한강의 언덕(전과웅) 원글보기
메모 :